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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들도 우러르는 그 동네, 테러 이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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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들도 우러르는 그 동네, 테러 이후엔…

[프레시안 books] 그레고리 스미스사이먼의 <9.12>

배터리파크시티(Battery Park City)의 서쪽으로는 허드슨 강이 폭넓게 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웨스트스트리트라는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웨스트스트리트 너머에는 세계적으로 핵심적 금융지구인 월스트리트가 있다. 웨스트스트리트를 건너는 일이 조금 번거롭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배터리파크시티는 화려한 뉴욕의 마천루를 바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비교적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배터리파크시티에는 고급 주택가와 햇살 좋은 산책로가 있고,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작품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발걸음 사이에도 느릿느릿한 편안함이 묻어난다. 배터리파크시티는, 말하자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 배터리파크시티 에스플라나드 공원: 이 공원은 배터리파크시티의 산책로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공공미술로도 유명하다. ⓒ위키피디아

2001년 9월 11일. 끔찍한 테러의 잔해가 배터리파크시티를 짙게 드리웠다. 웨스트스트리트를 두고 세계무역센터와 마주보고 있었던 배터리파크시티의 주민들은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테러의 현장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9.12 - 9.11 이후 뉴욕 엘리트들의 도시재개발 전쟁>(그레고리 스미스사이먼 지음, 권민정 옮김, 글항아리 펴냄, 이하 <9.12>)는 테러 이후 배터리파크시티의 주민들이 자신의 공간을 어떻게 지켜내는지를 다룬 다큐멘터리 형식의 연구서이다. 저자인 그레고리 스미스사이먼은 사회학 전공자로서 3년 이상 배터리파크시티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역사와 주민들에 대하여 연구했다. 스미스사이먼은 대상 지역의 주민들과 대화하고 이들의 지역행사에 참여하며, 또 공청회에 참석하는 등 참여관찰을 통해 9.11 전후로 배터리파크시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 배터리파크시티의 위치. 노란 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배터리파크시티 지역이다. 파란 선으로 표시된 도로가 웨스트스트리트, 빨간색 점으로 표시된 위치가 9.11이 일어난 세계무역센터 자리이다. ⓒ위키피디아

도시공간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배터리파크시티는 여러 모로 흥미를 유발하는 지역이다. 먼저 배터리파크시티 개발은 1960년대에 폭증하는 뉴욕의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돌파구였다. 1920년대 세계 자본주의의 선두주자였던 뉴욕은 세계 자본주의를 강타한 1929년 대공황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지만, 도시 내 제조업이 빠져나가면서 내부적으로 여러 도시 문제를 동시에 경험했다. 할렘 지역은 1970년대가 되면서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일반인은 발을 들이기조차 어려운 '범죄의 공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지금의 배터리파크시티가 위치한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 지역은 낙후된 부두들이 유령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뉴욕은 로어 맨해튼의 업무기능을 복원하기 위해서 배터리파크시티 개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 이어진 화려한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끝나고, 1973년 석유파동이 시작되면서 배터리파크시티 개발 계획은 큰 위기를 맞았다. 개발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서 프로젝트 자체가 중단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뉴욕시에서는 배터리파크시티 개발공사(Battery Park City Authority)라는 특수목적법인을 이용해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했다. 뉴욕시는 이 방법을 이용해 재정을 직접 투입하지 않고 향후 배터리파크시티에서 발생할 수익과 재산세 증가분을 담보로 하는 이른바 조세기반 금융(Tax Increment Finance) 방식으로 개발을 진행하였다. 또한 이 지역은 소유권으로부터 개발권을 분리하는 이른바 개발권 양도(Transfer of Development Right) 등의 다양한 도시계획 기법이 시도되었다. 배터리파크시티 개발 계획은 민관 협력 사업의 대표적 모델이라고 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고, 덕분에 뉴욕은 무너져가던 세계도시의 위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배터리파크시티 지역에는 고급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고, 따라서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주민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대개 고소득자이며, 백인 비율이 높고, 엘리트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연구를 '엘리트 민속지학'(elite ethnography)이라고 설명한다. <9.12>는 이른바 배터리파크시티에 거주하는 엘리트들이 9.11 이라는 끔찍한 테러 이후에 자신들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숙련된 연구자답게 주민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며, 나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들의 행동을 서술한다. 이후 그는 엘리트 집단과 친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저자의 조심스러운 태도 때문에 엘리트에 대한 묘사는 지나치게 동정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않다.

▲ <9.12 -9.11 이후 뉴욕 엘리트들의 도시재개발 전쟁>(그레고리 스미스사이언 지음, 권민정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저자는 극도로 개인주의적 삶을 살고 있었던 배터리파크시티의 주민들이 9.11이라는 사태를 계기로 느슨한 지역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점을 훌륭하게 포착하고 있다. "뉴욕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랬듯이 우선 초점은 인간의 책임에 대한 숙고가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한 슬픔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공공공간을 서성거리면서 슬픔을 나누면서 느슨한 연대감을 형성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저자는 배터리파크시티 주변에 마련된 충분한 공공공간들이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순기능을 해내고 있다고 해석한다. 또한 저자는 주민들이 단순히 슬픔에 빠져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고, 이들의 정서 가운데 '공포'가 있다는 점도 포착해낸다. 슬픔과 공포라는 지역 주민들의 공통적 정서가 일종의 지역적 유대감을 만든 것이다.

배터리파크시티 주민들이 형성해낸 공동체 의식은 타자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단적으로 9.11 테러 이후 망가진 세계무역센터 부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웨스트스트리트를 터널로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전술했듯, 웨스트스트리트는 맨해튼 지역과 배터리파크시티를 구분하는 또렷한 경계였다. 주민들은 이 경계가 무너지면 다른 맨해튼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대거 몰려와 배터리파크시티를 혼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이 계획에 반대한다. 단순히 '혼잡'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웨스트스트리트를 그대로 두는 것이 다른 지역과 이곳이 구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배터리파크시티의 지역 주민은 엘리트답게 교묘하고 복잡한 방법으로 타자와 구별 짓기를 원하는 자신들의 요구를 끝내 관철해 냈다. 이런 전략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책을 읽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9.12>를 처음 펼쳐 들었을 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왜냐하면 <9.12> 표제 아래 있는 "9.12 이후 뉴욕 엘리트들의 도시재개발 전쟁"이라는 부제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부제는 사악한 엘리트들이 뉴욕에서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뭔가 음모를 꾸민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 달리 저자는 시종일관 차분하고도 분석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의 객관적 상황뿐만 아니라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행동으로 이어지는 지점을 포착해냈다. 또한 그는 이론과 실제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독자를 자신의 결론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물론 결론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책에서 아쉬운 점을 굳이 하나 정도 언급하자면, 9.11 이전의 배터리파크시티의 역사가 다소 산만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사건의 개요를 한 눈에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답답해 보일 수 있는 방식이었다. 배터리파크시티에 대한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당시 역사를 복기하면서 충분히 음미할 수 있겠지만, 처음 이 사례를 접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인명과 지명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학자가 가능한 한 빨리 많은 연구를 생산해내기를 요구받는 이 시대에, 성숙한 느린 연구(slow study)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런 답답함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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