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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외과 수술? <마의> 백광현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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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 시대에 외과 수술? <마의> 백광현의 진실은…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현종의 건강학 ②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의 '낮은 한의학' 연재가 매주 수요일 다시 <프레시안> 독자를 찾습니다. 이 원장은 지난 2009년 3월부터 2011년 5월까지 만 2년간 연재 칼럼을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건강을 지키는 방법과 함께 우리 삶 곳곳에 녹아 있는 한의학의 사유를 소개했습니다.

독자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연재는 <낮은 한의학>(사이언스북스 펴냄) 책으로도 묶여, 시민과 소통하려는 한의사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관련 기사 : 정조 독살은 헛소리! 홍삼의 불편한 진실!) 이상곤 원장은 '낮은 한의학' 시즌 2에서는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현종입니다. 아버지(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조선 시대 왕권과 신권 대립의 정점이었던 예송 논쟁, 조선을 뒤덮은 대기근과 전염병…. 이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번민해야 했던 현종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였습니다. 이런 현종의 건강을 과연 당대의 한의사는 어떻게 지켰을까요? <편집자>

현종과 마의 백광현

현종이 가장 많이 앓은 질환은 종기다. 드라마 <마의>의 백광현(1625~1697년 추정)은 현종 때 활약한 종기 치료 전문가다.

백광현은 실제로 말을 치료하는 마의(馬醫) 출신이며 현종 4년 각종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천한 신분인 마의로 출발해 현종의 종기를 치료함으로써 숙종 5년에 어의가 된 인물로, 종기 치료에 한 획을 그은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종기 때문에 크게 고생한 현종이 '백태의(白太醫)'의 신화를 만든 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백광현이란 인물은 드라마처럼 현대 양방의 수술법을 쓰는 전설적 명의였을까. 숙종, 영조 때의 문장가였던 정내교(1681~1757년)가 지은 <완암집(浣巖集)> 4권 중 '백태의전(白太醫傳)'은 백광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본디 말을 잘 치료했다. 오직 침을 써서 치료했는데 서책(의서)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익히다보니 솜씨가 숙련된 것이다. 말 치료하던 침술을 종창(腫瘡)을 앓는 사람에게 써봤더니 종종 탁월한 효험이 있기에 마침내 사람을 치료하는 데 전적으로 힘쓰게 됐다."

또 <귀록집(歸鹿集)> 14권의 '백지사묘표(白知事墓表)'는 이렇게 전한다.

"젊은 시절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우림군(羽林軍)에 배치되는데, 말에서 떨어져 다친 뒤 한동안 앓은 것을 계기로 의술에 뜻을 두게 됐다. 무릇 독소가 강하고 뿌리가 배긴 정저(헌 부위의 꼭대기가 검고 못같이 된 종기)는 예부터 내려오는 처방엔 치료법이 없었다. 그런데 백광현은 앓는 자를 만나면 반드시 대침(大鍼)을 써서 터뜨리고 찢어 독소를 빼내고 뿌리를 뽑음으로써 거의 죽어가던 자를 능히 살려냈다."

<승정원일기> 숙종 16년 1월 14일 기사는 "오늘날 침의 중에 하침(下鍼·침 놓기)과 파종(破腫·종기 제거)에서 백광현이 으뜸"이라고 썼다. '백지사묘표'는 "백헌 이경석(1595~1671년·영의정)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게 됐으니, 이때가 현종 4년"이라고 적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광현은 30여 년 동안 현종과 숙종 두 조정을 대대로 섬기면서 여러 차례 신효(神效)의 공을 인정받았다. 그때마다 품계가 더해져 의성(醫聖) 허준과 같은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승정원일기>엔 백광현이 현종의 종기를 치료하는 상황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상이 전날 치료한 종기에서 농이 잘 빠지지 않은 것 같다고 하자 백광현은 그의 장기인 침봉(鍼鋒)을 사용하면서 임금께 '종기의 구멍을 칼날처럼 뾰족한 침봉으로 뚫어 배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상은 혹시 구멍이 넓어지면 잘 아물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구멍이 얕게 잘 뚫리면서 많은 농이 배출됐다. 의관 중 김유현이 농이 배출될 종기 구멍이 다시 닫히지 않도록 종이를 말아 구멍 사이에 끼워놓았는데, 상은 종이를 끼워둔 통증이 한 식경까지 갈 정도로 심하다고 털어놓았다."

백광현의 종기 치료법은 100여 년 전에 나온 <동의보감> '옹저문'의 치료 방법과 유사했다.

"옹저로 곪을 때는 말에 물리는 재갈로 부추 잎처럼 양쪽이 다 날이 서게 침을 만들어 열십자로 째고 고름을 짜낸다. 옹저가 생긴 곳의 피부가 두껍고 고름이 나오는 구멍이 작아서 잘 나오지 않을 때는 화침으로 째는 것이 좋다. 고름이 나오지 않으면 심지를 꽂아 넣어야 한다."

기록상의 백광현은 허준이나 조선 최고 침의 허임 등에 비교하면 별 볼일이 없었지만 그 후손들은 종기 치료로 일가를 이룬다. 숙종 10년에는 그의 아들 백흥령이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금위영 침의가 됐고, 박순이 백광현의 제자로 이름을 날렸다. 백흥성 백문창 백성오 등 그의 자손들은 영조에서부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승정원일기>에 이름을 올린다.

한방 외과학 선구자 임언국

드라마 <마의>는 한방 외과술이 백광현과 그의 스승으로부터 시작되고 정착된 것처럼 그렸지만, 전통 의학에서 외과술의 유래는 1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적 명의로 <삼국지>에도 나오는 화타(145~208년)가 원조 격이다. <삼국지>에서 화타는 조조에게 거리낌 없이 외과적 치료법을 제안하다 죽임을 당한다.

"대왕의 머리가 아픈 것은 머릿속에 바람이 일기 때문입니다. 병의 뿌리가 골을 싸고 있는 주머니 안에 있으니 약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마비산(痲沸散)으로 만든 탕을 드시고 잠든 후에 머리를 쪼개 그 안의 바람기를 걷어내야 합니다."

화타가 말한 마비산은 대마와 만다라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농본초경>은 대마를 "많이 먹으면 사람이 귀신으로 보여 달아난다"고 했고, <명의별록>은 "인삼에 섞어 먹으면 앞일을 미리 안다"라고 했다. 마취에 대한 설명은 없고 향정신성 약물이라고 규정한다. <중약대사전>에서 기록한 만다라는 좀 더 구체적이다.

"독이 있는데 종자의 독성이 특히 강하다. 가지과의 식물로 흰독말풀 종류다. 세 알만 씹어도 중독될 수 있으며 맥박이 빨라지고 동공이 확대된다. 다량으로 먹으면 혈압이 내려가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평생 암살의 공포에 떨었던 조조는 '머리를 쪼갠다'는 말을 듣고는 화타를 옥에 가둔 후 죽였다. 화타의 외과적 치료는 인도 의학의 전래로 추정되지만 후세로 전수되지 못했고 이후 한의학에서 외과학은 사라졌다.

종기가 흔했던 우리나라의 외과학은 피고름을 빼내는 종기 치료를 가리킨다.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이상로(李尙老)다. 아버지가 묘청과 잘 알고 지낸다는 이유로 권력에서 소외돼 방랑했지만 승려에게서 의학을 전수받고 의사가 됐다고 한다. 종기를 잘 치료해 권세가를 여럿 치료했는데 의종(毅宗)의 발에 난 종기도 치료했다고 전해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 전문서는 <치종비방>으로, 조선 명종 때 활약한 임언국(任彦國)이 쓴 책이다. <치종지남>이라는 책도 있는데 임언국과 그의 유파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드라마에선 백광현의 외과술이 임언국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치종지남>은 9장밖에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3종으로 분류돼 있던 종기를 5가지로 새로 분류한 점, 직접 개발한 고약 '토란고'로 종기를 치료한 점, '천금루노탕'이라는 처방을 재구성해 사용한 점 등이다. 특히 X자형 절개술은 침을 찔러 피고름을 터뜨리는 기존의 종기 치료 침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농침'은 침이라는 명칭은 붙었지만 피부를 절개하기 위한 칼 모양으로 생겼으며 '곡침'은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무엇을 긁어내는 도구 형태를 띠고 있다.

임언국은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다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낫지 않자 영은사의 노스님에게 침술을 전수받아 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은사는 임언국의 고향 정읍에 있는 내장산 내장사의 옛 이름이다. 당대의 학자이며 관리인 어숙권은 임언국의 치료 모습을 보고 그 외과술의 뿌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임언국은 종기를 치료하고 난 뒤 반드시 앵무새 고기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종기 구멍에 발랐다. 그 이유를 묻자 한 동네에 살던 마의가 말의 종기를 치료한 뒤 늘 앵무새 고기를 태워 재를 발랐는데 효과가 좋아 자신이 사람에게 발라보니 역시 효과가 좋았다고 했다. 그 후에는 족제비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종기 구멍에 발라주며 치료했다고 한다."

ⓒMBC

백광현은 임언국의 후예?

드라마 <마의>에선 백광현의 스승 고주만이 치종청을 만들고 이후 사암도인과 함께 이를 발전시킨다고 나오지만, 고주만은 실제 인물이 아니고 사암도인은 사암 침법만 전해올 뿐 생몰연대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치종청은 조정이 종기를 전문적으로 치료해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설치한 종기 전문 의료 센터로 성종 때 만들어진 뒤 폐지와 복원을 반복했다. 조선 후기 학자 김려가 쓴 야담(野談) 총서 <한고관외사(翰皐觀外史)>는 "임언국이 종기를 잘 치료하는 것으로 유명해 영남에 있는 이이(李耳)라는 선비와 더불어 종기 치료 학교를 처음 설립했다"고 밝히고 있다. 임언국의 의료사적 위치를 짐작게 한다.

선조 때 활약한 조선 최고의 침의 허임도 임언국의 영향으로 '치종 교수'라는 공식 직함을 갖게 된다. 종기의 원인을 심경락에 두고 기죽마혈(騎竹馬穴)에 뜸을 뜬 점, 두꺼비 독과 태운 재를 종기 치료에 이용한 점 등은 임언국의 경험을 수용했거나 전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드라마는 백광현이 이런 치료법을 쓴 것으로 묘사했지만 사실 그 시초는 임언국이라 볼 수 있다. 임언국의 이런 외과적 치료 방식의 뿌리가 마의로부터 비롯됐고, 백광현이 마의 출신인 점에서 차용된 드라마적 상상력일 뿐이다.

임언국의 외과적 종기 치료술은 관념적, 유교적 치료 방식의 벽에 가로막힌 한의학에 새로운 길을 여는 전기를 마련했지만, 그 벽은 너무 높았고 한의학은 거대한 유학의 벽 앞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따라서 <마의>나 '백광현'은 드라마처럼 현대 양방에서 이뤄지는 본격적 외과술을 몇 백 년 앞서 개발한, 전설적 능력을 지닌 과장된 존재가 아니라 한방 외과술의 막을 올린 임언국의 후예쯤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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