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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니체 철학으로 '힐링'하는 방법은?

[철학자의 서재] 김정현의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

정치적으로 시끄러운 일들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종류로 뻥뻥 터지는 오늘, 그래도 최근 대한민국에서 히트 상품으로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는 것은 단연코 '힐링(healing)'일 것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힐링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을까? 한 이삼년 정도 된 듯 보인다. 그 전엔 무엇으로 살았나 생각해보니, 아! 웰빙(well-being)이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웰빙이 낯설다니!

웰빙, 잘사는 것도 매우 매력적인 말이다. 비록 명품가방은 못 들어도 짝퉁 가방 정도야 들고 다니며 잘 사는 폼을 잡을 수도 있고, 맛난 음식 찾아다니며 외식하는 것쯤은 해외여행 갈만큼의 여유가 없어도 문제없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오죽하면 TV는 맛집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으로 넘쳐나고, 비록 돈은 없었어도 건강하게 살았던 어릴 적 동네를 찾아 그때 먹던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겠는가. 또 운동 역시 잘 살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현상 중의 하나였다. 닭가슴살이 불티나게 팔리고 동네 피트니스 클럽엔 개인 트레이닝에서부터 단체 트레이닝까지 활성화되던 시기가 그렇게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웰빙 하면 좀 유행에 뒤떨어진 나팔바지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대한 열망이 시들해진 걸까, 아니면 사람들이 뭔가 부족해하고 채웠으면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웰빙이 아니었던 것일까?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몸짱이 되기도 어렵고 없는 형편에 유기농 웰빙 먹거리만 찾는 데에 지친 것 같다. 오히려 웰빙 찾아다니다 몸도 마음도 상처를 받았는지 모른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의 약을 찾을 수 없었던 것처럼 웰빙이라는 이상향을 모두가 갖기에는 개인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한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요즘 그간 배우고 싶었던 일본어를 배운다. 나의 소망은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어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이지만 문화센터에 열심히 등록하는 주부들이 거의 그렇듯이 실제 꿈을 이룬다기보다는 삶의 활력소로 만족해야 할 듯싶다. 일본어 교재 숫자 나오는 장에서부터 그만둘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기초반에서 원어민 선생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데 일본의 서민들이야말로 웰빙에서 객관적으로 너무나 멀어져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원어민 선생님 말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이후 일본 사람들도 먹거리 등에서 조심하고 있기는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고 안 먹고 살수도 없으니 평상시와 별반 다르지 않게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속이야 말로 어찌 표현할까. 이미 2차 대전의 핵폭탄 상흔을 안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비단 일본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터다. 방사능,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변화 등 객관적인 재앙에서부터 비정규직, 저임금, 비싼 등록금, 떨어지는 성적, 멀어지는 친구들, 개선되지 않는 삶의 조건 등으로 이 시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스며있는 병이 깊다. 하지만 뭐 언제는 인간이 병들지 않고 산 적이 있었던가. 문제는 병들기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인데 지금은 고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약이나 수술 등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은 예전보다 많아졌지만 마음에서 시작되는 병에는 약도 없고 몸까지 망가뜨린다. 마음에 드는 병의 대표 격인 우울증은 누구나 조금씩 앓고 있다. 그런데 그 병의 끝은 자신의 신체와 마음 모두를 없애는 것이다. 마음의 감기처럼 찾아오는 우울증은 결국 혼자 고립되기 때문에 오는 병이다. 우울증은 대표적인 현대병이고 개인주의의 팽배에서 오는 가장 처참한 결과이다.

이즈음 사람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다가온 힐링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힐링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몸도 건강해지는 것이다. 웰빙이 몸의 건강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면 힐링은 마음의 건강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웰빙이든 힐링이든 내가 나 자신의 주인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남 따라가려고 애쓰지 않고 자아를 찾아 다독이고 사랑해주는 과정, 그것이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 힐링이다.

▲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김정현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그런데 몸이든 마음이든 철학으로 힐링을 한다? 머리에 쥐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물으며 찾게 하는 것이 있다면 단연코 철학뿐이다. 특히 지금 소개할 철학은 철학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철학 자체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겸하고 있는 니체의 철학이다. 니체는 서양 2000년의 역사를 반성하며 근대 문명으로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철학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김정현의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책세상 펴냄)은 지금까지 니체 철학을 읽어온 여러 가지 방식에 대한 광범위한 소개를 하고, 더불어 니체의 철학을 생명과 치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특히 나의 마음을 끈 부분은 제4부 '진리 비판과 생명 찾기'이다. 왜냐하면 서양 사상의 근간을 형성하는 이성 중심주의에서 탈피하여 몸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4부에 등장하는 '생리학적 관점에서 본 근대 문명의 귀결'은 니체가 현대병으로 진단내린 '허무주의'에 대한 고찰이다. 김정현은 "데카르트나 홉스 사상의 특징을 물리학적 또는 기계론적인 사유라 말할 수 있다면 니체의 사상은 생물학적인 사유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297쪽)라고 정의 내린다. 생물학적인 사유, 그것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과학적 인식의 진리로 인해 발생한 서양 근대 문명의 허무주의병을 치유할 수 있는 힐링의 치료제이다. 데카르트 이래 몸과 마음이 둘로 나뉘어져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니체에게 허무주의란 단지 퇴폐, 퇴락, 병, 절망, 가치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이러한 데카당스를 훨씬 뛰어넘는 중층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김정현은 니체의 허무주의를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한다. 첫째, 허무주의란 문화의 퇴락 증세, 즉 문화의 창조력이 쇠진한 병적 현상을 말한다. 허무주의는 기술문명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내면적 가치를 정립하지 못한 채, 혼돈, 탄식, 불안, 피로, 무력감의 기호를 드러내는 서양 근대 문명의 부정적인 심층사건을 의미한다.(31쪽) 인간의 신체가 병적 상태에 있게 되면 무력감과 피로, 불안감과 허무감 등 생리적, 심리적 증후가 동반되듯이 문화 역시 강건한 건강을 잃게 되면 생리적 이상 반응에 휩싸이게 되며 문명을 병들게 만든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둘째, 허무주의란 서양의 정신세계를 뒷받침해왔던 근본 토대 상실의 역사를 뜻한다. 신, 초월적 세계 등에 의존해, 즉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적 기반 위에서 현실세계를 설명했던 이러한 담론의 토대가 붕괴되는 사건은 '서양 형이상학'의 종말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허무주의란 서양인들의 내면계를 규제해왔던 그리스도교적 초월적 가치 토대의 붕괴, 즉 도덕적 자기 정립 기반의 상실이라는 가치론적인 위기 증상을 의미한다. 넷째, 이는 또한 주체성의 위기 문제, 즉 '인간죽음'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푸코는 '신의 죽음'이란 '인간죽음'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니체는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정초주의에서 벗어나, 즉 인간학의 꿈에서 깨어나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에서 인간 주체에 대한 물음을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32쪽)

그렇다면 니체는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힐링의 치료제를 어떻게 주고 있을까. 제11장 '니체의 건강 철학'은 니체가 철학을 '건강의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철학은 근본적으로 개인적 섭생에 대한 본능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니체에게 철학이란 각 개인이 건강하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자 건강한 자유정신의 획득을 배우는 것이다. 특히 니체가 건강함에 대해 그리고 병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에 적용한 이유 중 하나는, 니체 스스로 잦은 병치레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벼운 감기 정도야 흔히 지나가지만 독감에 걸리거나 심한 편두통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병이란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뼛속 깊이 하기 마련이다. 누구나 평생에 몇 번 혹은 수십, 수백 번씩 죽음에 이르는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경험은 술로 인한 것까지 합치면 월등히 많겠지만. 어쨌든 죽음과 삶의 교차로를 알게 모르게 지나치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 속에서 병을 이겨내는 자는 또 얼마간 힘차게 살아갈 것이고 이겨내지 못한 자는 무기력에 빠진 삶을 살다 가게 마련이다.

니체는 "병 자체는 삶의 자극제가 될 수 있다 : 단지 우리는 이러한 자극을 이겨낼 정도로 충분히 건강해야만 한다"(381쪽)고 한다. 자주 아픈 사람은 그만큼 자주 건강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388쪽) 우리가 부딪히며 살아가는 많은 역경, 병은 내가 건강하면 이겨낼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내가 이태껏 몰랐던 나의 강인함이다. 그러한 강인함은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라는 형태로 잠재되어 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를 서양 근대문명은 타인의 의지 아래 굴복시켰고 자본의 의지 아래 굴복시켰다. 이제 문명과 자본주의 문화에 찌든 몸을 힐링할 수 있는 힘에의 의지를 끄집어내야 한다.

김정현은 "니체의 건강 철학은 그의 몸 철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한다. 병과 건강의 문제는 단순히 육체의 의료적 진단이나 치료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몸의 치료, 즉 건강한 삶의 유지, 자연에 대한 태도, 자기 형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힐링은 건강한 섭생을 통한 자기 유지일 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김정현은 이러한 니체의 관점을 '인간 우주Kosmo Anthropos'로서 자기를 완성한다는 의미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자기완성은 병들고 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도달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물질문명은 우리가 도달하기 어려운 완전함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내 머리는 완전성을 추구하는데 내 몸은 나락의 끝에 있다면 이러한 불균형으로 인해 내 몸과 마음은 병들 수밖에 없다.

이제 나도 니체의 철학으로 힐링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아야겠다. 내 안에 있는 힘에의 의지를 끌어내서 타인에게 전하면서 다시 내 힘이 배가 되는 경험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한 손엔 니체의 책을 또 다른 한 손엔 나를 긍정하며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이 가을에 마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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