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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죽는 이 있으면 태어나는 이도 있으리라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②

☞연재 지난 회 바로 가기 : 눈 속에서 꽃은 피나니 ①

배우고 살던 곳

5세에 어머니를 잃은 문곡은 8살에 외할머니 정씨의 손에서 자랐다. 외삼촌인 김천석(金天錫)이 홍산(鴻山) 현감으로 나가면서 같이 따라갔다고 한다. 홍산은 부여군 홍산면이다. 문곡은 글을 정씨에게서 배웠는데, 자애로운 외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인지 정씨가 먼저 잠든 뒤에도 문곡은 홀로 늦게까지 글을 읽곤 했다고 한다.

문곡 나이 7세 때 끝난 병자호란은 그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큰할아버지 선원 김상용은 강화에서 순절하였고,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은 낙향했다가 오랜 심양의 억류 생활을 거쳐야 했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문곡은 외할머니를 따라 서천(舒川)에 있는 섬으로 피난을 갔다. 9세가 되던 1637년에는 외할머니를 따라 원주로 갔다. 외증조모 노씨가 세상을 떠서 상주가 된 외삼촌이 원주에 있는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 고향에 묻힘)하러 갔기 때문이다. 문곡은 외할머니의 동생인 정기방(鄭基磅)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12세 되던 해, 문곡은 아버지 김광찬을 따라 안동으로 갔다. 외할머니 정씨가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아버지가 원주에 와서 안동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때부터 문곡은 할아버지 청음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겨울에 청음은 심양으로 끌려갔다. 13세 때 할머니 이씨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일가가 경기도 양주 석실(石室)로 이사를 왔다. 이씨를 석실 선영에 반장했던 길이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석실. 남양주시 지금동 일대이다. 석실서원이 있었다는데, 전에 답사 가서 보니 '석실서원터'라는 작은 빗돌만 덜렁 서 있었다.

할아버지의 편지

11세 때 안동에 내려가 있던 할아버지 청음이 어린 문곡에게 글을 하나 보냈다. <구용사물(九容四勿)>이라는 글이다. 문곡은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고애(孤哀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자신)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외가에서 컸으며, 기묘년(1639, 인조17)에는 원주(原州)에 의탁하여 지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영남(嶺南)에 은거하셨는데, 큰형님에게 구용(九容)과 사물(四勿)을 쓰게 하여 제게 부치시고, 직접 편지를 써서 이르시기를, "네가 이걸 아침저녁으로 보고,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잊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시 10살이 갓 넘었을 때였으므로 어리고 몽매하여 가르침을 이해하질 못했고, 조금 컸을 때도 여전히 즐겨 노는 데 습관이 들어 체득하여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문곡집> 권27 <우재 선생께 올리는 편지[上尤齋 戊申]>)

이 글은 문곡이 현종 9년(1688) 우재, 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낸 편지다. 근 20여 년 뒤 일인데, 청음이 보낸 글이 문곡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음을 짐할 수 있다.

구용(九容)이란 사람이 수행하고 처신할 때 지녀야할 태도 아홉 가지를 말한다. <예기> <옥조(玉藻)>에 보면 "걸음걸이는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은 공손해야 하고, 눈은 단정해야 하고, 입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는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습은 덕이 흘러야 하고, 얼굴은 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는 말에서 나왔다.

사물(四勿)은 공자가 제자인 안연(顔淵)에게 가르친 인(仁)의 실천 태도를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한 데서 나왔다.

청음은 이 글귀와 함께 편지를 보내, "이걸 아침저녁으로 보고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잊지 않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할아버지의 당부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던 문곡은 자신의 집 당호를 아예 구사재(九四齋)라고 붙였다.

소현세자의 죽음

인조 23년(1645) 2월, 청음은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심양에서 귀국했다.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뒤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한 인질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물론 '소현'은 사후에 내린 시호이다.) 문곡은 파주(坡州)로 할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청음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석실에서 모셨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할 때 청음이 낙향했던 기억 때문인지 인조는 '살아 돌아왔는데도 궁궐에 오지 않았다'고 서운해 했다. 문곡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런데 5월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거니와 당시에도 파란이 컸다. 이식(李植)은 "세자는 타국에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는 동안 자주 군대를 따라 동쪽으로 가 삭황(朔荒)에서 사냥을 하고 서쪽으로 연새(燕塞)를 왕래하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위험한 고생을 두루 겪었으므로, 비록 정신은 태연자약하였으나 속으로는 노고로 인해 손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환궁한 이후 계속해서 한열(寒熱)의 증세가 있었는데, 의술(醫術)을 잘못 시행하여 끝내 별세하기에 이르렀다."고 썼다.(<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10일(신유))

인조에게 벼루에 맞아 죽었다는 설, 독약에 죽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소현세자의 죽음은 급작스러웠던가 보다. 한편 청나라가 인조에게 양위를 강요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한 해 전인 1644년 3월 심기원(沈器遠)의 옥사가 발생했을 때, 심기원이 '주상은 한 단계 높여 상왕의 자리에 앉히고, 정사는 다른 한 종실에게 맡기면 주상의 입장에서 편할 것'이라고 말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양위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근거로 인조가 소현세자를 해쳤다고 추정하기는 어렵다.

▲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인질로 억류되었던 심양관 옛터. 지금은 심양 소년아동도서관이 되었다. ⓒ심양시소년아동도서관

진사 수석 합격

문곡은 심기원의 옥사가 있던 16세에 관례를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성균관 시제(試製)에서 수석을 했다. 대제학이던 택당 이식은 입격한 사람들을 불러 얘기할 때, 문곡의 시가 시속(時俗)을 벗어난 고풍(古風)이 있다고 칭찬했다. 또 이번 사마시(司馬試), 곧 생원진사 시험에서는 '김 아무개'를 장원으로 삼아 과거시험장의 퇴락한 습속을 씻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고 한다. 과거시험을 주재하는 대제학이 수석 합격자를 공공연히 언급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 문곡을 둘러싼 중망을 보여주는 일화임에는 틀림없다.

문곡은 택당의 말대로 이듬해 2월 18세로 진사에 장원을 차지했다. 이어 3월에 아버지를 따라 통진(通津)으로 갔다. 그리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웠던지 원주에 있는 외가의 선영에도 다녀왔다.

문곡의 비교적 평온한 일상과는 달리 조정은 그리 조용하지 못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함께, 원손(元孫)이 책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필요하다"

인조가 원손을 제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명분은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國有長君]'는 논리였다. 인조의 생각은 1645년 윤6월 세자 책봉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 가시화하였지만, 인조의 이와 같은 생각은 봉림대군이 심양에서 귀환할 당시에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봉림대군은 계속 심양에 남아 있다가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귀국하였는데, 사관은 "봉림대군이 돌아왔다. 이때 국본(國本)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데다 봉림대군은 본디 훌륭한 명성이 있어 상이 자못 그에게 뜻을 두고 있다고 하므로 숙배할 적에 금중(禁中)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보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사관의 말은 편찬할 때가 아니고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적어둔 것이므로 결과론에 입각한 평론은 아니었다.(<인조실록> 권46 23년 5월 14일(을미))

아마 이런 기류를 알았기 때문인지 같은 달, 지평으로 재직하던 송준길(宋浚吉)은 원손을 세자로 정하고 스승을 두어 교육시킬 것을 인조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송준길은 이 상소에 대한 답도 듣지 못하고 체직되었다. 상소에는 소현세자를 잘못 진료한 의사 이형익에 대한 문책 요청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의(御醫) 이형익

이형익(李馨益)은 소현세자를 치료하던 의사이다. 원래 인조가 이형익의 침술을 인정하여 이해 정월에 이미 특명으로 서용한 바 있었다. 과거에 병을 치료하러 인조의 후궁 조 소용(趙昭容)의 어미 집에 왕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추한 소문이 있었다고도 한다.(같은 해, 1월 4일 무자)

그러나 인조는 약방(藥房) 관원이나 의원들과 상의도 없이 이형익을 불러 침을 놓고 뜸질을 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아낀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침을 맞았다. 그 와중에 소현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御醫)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熱)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였고, 인조도 이에 따랐다.

치료를 받던 중 소현세자는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떴고, 이형익을 벌하라는 논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 사관은 "이형익은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위인으로서 스스로 상의 뜻을 얻었다고 여겨, 무릇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은밀히 상께 말하여 그의 형제와 자식이 모두 음직(蔭職)을 외람되이 차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분개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이형익이 혼자서 뭇사람의 의논을 물리치고 망령되이 요안혈에 뜸질을 하였는데, 상은 그의 의술에 미혹되어 매양 번침을 맞을 때마다 '효험이 있다.'고 말씀하였으므로, 뭇 신하들이 모두 감히 극력 논쟁하지 못했다."고 하였다.(<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12일(계해))

세자가 된 봉림대군의 감기가 오래 계속된 적이 있었다. 인조는 이형익에게 진맥을 명하였다. 이형익은 사기(邪氣)를 다스리는 혈에 침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인조가 세자에게 침을 맞으라고 하자 세자는 극구 사양하며 침을 맞지 않았다. 감기는 곧 나았다. 이형익에 관한 한 인조는 다소 맹목적인 듯하였고, 봉림대군은 형인 소현세자의 경험 때문이었는지 멀리하는 형국이었다.(<인조실록> 권46, 23년 11월 3일(신해))

인조가 멀리 하다

이 무렵, 인조는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 않은 상소를 감히 들여올 경우에는, 자세히 살피지 못한 과실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강력히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이 일은 김광현(金光炫)의 상소 때문이었다. 전말은 이렇다.

김광현은 바로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며 청음 김상헌의 조카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청나라의 침략 때문에 강화에서 죽은 것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서로 접하기를 싫어했고, 벼슬이 제수되어도 늘 병을 칭탁해서 사양하였다. 그리고 외직(外職)에 있으면서 사용하던 공문서에는 간지(干支)만을 쓰고 숭덕(崇德)이나 순치(順治) 같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상소문이나 차자에도 그렇게 하였으나, 인조도 그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세상을 뜬 뒤 김광현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병간호와 치료를 형편없이 했다며 이형익 등의 죄를 극력 논박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인조는 김광현이 세자빈 강씨(姜氏) 집안의 사주를 받고 그런다고 생각하여 매우 노하였다. 강빈(姜嬪)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이 곧 김광현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인조는 이 때문에 김광현을 싫어하였고, 또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부끄럽게 여기는 신하들을 항상 미워했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었고 한다. (<인조실록> 권46, 23년 윤6월 1일(신사))

흐릿한 강빈(姜嬪) 옥사

인조는 당시에 이미 원손인 석철(石鐵)의 왕위 계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은 공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되었다. 적장자 상속의 종법(宗法)을 어기고, 전례를 왜곡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찬성한 이는 김류와 김자점이었다. 김류는 예종이 차자(次子)로 왕위를 이은 것을 마치 덕종의 적장자인 성종이 세자로 책봉된 뒤 교체하고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여 사실을 왜곡하였다.

여기에는 후궁 조 귀인(趙貴人)이 개입되어 있었다. 인조는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 책봉 이후 조 귀인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金世龍)이 혼인하여 두 집안의 관계는 더욱 밀착하였다.(불과 몇 년 뒤인 효종 3년에 김자점, 김세룡, 조 귀인은 반역죄로 처벌을 받는다.)

그러면서 강빈의 옥사가 터졌다. 강빈이 심양에서부터 불순한 마음을 먹었으며, 귀국한 뒤 저주를 통해 군주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반역은 곧 죽음이었다. 김류와 이시백도 강빈의 사사(賜死)는 지나치다고 반대했다. 이경여(李敬輿)는 사사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도로 귀양 갔다. 사간원에서는 강빈의 죄에 억측이 있다고 논계하였다.

여론이 비등해지자 인조는 강빈을 구원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고 하교하고, 서인(西人)을 지목하여 비난할 정도였다. 인조 및 김자점 등 궁궐 세력과 일반 조정 신하들의 대립이 격화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강빈의 죄목을 기정사실화 했던 조경(趙絅),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강빈의 구원 논의를 중지시켰던 공으로 이조판서에 오른 이행원(李行遠)은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다. 조경은 상소를 올린 뒤에 자신이 말한 강빈의 죄상이 근거가 없었다고 후회하였다. 뭔가 판단을 해야 하는데, 판단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사건 속으로 조정은 휘말려 들어갔다. 여기서도 안동 김문(金門)은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원두표(元斗杓)가 청음의 중망을 빌려 인조의 비위를 맞추려는 의도에서 '김상헌도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고 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즉, 강빈 옥사에서 청음 김상헌도 인조의 편을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청음은 2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강빈 옥사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인조는 청음을 계속 만류했다. 이것이 대략 인조 24년(1646) 2월경부터 6월경까지의 상황이었다.

죽음과 태어남

강빈은 결국 3월에 폐출, 사사되었다. 종묘와 숙녕전에 이 사실을 고했는데, 사관은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을 비망기에는 추측이라고 하교하였는데, 제문(祭文)과 교서(敎書)에는 다 곧바로 단정하여 죄안(罪案 죄목)으로 삼으니, 보는 이가 해괴하게 여겼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확정할 수 없는 사안을 단정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빈 옥사는 다음 임금인 효종대에도 불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 대체로 이 시기의 기록을 종합하면, "김자점은 인조가 소현세자의 빈(嬪) 강씨(姜氏)를 죽이려는 내심을 간파하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은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뒤집어 씌워 죽게 하였고, 이듬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濟州)에 유배 보내게 하였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역사의 큰 변화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일어난다. 조금 허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다. 역사는 자연적, 생물학적 조건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가는 문명에 대한 기록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무늬, 곧 인문(人文)이다. 사람에게 죽고 사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개인이나 가문, 단체나 나라의 역사에서도 단연 사람의 죽음은 변화의 정점이나 전환점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죽는 이가 있으면 태어나는 이가 있는 법이다. 20세 되던 인조 26년(1648) 문곡은 아들 창집(昌集)을 얻었다. 부인 안정(安定) 나씨(羅氏) 사이에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자식 복이 많기도 했고, 자식 때문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던 문곡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인조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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