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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얼짱', 유아용 힐… '여자애'니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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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얼짱', 유아용 힐… '여자애'니 괜찮다고?

[프레시안 books]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

페미니즘의 정전으로 손꼽히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1949). 워낙 방대한 내용과 분량이라 실제로 읽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누구나 한번쯤은 접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내가 여성학 수업을 할 때도 반드시 언급하는 명제다.

며칠 전 여성학 수업을 마치고 대학교 정문을 나와 걷다가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정말로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보부아르의 이 명제가, 바로 십여 분 전에 내가 대학생들에게 열을 올리며 설명했던 이 명제가, 헬스장 전단지에 떡하니 쓰여 있었던 것이다. 이 명제 밑에는 날씬한 배와 탄탄한 허벅지를 드러낸 얼굴이 없는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허를 찌르는 '전유'인건가? 아니면 외모 관리가 여성들에게 중요한 자기 계발이자 정체성이 된 현실을 집약한 대단한 '통찰'인 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이 전단지는 이 명제가 얼마나 대중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대중화'의 사례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늘날 여성들의 권력, 자유, 해방, 선택, 자신감, 자기애는 자신의 섹시한 몸을 드러내는 것으로 구축되고 있으니 말이다. 에바 일루즈도 <사랑은 왜 아픈가>(김희상 옮김, 돌베개 펴냄)에서 성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페미니즘이 이러한 현상에 큰 기여를 했다고 진단했다. 또한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는 목소리 역시 '잡년 행진'이란 이름으로 여성의 노출을 대상화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섹시함, 외모 관리 등에 대해 개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여성스러운 소녀' 문화의 최전선에서 날아온 긴급보고서>(페기 오렌스타인 지음, 김현정 옮김, 에쎄 펴냄). ⓒ에쎄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데이지라는 딸의 엄마인 페기 오렌스타인은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김현정 옮김, 에쎄 펴냄)에서 이 어려운 문제를 살짝 비켜간다. 성숙/미성숙이라는 이유로 아이들과 성인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태도가 아니다. 성인 여성들의 섹시함과 외모 관리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는 어렵지만 미성년자들의 섹시함과 외모관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개입이 가능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일부 구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미국에서 딸을 낳고 키우면서 십대 여성들은 물론 어린이와 유아도 외모 관리와 섹시함을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20년 가까이 여자아이들에 대한 글을 써왔으면서도 딸을 낳으면 어떡하나 겁이 났다는 저자의 고백은 이론과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는 딸이 '여자'라는 제약을 받지 않고 자라게 하기 위해 성별화된 옷차림, 장난감, 동화 등을 접하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하지만 데이지가 두 살이 되어 유치원에 입학하자마자 저자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데이지는 바지를 입기를 거부하고, 공주 드레스와 하이힐을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공주님"으로 불리며 분홍색 세상에서 성장한다. 아빠와 엄마가 왕과 왕비가 아니기 때문에 그 딸도 공주일 수 없지만, 부모들은 딸이 공주가 되기를 바란다. 도대체 왜 딸이 공주가 되기를 바라는 걸까? 디즈니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엄마들은 공주의 특성을 판타지, 영감, 동정심,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는 특히 '안전'이라는 답변에 주목하여, 부모들이 공주 놀이가 딸의 성적 대상화를 막아주면서 순수함을 지켜준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44~45쪽)

그렇지만 부모의 바람과는 반대로 동화, 디즈니 애니메이션, 바비 인형에 이르기까지 공주의 구체화된 모습은 예쁘고 날씬하며 글래머인 백인 소녀 일색일 뿐이다. 이들은 젊고 예쁘다는 이유로 다른 여성들의 질투를 받아 저주에 걸리거나 살해 위협을 당한다. 계모와 난장이들에게 집안일을 해주거나 잠만 자다가 아름다운 외모와 순종적인 성품에 반한 왕자에 의해 구출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공주의 삶이다. 여자 아이들은 분홍색 세상의 공주님으로 떠받들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세상은 외모로 자신을 표현하고, 여성성을 수행하며, 타인을 즐겁게 하는 것이 자신의 즐거움으로 간주되고, 성은 곧 성적 대상화와 동일시되는 곳이다.(20쪽)

저자는 딸들이 살고 있는 분홍색 세상의 실체를 파헤친다. 여자 아이들이 어떻게 차별적으로 성별화되는지를 아이들의 놀이문화, 동화, 미디어, 완구 박람회, 여자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장, 4~6세 아이들이 참여하는 미인대회, 인터넷 문화 등 다양한 현장을 통해 보여준다. 세상이 이렇게 촘촘하고 정교하게 딸들을 '여성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새삼스러우면서도 괴롭다.


미국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제국이라는 미국의 위치 그리고 미국 문화에 대한 한국의 동경 때문인지 저자기 이야기하는 현장들은 한국과 많이 겹친다. 그래서 그다지 낯설지는 않지만, 백 마디 말 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수많은 현장을 이야기하면서 관련된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의아하고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많은 미덕을 지녔다. 무엇보다 젠더를 본질화시키는, 이를테면 '여자 아이들은 핑크색과 인형놀이를 좋아하는 DNA를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흥미롭다. 20세기 초반 유아원 색깔이 처음 등장했을 때 핑크색은 강인함을 상징하는 빨간색의 파스텔 톤 버전이라는 이유로 남성적인 색깔이었고, 파란색은 성모마리아와 정절, 정결함을 상징하는 여성적인 색깔이었다.(62쪽) 또한 19세기 후반까지 여자아이들은 특별히 인형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후 출산율 감소를 염려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백인 여자아이들에게 모성본능을 되살리기 위해 인형을 동원했고, 이내 인형은 소녀들과 동의어가 되었다.(76쪽)

이러한 젠더의 사회문화적인 구성은 시대마다 발견되는데 오늘날은 인터넷이 주요 현장이다. 저자는 SNS로 대표되는 가상 세계가 젊은이들이 관계를 개념화하는 방식을 바꾸었다고 지적한다. 젊은이들의 정체성이 점점 타인의 시선과 반응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나르시시즘이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여자 아이들은 선정적인 사진을 올리거나 섹시한 아바타를 만들 때 가장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기 때문에 성적 대상화와 외모에 몰입하게 된다.(257~261쪽)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소통이 증가하고 새로운 민주주의가 구축될 것이라고 전망했고 실제로 그런 지점들이 발견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비대면적이고 시각적인 관계 맺기 방식이 외모지상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인터넷과 핸드폰에 익숙하기 때문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이나 여성을 위한 시공간은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고민이 굉장히 가깝게 느껴졌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페미니스트 동료들도 이런 고민을 많이 토로한다. 아무리 딸 그리고 아들을 평등하게 키우려고 해도 성차별적인 성별화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정에서는 어느 정도 통제를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을 부모 품에 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이들은 유치원에 입학하는 순간, 저자의 딸 데이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에 요구되는 성역할을 바로 알아차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딸들은 여성으로, 아들들은 남성으로 성장해간다.

사실, 이러한 성역할은 아이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각각의 연령에 따른 성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령에 따른 성역할의 변주도 여성성과 남성성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 여성들에게 섹시함과 외모관리를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사회가 여자 아이들에게조차 그러한 것을 요구한다고 한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책이 증명하듯이 섹시함과 외모관리는 연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별에 따른 본질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만은, 또는 나의 딸만은 차별적인 여성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키우겠다는 노력은 헛되기 십상이다. 지금의 우리를 돌이켜보더라도 성인이 되면서 갑자기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을 습득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부정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긍정하고 지향할 수 있는 여성성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마지막에 "여자 아이들이 외부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한다면, 아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나서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297쪽) 하지만 외모보다는 내면을 중시하자는 당위적인 말로 들려서 힘이 빠진다.

물론 우리 사회가 여자아이들을 여성으로 만들어내는 복잡하고 공고한 체계를 목격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란 어렵다. 너무나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어떻게 여자 아이들을 '신데렐라'로 키우고 있는가를 면면히 짚어내는 작업과 더불어 이에 대한 부모, 나아가 여자아이들의 고민과 협상과 저항의 목소리를 드러냈다면 훨씬 더 입체적인 책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대중화되었지만, 여성들은 외모를 중심으로 세력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여성들의 자기애와 자신감이 외모 관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 혼란에 빠져있다. 우리가 찾는 것은 남성의 타자로서의 여성도 아니고, 남성이라는 기준을 모방하는 여성도 아니다. 혹자는 여성성도 남성성도 부정하고 해체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적어도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굉장히 강하다. 그리고 여성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기에 여성성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는 분열 상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을 차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성들도 사실은 분열 상태일 것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광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공주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다. 판타지가 아닌 역사에서 공주는 왕이라는 아버지의 권력에 기생하고, 왕자와 정략결혼을 하게 마련이며, 백성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존재니까 말이다. 저자는 공주에게 친구가 없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홀로 탑에 갇혀 왕자에게 구출되는 공주가 되기보다는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광녀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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