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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의 박애가 문제'라는 당신의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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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의 박애가 문제'라는 당신의 문제는

[프레시안 books] 마이클 에드워즈의 <왜 기업은 세상을 구할 수 없는가>

<왜 기업은 세상을 구할 수 없는가>(마이클 에드워즈 지음, 윤영삼 옮김, 다시봄 펴냄)의 저자는 기업(정확하게는 자본가라고 해야 한다. 이하에서는 자본가라고 하겠다)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이유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구체적 사례들에 근거해 제시한다. 이 책은 구체적이고 유용한 자료이긴 하지만 저자의 논리는 단순하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가 그 목적을 위해 고안된 수단들(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측정하기 위한 수량화된 지표들과 그 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소위 과학적인 관리기법들이다)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왜 기업은 세상을 구할 수 없는가>(마이클 에드워즈 지음, 윤영삼 옮김, 다시봄 펴냄). ⓒ다시봄
즉 이윤 추구와 효율성을 본질로 하는 "경제적" 영역과 그 영역과 본질적으로 다른 비경제적인 영역(흔히 이 영역을 "사회적"이라 부른다) 사이에는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는 논리다. 이 경계를 자본가들이 침범하고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경제적인 것으로 편입시켜버리는 행위, 예를 들면 비영리단체(NPO)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 등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논리는 상당히 오래된, 우리에게는 낯익은 것이다. 19세기에는 자본주의이든 공산주의이든 산업화·근대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동일한 한계를 가진다는 낭만주의자들의 주장, 케인스주의적으로 수정된 자본주의이든 스탈린주의이든 국가라는 억압적 수단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한통속이라는 비판, 좀 넓게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모두 근대성에 예속되어 있다는 포스트주의적 비판과 근본적으로 같은 논리 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이런 논리들은 산업자본주의의 폭력적 전개, 제국주의, 신자유주의와 그에 맞서는 "사회주의적" 운동("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을 적대적 공생 혹은 동전의 양면으로 치부하고 기각시켜 버렸다. 자신들의 비판이 더 근본적이라는 명분으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비판의 담론과 실천이 얼마나 거리가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 "근본적" 비판들은 기존 체제에 어떤 위협도 아니었고 오히려 유력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논리를 지배집단에게 제공해 왔다. 지금도 유행하는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을 대립쌍으로 설정하고 "사회적" 가치와 영역의 보존을 주장하는 논리("사회적 경제" 담론이 바로 그것이다)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공격, 특히 신자유주의의 경제 정책에 대한 구체적 비판과 대안 제시를 "경제적"인 것에 불과하다며 평가 절하한다.

하지만 그 논자들이 해결하려고 하는 "사회적"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과 실업자가 넘쳐나는 오늘날의 상황은 신자유주의적 산업 정책과 그것에 연동된 노동 정책을 실행한 인위적 개입의 결과이지 우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결과로 나타난 현상에만 주목하면서 더 근본적인 원인인 자본가들의 경제적 동기에 근거한 공격에는 눈감는 것은 결국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실천의 관점에서 "사회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과 대당 구조를 형성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라는 토대 위에 통제되지 않는 이윤 추구의 부작용을 "경제적"인 것이라고 협소하게 규정하면, 그에 대한 윤리적 비판과 사회 정책적(거시 경제, 산업 및 노동 정책에 대한 관심 혹은 국가 권력의 통제를 둘러싼 정치적 실천마저도 포기해 버리고서) 대안만을 찾는 지극히 좁은 의미의 "사회적"인 것만이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 즉 그들이 말하는 사회적인 것은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려 하는 "사회주의적"인 것도 배제하고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서의 현실 인식과 대안 모색도 포기하게 만드는 제한적인 실천만을 의미하게 된다.

정작 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런 논리에 대한 좌파적 비판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의 구별이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기가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NPO, NGO, 시민운동의 전문가 집단을 대리로 내세울 필요도 없이 그들 스스로가 모든 일을 다 해도 거리낄 것이 없는 상황이 왔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아니 그런 논리가 통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자선"에서 "박애 자본주의"로의 전환이다.

저자는 자본가들이 겸양의 미덕을 발휘해 기업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시민 사회는 자기 같은 전문가들에게 맡겨 놓으라고 말한다. 그의 논리는 앞서 본 바대로 박애 활동과 자본의 이윤추구 행위가 전혀 다른 영역의 것이라는 사고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 전제야말로 최근의 박애 자본가들이 비판하고 바꾸려는 것이었다. 분리되었던 "경제"와 "사회", 이윤 추구와 자선이라는 구분을 없애고 이 두 영역이 동일한 원리에 의해 지배되도록 하는 것이 박애 자본주의의 과제다. 즉 자본가들이 그들이 세상에 등장한 순간부터 원해마지 않던 목표인, 온전히 자본주의적이고 자본가들이 전능한 지배자가 되는 세상을 만드는 작업을 이제는 공개적으로 대놓고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 목표를 우회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대리인이 필요했다면 이제 그 대리인이 용도 폐기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시민운동과 자본이 각자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저자의 논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물색 없는 소리다. 두 영역이 대등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려면 나름의 실체를 가져야 한다. 즉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자선이든 박애든 시민운동이든 간에 자본가들의 돈을 받아 그들을 대신해 집행하는 역할만 해오던 시민운동이 어떻게 독립적인 실체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저자를 비롯한 시민운동 진영이 자신들의 활동 범위를 "이란의 민주화" 따위의 지극히 미국 헤게모니적 영역 내부로 제한하려는 비굴한 제안을 하더라도, 자본가들은 굳이 번거로운 대리인을 둘 필요가 없다. 사회적 경제에서 그토록 찬양하는 거래 비용의 감소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자본가 주도의 박애 활동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비윤리적인가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경청할 만하지만, 자본가들은 전문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주도한 실천도 문제투성이임을 자본가다운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저자와 같은 시민운동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비즈니스적 잣대를 사용해 "기부 수혜자 인식 보고서", 즉 수혜자들의 필요를 시민운동가들이 얼마나 등한시했는가를 원색적으로 보여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기부수혜자 인식 보고서는 플레시먼이 '끝없는 죄악'이라고 부르는 재단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하다. 오만방자함, 무례함, 접촉의 어려움, 독단성, 의사소통의 부재(지원금 기증 절차 문제, 지불 지연) 등등을 비롯해 재단의 주의력결핍장애(단기적인 행동, 유행 따라 하기, 군중 심리)까지 말이다." (<박애 자본주의>(매튜 비숍·마이클 그린 지음, 안진환 옮김, 사월의책 펴냄)에서 인용)

저자의 주장이 근거가 있는 만큼 자본가들의 주장도 상당 부분 사실이다. 가장 큰 박애 재단인 게이츠 재단이 빌 게이츠 부부와 워런 버핏 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저자가 일하던 포드재단의 이사는 여섯 명이었다. 이걸 두고 이사의 수가 두 배나 되는 민주적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AP=연합뉴스

하지만 나는 이 두 집단의 진흙탕 싸움에서 심판 노릇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 집단의 한계는 그들의 부도덕함과 무능 같은 우연적인 이유에서 발생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다. 자본가들과 그들에게 종속된 시민운동은 세상을 구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다. (이 책의 원제목은 이다.) 시민운동이 독자적 실체와 힘, 의지를 가지지 못하는 문제는 과도적이고 우연적인 한계라기보다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문제는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라는 대중을 배제하고 출발한 운동이 케인스주의 시대와 사회주의 운동의 조직 노동운동에 비견할 수 있는 실체를 갖추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자본가 주도의 박애 자본주의를 "우주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구세주 노릇까지 하겠다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주를 지배하는 자들의 책임이다. 그런데 그 자들이 다시 그 악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자기 부정의 행위다. 이런 중세신학의 변신론을 연상시키는 문제 제기는, 세상의 악을 만들어낸 자가 아니라 그 악의 피해자가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즉 전문적 시민운동가라는 '바지사장'이 아니라 자본가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 즉 노동자, 실업자, 주변부 민중, 여성 등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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