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다른 점도 많다. 저자는 개신교 신학자고, 나는 종교학을 연구하는 인문학자다. 저자는 현직 목사고, 나는 그저 이따금만 교회에 가는(가던) 평신도(였)다. 그리고 저자는 유신론자고, 나는 유신론과 무신론 모두에게 끌리는, 굳이 분류하자면 모호한 불가지론자에 가깝다. 이 정도 차이라면 거리두기가 필요한 서평을 나라고 쓰지 말란 법도 없겠지 싶다.
▲ <예수와 다윈의 동행>(신재식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프레시안 |
용어 얘기로 시작해서 장점 얘기로 끝났는데, 기왕에 옆으로 샜으니 다른 장점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겠다. 이 책은 신학적 내용만큼이나 과학적 내용도 풍부한데, 분량만 보자면 사실 후자가 훨씬 더 많다. 과학사와 과학철학, 그리고 과학고전에서 첨단과학까지, 이 책에는 신학자임에도 과학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저자의 공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애매한 양비론이나 교묘해진 패러다임론을 들먹이며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둘 다 담론의 문제이기는 마찬가지이니 도토리 키 재기 아니겠느냐'고 둘러치는 일부 지식인들의 영악함에 비하면, '진화는 사실이고, 진화론은 이 사실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과학적 이론이며,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 같은 과학적 창조론들은 사이비 과학으로 뒤범벅된 종교적 사기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저자의 우직함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 우직함은 깊은 신학 공부와 오랜 과학 독서가 결합되면서 쌓인 내공에서 비롯한 것일 터, 이 점이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칭찬은 이쯤 하고, 책장을 펼쳐보자.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다루는 내용이 많고, 장들이 주제별로 묶이지 않은 채 그냥 순서대로 쭉 나열되어 있다. 우왕좌왕하지 말자. 지은이나 출판사가 묶어주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일정한 흐름이 있고, 이는 대략 다섯 개의 묶음으로 나뉜다.
먼저 첫머리 세 개 장에서 지은이는 그리스도교와 과학 일반, 그리고 진화와 창조 논쟁에 관한 앞으로의 논의를 펼치기 위한 토대를 다진다(1~3장). 지은이는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꿈꾸는 신학자로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결의를 되짚으면서, 독자를 향해 조심스레 초대장을 던진다.
초대장을 받는 일은 늘 즐겁기 마련. 초대에 응하고 책장을 계속 넘기다 보면 '통념'을 무너뜨리는 지은이의 망치를 보게 된다. 그 통념이란 바로 과학과 종교가 '전쟁' 상태에 있다는 선입견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는 명백한 오해로서, 과학과 종교는 원수 관계이기보다는 오랜 동반자 관계였으며 지금도 대체로 그렇다. 과학과 종교가 '전쟁' 중이라는 이미지는 고작 한 세기 남짓 전에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난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근대 서양에서 과학과 종교의 '전쟁'이라는 대중적 이미지가 출현하게 된 계보를 꼼꼼히 추적한다.
두 번째 묶음은 '과학과 종교의 갈등 이미지'를 추적하는 계보학의 확장판이다(4~8장). 지은이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는 않았으며, 갈등보다는 공존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서양 과학사와 지성사 속으로 데려간다.
거기서 우리는 네 명의 근대 지식인을 만나게 된다. 과학자 갈릴레오와 뉴턴, 철학자 흄, 그리고 신학자 페일리다. 이들 중 회의주의자였던 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모색하고 실제로 이를 어느 정도 성취한 이들이기도 하다.
기계론적 사고의 원조 중 한 사람인 뉴턴이 단순히 과학자가 아니라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고, 동시에 연금술에도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웬만큼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앞서 살았던 갈릴레오에 관해서는 그가 '가톨릭 교회의 탄압을 받던 과학자'였다고 보는 통념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런 통념이 오해라는 것을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조목조목 밝혀준다. 많은 이들이 갈릴레오 하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며 뇌까리던 모습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갈릴레오가 더 소중히 여겼던 것은 당대 한 종교 지도자가 했던 말, 즉 "과학은 하늘이 움직이는 원리를, 종교는 하늘나라 가는 길을 보여준다."는 말이었다. 지은이 덕분에 우리는 중세와 근대의 경계에, 종교와 과학의 접점에 서 있던 갈릴레오의 참모습을, 그 고뇌를 보게 된다.
한편, 흄과 페일리에 관한 장들에서는 시간을 가로질러 마치 현재를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흄의 회의주의는 시대정신의 산물이지만, 사실 당대 맥락에서 그는 여전히 소수파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뿌린 '종교에 대한 자연주의적 견해'라는 씨앗은 세월 속에서 싹트고 자라 결실을 맺었는데, 최근 세계 과학계와 인문사회학계에서 종교를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고 있는 이들은 흄의 먼 후예들인 셈이다.
페일리에 관한 장도 흥미롭다. 종교철학을 좀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대개 페일리를 시계공 비유를 들어 자연 너머 보이지 않는 설계자의 존재를 강변했던 신학자 정도로만 기억한다. 또 종교철학 교재들에서 으레 페일리 다음 장에 흄이 나온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순서를 바로 잡아준다. 흄이 먼저고 페일리가 나중이다. 즉, 페일리는 흄의 회의주의에 대한 응답으로 설계논증을 펼친 것이며, 그는 당대의 주류 지식인으로서 당시로선 매우 합리적인 논의를 펼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긴 세월이 지난 지금 페일리에게는 엉뚱한 후계자들은 생겼는데, 그들은 바로 과학적 창조론 진영의 '지적 설계론' 논자들이다. 흄과 페일리를 읽으면서 시대를 가로질러 반복되는 논의 패턴을 발견하는 일은 꽤 흥미진진하다.
▲ 다윈과 진화론을 조롱하는 1871년 삽화. |
다윈 진화론의 탄생 배경은 그 자체로 짧은 다윈 평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맛깔스럽고, 진화론의 핵심 요소들에 관한 스케치는 진화론에 관한 짧은 입문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정리를 잘 해놓았다. 또한 다윈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반응 이야기는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놓을 긴 과정의 첫 국면,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당대부터 지금까지 온갖 오해와 논쟁이 벌어지게 될 긴 시간의 첫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기대로, 누군가에게는 염려로 다가왔을 다윈의 책. 그 책이 세상을 향해 던진 충격의 첫 여파가 지은이의 글 속에서 충실히 되살아난다. 말과 글로 먹고사는 한 사람으로서, 그 말재주와 글발에 질투가 날 지경이다.
네 번째로 지은이는 다윈 이후부터 현대까지 진화론의 다채로운 발전 양상을 다룬다(13~14장). 역시 짧은 현대진화론 입문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자연 속의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벌어진 논쟁들, 덕분에 자연선택이 가설에서 이론으로 확증된 과정, 자연선택 이론과 유전학 지식이 결합되어 현대진화론의 새로운 종합이 이루어진 과정, 그리고 똑같이 다윈의 후예이면서도 상반된 길을 택한 두 사람, 즉 유전자 중심의 리처드 도킨스와 개체 및 집단 중심의 스티븐 제이 굴드 사이의 차이와 그 의의. 한 세기 동안의 일들을 압축해 놓은지라 따라가기가 좀 숨이 찬다. 하지만 책장은 시나브로 술술 잘 넘어간다.
이어지는 장에서 지은이는 진화생물학과 인류학을 중심으로 펼쳐져온 최근 논의들을 다룬다. 바로 자연의 영역을 넘어 인간과 문화, 나아가 윤리와 종교까지 설명하는 데에 진화론을 적용하여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종교가 '적응'의 산물이라고 하고, 인류학자 파스칼 보이어는 종교가 진화의 '부산물'이라고 하며, 진화생물학자 도킨스는 종교가 '밈 복합체'라고 말한다.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언뜻 접합점이 없어 보이는 이 주장들은 사실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상이한 시선들일 뿐이다. 이들은 서로 밀접히 맞닿아 있으며, 하나의 줄기에 사이좋게 붙어있다. 물론 그 줄기란 바로 다윈이다. 짧은 분량에 방대한 논의를 몰아넣고 있지만, 어쨌든 지은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진화론의 확립에서 다윈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지만, 현대 진화생물학의 긴 역사에서 그는 단지 하나의 (물론 가장 중요한) 주춧돌을 놓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은이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이런 성과들을 '정리'하는 데 그쳤을 뿐 이를 과학과 종교 논의의 넓은 맥락에서 되짚어보는 시도는 하지 못했다는 점이겠다. 물론 이는 지은이만의 문제는 아니고, 사람들이 이제야 막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단계이니 그 성과를 기다려봄직하겠다.
다섯 번째 묶음(15~16장)은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울 수도 있겠고, 누군가에게는 식상할 수도 있는 소재, 바로 진화-창조 논쟁, 특히 과학적 창조론들에 대한 지은이의 선전포고다.
식상할 수도 있겠다고 한 것은 세계적인 논의의 흐름상, 그리고 국내에서도 이미 일각에서나마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축적되어온 정황상, 진화-창조 논쟁이 좀 진부해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이 내용이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고 한 것은, 국내에서는 종교적 이유에서든 단순한 호기심에서든 창조-진화 논쟁이 여전히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고, 특히 개신교계 전반에서는 진화론을 거부하는 과학적 창조론이 막강한 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궁금해 할 독자에게 이 장들은 명쾌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사실 앞의 장들에 비하면, 이 장들은 그 내용이 조직신학자인 지은이의 본령이기 때문에, <예수와 다윈의 동행> 전체에서 지은이의 내공과 뚝심이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한국 개신교에서는 언제, 어떻게, 왜 과학적 창조론들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그 주요 뿌리이자 혈맹인 미국 개신교의 상황부터 살핀다. 20세기 중반 근본주의의 부활, 창조과학의 태동, 공교육에 창조론을 끼워 넣으려는 지속적인 시도와 실패, 새롭게 변형된 전술로 출현한 지적 설계론, 그리고 신학자나 진화과학자가 아닌 엉뚱한 분야의 개신교인 과학자들에 의해 이런 흐름이 국내에 직수입된 과정. 고작 반세기 동안 벌어진 일들이지만, 지은이와 함께 그 우여곡절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여기 한국 개신교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뿌리 되짚기로 숨을 고른 뒤, 지은이는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향해 본격적인 포문을 연다. 지은이의 논조는 신랄하고 가차 없다.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창조과학은 "과학 혁명과 성서 역사비평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서 그리스도교가 선택한 보수적 대안 중 하나"로서, 과학적인 면에서는 "사이비"이고, 종교적인 면에서는 "사기"라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엉터리 과학적 창조론들은 단지 과학과의 관계에서만 잘못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 자체를 "왜곡"하고 "갉아먹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한국 개신교계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목사이자 신학자이자 신학대 교수인 지은이의 이 선전포고가 그야말로 얼마나 단단히 작심하고 외치는 소리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여섯 번째 묶음(17~18장)은 대안에 대한 모색이다. 지은이는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관계 역사에서 나타난 다양성을 간단히 복기한 뒤에, 그리스도교가 진화론을 대해온 다양한 입장들을 정리한다. 거부와 수용의 넓은 스펙트럼 사이에는 온갖 상이한 입장들이 포진해 있고, 거부하는 입장의 끝단에는 창조과학이, 수용하는 입장의 끝단에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놓여 있다.
지은이는 진화론 등의 과학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한, 그리스도교는 현대세계 속의 외딴섬으로 고립되어 더욱 위축되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달리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을 수용하면서 그 토대 위에서 신학을 가다듬고 신앙을 정비하려는 유신론적 진화론은 그리스도교가 현대세계 안에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하고 사실상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 2012년 '창조론을 지지하는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가 교과서에서 시조새 부분을 삭제하라는 주장을 하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들은 "시조새는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 화석"이라며 고등학교 교과서 진화론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
한계 없는 책이 어디 있으랴. <예수와 다윈의 동행>에도 한계는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다. 가장 큰 한계는, 이 책이 '그리스도교와 과학'을 넘어 좀 더 포괄적으로 '종교와 과학'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논의가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종교들은 여행 애호가로서의 경험담 정도로만 지나치듯 언급될 뿐이다. 물론 본업이 신학인 사람에게 기대가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지은이는 신학 이전에 종교학을 공부한 이력을 고이 품은 채 삶을 살고 공부를 해온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지 싶다.
기존에 국내에서도 과학과 종교, 창조와 진화에 대해 지은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신학자들의 글(논문, 에세이, 단행본의 장들)과 책(글모음, 역서, 학위논문 출판본)이 약간이나마 있었지만, 또 이 소재들을 나름대로 다룬 그리스도교인 과학자들의 책도 더러 있었지만, 어쨌든 호흡이 긴 한 권의 책으로 이 소재를 본격적으로 깊이 다룬 것은 사실상 지은이가 최초이다.
게다가 세계 학계에서 과학과 종교나 진화와 창조에 관한 논의는 거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그리스도교인 과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과학과 종교 논의에 뛰어든 다른 종교계의 신학자나 교학자는 드물며, 다만 몇몇 불교인 과학자가 외로이 논의를 펼치고 있을 뿐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이 책이 지은이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작은 출발점일 수는 있겠다는 기대로나마 아쉬움을 접는다.
또 다른 한계는 좀 더 본질적이다. 마지막 장에서 지은이는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꿈꾸며 나름의 전망을 제시한다. 그 전망을 대하는 순간 독자는 (적어도 나는) 잠시 주춤거리게 된다. 지은이는 과학이나 종교는 모두 자연을 "탐구"하는 다양한 인간 노력의 일부이기에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지은이는 선배 신학자들로부터 "설명의 계층 구조"라는 개념을 빌려온다. 과학이나 종교는 자연을 "서로 다른 수준에서 설명"하려는 시도이며,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상호보완적 관계 맞다.
그런데 좀 혼란스럽다. 우선, 지은이는 '설명'(explanation)이라는 단어를 두루뭉수리하게 쓴다. 엄밀히 하자면, 과학이 하는 일은 '설명'이지만, 신학이 하는 일은 '설명'이 아니라 '해석'(interpretation) 또는 '이해'(understanding)다. 물론 철학자 겸 신학자 리쾨르가 지적했듯이, 설명과 해석/이해는 분리 불가능하며 밀접히 얽혀 있다. 실제로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들쭉날쭉한 분리와 중첩의 지대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얽힌다는 것은 일단 둘이 별개의 것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설명 방식'인 것이 아니라, '설명'이냐 '이해/해석'이냐 하는 지적 활동의 범주 자체가 다른 활동이다. 이를 간과한 채 과학과 종교를 '설명'이라는 모호한 하나의 범주 안에 뭉뚱그리는 것은 너무 손쉬운 해결책이고, 자칫 지적 게으름으로 빠질 수도 있다.
또한 지은이는 선배 신학자들을 따라 설명의 '계층 구조'에 대해 말하는데, 이런 생각이 보편적 울림을 갖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지은이가 '계층 구조'라는 용어를 쓰고는 있지만, 꼭 수직적 구도를 의미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파악하기에, 지은이가 생각하는 구조는 사실상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몬드리안의 그림 같은 수평적 공존 구조에 가깝다.
이 점에서 모든 학문 위에 신학이 군림하고 있던 중세의 냄새가 나기도 하고, 다른 학계 학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부지런히 사다리 타고 올라갔더니 그 위에 신학자들이 진작부터 죽치고 기다리고 있더라는 씁쓸한 농담도 생각나고 해서, 설명의 '계층 구조'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지은이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특히 문제다.
▲ <종교 전쟁>(신재식·장대익·김윤성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
진지한 관심에서든, 웬 신학자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했나 사시(斜視)하며 접근하든, 생각하는 개신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선배 격 종교임을 자부하는 가톨릭 신자도 같은 뿌리에서 난 다른 가지 쪽 사람의 이야기에 겸손히 귀 기울임으로써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또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의 신자들도 자기만족과 자폐에 눌러앉지 말고, 한 사람의 개신교 신학자가 펼쳐 보여주는 고민의 흔적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누구보다도 스스로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과학과 종교라는 거창한 주제는 고사하고, 종교라는 지극한 일상에도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감히 일독을 권한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때로 이제껏 몰랐던 길로 이끌어주기도 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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