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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한민국은 지금도 전쟁 중이다!" 그 상대는…

[기억, 그 힘든 싸움] 역사학자 김기협이 사회학자 김동춘에게 묻다

"나는 빨갱이 아니다. 잠자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밥 해달라고 해서 밥 해준 것밖에 없다." 울부짖음은 총성 속에 묻혔다. 1950년 8월 초, 칠곡 신동고개 근처에는 매일 같이 농민, 더러는 학생 차림을 한 사람까지 포함한 수십 명을 실은 트럭이 두세 번씩 드나들었다. 헌병들은 쌍소리와 욕설을 섞어 가며 굴비처럼 엮인 사람들을 총살했다. 학살은 6일 동안 계속되었고, 마지막 날엔 삽으로 시체를 묻었다. 갈치 구운 냄새 비슷한 시체 썩는 냄새가 한여름 코를 찔렀다. 대부분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5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개, 돼지'처럼 죽었다.

한국전쟁 초기 민병대에 들어갔다가 헌병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고 만 어느 가해자가 2001년에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 앞에서 털어놓았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과 트라우마 때문에 그는 평생 침묵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회했던 끔찍한 현장은 한국전쟁기 무수히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일부 중 일부였다. 그 학살 가운데서도 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은, 전쟁 이후 반공을 외치는 사회 속에서 완전히 어둠에 묻힌 터부였다.

김동춘 교수는 한국전쟁기 좌익 관련 민간인 피학살자들이 역사 속에서 세 번 죽었다고 말한다. "학살 자체가 첫 번째이고, 1960년 당시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하고 그 일에 앞장선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진상규명 요구를 폭력으로 틀어막은 것이 두 번째이며, 그 후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하여 1980년대까지 연좌제로 묶어서 입도 뻥끗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세 번째다." 그는 평생을 고통 속에 침묵해야 했던 이들 편에 서서 한국 정부와 미국의, 사회와 여론의 부인·망각·무지와의 싸움을 벌여 왔다.

▲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사계절 펴냄). ⓒ사계절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사계절 펴냄)는 원래 노동사회학을 연구했던 김동춘 교수가 "한국전쟁기 학살이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와 정치·사회의 일부가 되어 있으며 부드러운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연구자로, 운동가로, 정부 조직의 일원으로('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활동해 온 지난 10여 년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책은 단순한 회고나 고발을 넘어 '기억과의 싸움' 자체와 그 싸움의 핵심 쟁점들을 좇는다. 세상의 무지에 맞서 사람들을 조직하고 국가와 싸워 본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대목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이 책은 2013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왜 한국전쟁기 학살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준다. 그는 한국 정부가 한국전쟁기에 학살을 자행하고도 그것을 은폐해온 과정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와 사회의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국가 폭력의 메커니즘을 다룬 2000년의 <전쟁과 사회>(돌베개 펴냄)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은 전쟁을 체감하지 못하지만, 고문 등 가시적인 국가 폭력이 사라졌다 믿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부드러운 방식'의 학살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이 책의 서문을 읽자마자 시민으로서, 운동가로서, 연구자로서 한 사안에 대해 넓고 깊게 천착해 온 그의 경험과 역사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간 펼쳐진 해방 공간의 매일을 세심히 기록한 '해방 일기' 연재를 막 끝낸 참이었다. (☞'해방일기' 그간의 연재 바로 가기) 그는 여전히 이 시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 방식을 묻고자 했다. '프레시안 books'는 두 학자와 함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그 기억, 국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왼쪽), 김기협 <해방일기>(너머북스 펴냄) 저자(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한(恨)과 정의 사이에서

김기협 : 일단 고생이 많으셨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한국전쟁기의 학살이라는 사안을 놓고 시민으로서, 연구자로서, 운동가로서, 또 몇 년간은 정부 기구의 관리로서 고민하고 실천해 오셨으니까요. 이 중 한 가지 입장에 머물러 있다 해도 괴로움이 많은 일인데, 여러 가지 입장을 겪다보니 그것들이 상충되는 측면도 있었을 거고요. 이 사안을 오랫동안 파고들 수 있었던 동력은 역시 그 기억으로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었겠지요.

김동춘 : 그렇습니다. 그 분들이 먼저 제게 호소를 하고, 절실하게 대변해 주길 바랐습니다. 전 거기에 응답을 하게 된 거지요. 당사자들에 비해서야 제가 한 고생은 많지 않습니다.

김기협 : 한국전쟁기 학살이라는 문제에 대한 관점을 처음으로 뚜렷이 밝힌 게 13년 전 펴낸 <전쟁과 사회>일 텐데요. 그때는 기본적으로 연구자의 관점이었죠. 그렇지만 거기서도 완전히 연구자 위치에만 머무른 건 아니었죠?

▲ <전쟁과 사회>(김동춘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김동춘 :
맞습니다. <전쟁과 사회>도 100퍼센트 아카데믹한 책은 아닙니다. 학술적 입장이 80퍼센트쯤, 나머지 20퍼센트엔 운동적인 관점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기협 : 어쨌든 저는 이 문제에 임하는 선생의 입장부터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운동가로서 '유족 주도인가, 시민사회 주도인가'라는 운동 방향의 문제로 고민하신 대목도 눈에 띄는데요. 유족 개개인의 억울한 입장을 풀어주는 역할,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근본적인 처리 방법이나 전략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살펴서 주장해야 하는 역할 간의 대립이라고 할까요.

김동춘 : 네. 그 두 가지가 충돌하는 측면이 있지요. 바깥에서도 그렇고, 제 내부에도 있고요. 피해자의 대변자로서 말할 때는 당사자들의 감정이나 인권이라는 층위가 강하게 작용한다면, 후자의 경우엔 피해자의 개인적인 억울함을 넘어서는, 사회의 어두운 점을 폭로함으로써 대중의 의식을 바꾸고 반공주의를 허물고 정치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짐을 지게 되는 것이지요. 두 부분은 분명 충돌을 했기에, 필요에 따라서 적절하게 다른 수사를 구사해야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발언할 때와 유족들에게 직접 이야기할 때 사이에 표현의 줄다리기를 벌여야 했지요.

김기협 : <전쟁과 사회>를 쓰게 된 문제의식 중 하나는 '한국 역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정리가 전제되지 않고는 어떤 새로운 사회과학 이론이나 주장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고 썼습니다. 한국전쟁이 그 후의 남북관계나 한미관계, 남북한 정치사회의 모든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산악"임을 확인했던 것이, 노동 문제를 연구했던 선생이 이 문제에 천착하게 된 이유인 셈이지요.

<전쟁과 사회>에서 문제의 초점처럼 제기한 것이 국가주의였죠. 그런데 저는 좀 의문이 듭니다. 과연 그게 지나친 국가주의 때문에 일어난 문제였을까, 그 당시의 국가가 과연 국가다운 국가였는가, 오히려 국가주의의 취약성 때문에 일어난 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의문입니다.

▲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김동춘 :
제가 어디선가 '국가의 과도함은 국가의 부재를 표현한다' 비슷한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일단 거시적으로 보면 근대국가의 수립 과정에서 전쟁 등 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때 국가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 있고 국민들의 동의를 얻고 있었다면 구태여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근대국가로의 이행이 가능할 텐데, 그게 미비했기 때문에 폭력이 전면에 등장했다면, 선생 말대로 국가주의보다는 국가의 부재에서 오는 사설 폭력과 내전 상태였다고 볼 수 있겠죠.

이 문제가 바로 대안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국가다운 국가를 지향하는가, 혹은 국가 시스템 자체를 넘어서야 하는가, 라는 문제이지요. 제 경우 연구자로서는 국가라는 시스템 자체의 문제나 국가주의의 문제를 강조했다면, 운동이나 실천의 면에서는 국가의 '제대로 된' 완성과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국가를 지향하는 입장이 제 안에 착종되어 있습니다. 또 글에서는 국가 자체를 문제 삼는 데 비중이 가 있다면, 제도권에서 활동할 때는 국가다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까웠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가 제대로 책임을 지는 국가가 된다 하더라도, 가시적인 폭력은 사라져도 보이지 않는 다른 형태의 폭력은 지속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소실점

김기협 : 이 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반응·조처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 시점은 연구자로서의 이론적인 지향과 일치할까요, 아니면 보다 현실적인 눈에 가까울까요.

김동춘 :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의 접근 방식은 후자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그런데 책에서도 스치듯 언급했지만 이 문제를 미군 범죄로 봐야 한다며 반미로 접근하는 NL(민족해방) 계열 사람들하고 논쟁이 많았어요. 여전히 '크게 봐서는 미군 범죄의 문제이고 그래서 반미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맞다'라는 시각을 가진 세력이 있고, 일부 유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사람들을 설득해서 입법 투쟁으로 끌고 가는 게 힘들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현실론을 택했습니다. 미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선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그래야 작전 수행 과정에서 한국군의 위치와 한계, 그리고 전쟁에서의 미국 책임 문제도 드러날 수 있겠지요.

김기협 : 그런데 이런 건 어떨까요. 피해자 유족에 대한 배상 주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그렇고, 이전까지의 한미관계를 평가하고 앞으로의 그것을 전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밝히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김동춘 : 필요합니다. 그 점에서 이데올로기로서의 반미주의보다는 당시의 실질적인 책임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로 문제를 좁혀 가야 합니다. 4.3사건 같은 경우 정부 수립 이전인데, 그럼 과연 그때 주권이나 최종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을까요. 나아가 1948년 정부 수립과 미군이 철수하기까지 1년간의 지휘권의 문제도 따져봐야 할 거고요. 1950년 7월 대전협정(당시 임시수도 대전에서 주한미군의 지위 및 재판 관할권에 관해 체결된 한미 간 서한교환형식의 협정-편집자)에서 작전지휘권이 맥아더에게 넘어간 이후 한국군의 작전지휘에 있어서의 미군의 책임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구태여 반미라는 이데올로기로 갈 필요도 없이, 국민의 입장에서 법적으로 문제제기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1950년에 미국도 나중에 발생할지 모르는 책임 문제를 다 대비해 놓기도 했습니다. 물론 법정에서 한국 정부나 피해자들이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자체로 이라크 등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 문제를 세계적 차원에서 부각시키는 계기라고 볼 수 있죠.

김기협 : 그러고 보니 <전쟁과 사회>와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이에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창비 펴냄, 2004)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제목대로 '전쟁과 시장'이란 엔진으로 돌아가는 미국의 국가 성격을 다뤘는데, 바로 그것이 대한민국사의 굴절에 큰 배경이 되기도 했을 테고요. 미국의 특이한 국가 성격은 통상적인 국가론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현상이라고 보십니까?

▲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김동춘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김동춘 :
네. 전 미국이 통상의 국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국인데요. 전통적 제국주의라고 부르기도 적절치 않습니다. (보통의 국가의 외교부에 해당할) '국무성'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는 대로, 전 세계가 미국 안에 있고 전 세계의 문제가 미국 문제인 나라 아닙니까. 폭력보다는 주로 이데올로기의 지배, 특히 문명론적인 측면이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강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다수의 '너희'에게 물질적 행복을 주고 있고, 그게 문명이다, 미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이 명제를 스스로 의심하지 않죠. 저는 확신범이라고 봅니다. 그것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대 세력도 있지만 취약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은 특이한 제국이고 국가론에서 이야기되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주권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미국이 아닌 나라들은 주권국가가 아닌 것이죠.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는,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정 정도의 주권이 미국에 양도되어 있는 상태이니까요. SOFA 내용의 각 나라 별 차이가 있다고 할까요. 그런 특이한 상태이기 때문에 전통적 제국주의론으로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제국을 용인하자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김기협 : 미국 존재에 대해 그렇게 규정한다고 하면, 거기 연계되어서 한국의 국가 성격도 현실적으로 규정되는 측면이 있겠죠.

김동춘 : 그렇죠. 그렇게 보면 한국이 주권을 100퍼센트 확보한 국가라고 하기에 현실적으로 안 맞는 측면이 있지요. 국민의 행복을 위해 국가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옹호하는 게 지배 엘리트들의 역할일 테지만, 거기서도 한국과 미국의 국가 위상이 아예 다르다는 현실의 레이어가 있음을 받아들여야겠지요.

국가는 힘이 세다

▲ 김기협 역사학자·<해방일기> 저자. ⓒ프레시안(최형락)
김기협 :
2000년 <전쟁과 사회>, 올해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를 내기까지 여러 곡절을 겪었던 시기의 정치적 배경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입니다. 공화당에서 새누리당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권력을 운용하는 주류 세력이 있었고, 거기에 반대하거나 한계를 느끼는 사람들이 대안으로 생각했던 세력이 정권을 잡고 10년간 국가 운영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모처럼 권력을 넘겨받고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비판들이 있지요.

그러한 한국 현대사의 고충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당 혹은 세력이 정권을 잡느냐와 관계없이 대한민국의 존재 양식 자체에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김동춘 : 거기에도 근본주의적인 접근과 현실주의적 접근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1948년 이후로 대한민국의 권력은 줄곧 변함이 없었다는 극단적인 반미민족주의의 입장이 있고, 1987년 민주화 이후로 생겨난 정치적 공간이 있는데 이것의 역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운동 진영에서 나타나는 입장의 차이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제가 4년간 제도권에 있으면서 절감했던 게 있다면, 역시 국가와 정권-정당의 기반이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정치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으레 정당 정치를 떠올리지요. 그런데 제가 후배들에게 농담처럼 이야기했던 게 있습니다. "정치, 정당이 하는 거 아니야. 검찰이랑 경찰이 하는 거야." 만약 박정희 정권 때라면 그 자리에 중앙정보부가 들어갔겠지요.

예를 들어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었을 때도 원하는 대로 입법도 못 했고, 그 법이 통과되었다 하더라도 법을 적용할 때 정당을 넘어서는 힘 앞에 멈출 때가 많았습니다. 행정자치부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예산권을 가진 쪽과 물리적 강제 수단을 가진 쪽이고요. 입법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실천 과정에서 계속 부딪치는데, 거기에서 힘을 가진 기구들이 협조 안 하면 그만인 거죠. 그런 기구마다 또 오랜 역사와 나름의 조직 문화가 존재하고요.

진실화해위에서의 4년간은 정당을 넘어서는 국가의 힘을 피부로 느끼고 제도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건 심지어 대통령조차 함부로 못 할 정도의 힘이지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좌초, 심지어 정권이 끝난 뒤에도 자살로 몰리게 할 정도의 비극이 우리 사회의 엄혹한 역관계를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기협 : 현대국가의 형식적인 요건이라고 하면 헌법에 의거해 법을 존중하는 정치일 텐데요. 그런데 요즘 헌정이 유지되고 있는 건가 의심스러운 사태가 수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루신 문제 역시 전부 헌정 파괴라는 혐의를 갖고 있지 않나 싶은데요. 그럴 때 가해자를 국가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국가를 끼고 있는 어떤 집단이나 권력자라고 봐야 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동춘 : 가해자 개개인은 국가 권력의 대행자들일 테고, 그 사람들이 초법적이고 위헌적인 행동을 반복해도 그걸 옹호·정당화하거나 혹은 처벌하지 않고 놔두는 힘이 근본적인 가해 주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법전에 나와 있는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나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존재하는 것일 테고요. 이는 평범하다 생각될 정도로 우리가 매일 매일 확인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전두환 추징금 환수 작업은 왜 그동안 안 하거나 못 했을까, 청문회에서 위증을 해도 왜 처벌을 받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해 보면 알 수 있어요.

법 지배의 원칙은 가해자 개인을 색출해 단죄하고 처벌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현실 속에서는 그 가해자들의 행동을 끊임없이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를 어느 정도 균열 내야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헌법(정신)이란 게 다수의 생각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중의 인식의 지평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겠지요. 그 지형을 약간만이라도 변화시키는 것이 역사의 발전일 테고요.

이 점에서 사회학자인 저는 아무래도 법학자들과는 다른 관점입니다. 법학자들은 법적으로 잘 따지면 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전 사회를 보고 '안 될 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법으로 단죄하자고 해도 그게 다 사회가 움직여주는 만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관여한 문제에 대해서도 애초부터 '이 정도까지라도 가면 아주 잘 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피해자 유족 분들이 들으면 약간 섭섭할 수도 있는 얘기겠지만요.

ⓒ프레시안(최형락)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었는가

김기협 : 지난 3년간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해방일기'를 얼마 전 마무리했습니다만, 그동안 깨우친 사실 중 하나가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하면 1945년 8월 이전에도 국가란 것이 존재하기는 했다는 사실일 텐데요. 이 연재는 45년 8월부터 48년 8월까지의 미군정 시기를 다루는데, 그 3년을 세밀히 뜯어보니까 당시 사람들에게 식민지 시절이 그리웠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적어도 남조선에 있는 사람들은 말이지요. 민생의 조건부터 시작해서 폭력과 보복의 연속 등 많은 면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고요.

▲ <해방일기>(1권, 김기협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그게 제국주의 국가의 총독지배였기에 문제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현실 차원에서는 (미군정기보다) 오히려 국가답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48년 정부 수립 이후는 아직 세밀히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이때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즉 분단이라는 명목상의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제외하고서라도 이때의 국가도 우리 민족의 국가라고 이야기할 만한 실질적인 조건을 얼마나 갖추고 있었을까 회의적으로 봅니다.

제 작업은 48년 8월에서 끝났기에 이런 것까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선생은 그 이후의 일들을 많이 살펴보셨지요. 제가 식민지 시대와 미군정 시대의 상태를 국가로서의 실질적 의미로 비교하는 관점에 비추어, 미군정 이후의 상황은 어땠다고 보십니까.

김동춘 : 말씀하신 대로 일제 강점기가 물론 고통스러운 세월이긴 했으나, 해방 이후에 펼쳐진 것과 같은 엄청난 폭력과 빈곤의 만연은 비교적 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상태가 계속될 수는 없는 체제였지요. 탈피는 불가피했다고 봅니다.

만일 미·소 양 강대국이 분할 점령을 하지 않았더라고 해도 정치 폭력을 비롯한 광범위한 진통이 발생했을 겁니다. 탈식민지 공간의 폭력은 어느 나라에서나 존재했으니까요. 그 진통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국주의는 늘 떠날 때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떠나 다시 개입할 명분을 만듭니다.

어쨌든 크게 본다면 양 강대국의 개입이 가장 결정적인 변수였음에는 틀림이 없고, 이 변수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45년 말~46년 초에 송진우나 장덕수 같은 분들이 암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한민당도 친일 혹은 지주세력을 중심으로 재편되기보다는 건강한 민족주의 세력, 우익 중에서도 반 이승만 우익 세력들의 설 자리가 있는 정당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48년까지의 미군정이라는 압도적 변수가 남한 내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뒤집었고, 그 과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좌익들의 공세와 극도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우익들의 공격성이 결합해서 걷잡을 수 없는 정치 폭력에 다다랐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쪽에서 김일성이 내려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한 내에서 준 내전 정도의 정치 폭력이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방 이전의 한반도 상황과 해방 이후 분단을 겪을 것을 가정하고 '어느 국가가 더 나았느냐'라고 물을 수야 없겠지만, 민(民)의 관점에서 본다면 해방 이후의 공간이 일제 강점기보다 혹독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자료를 토대로 통계를 내 보면 1948년부터 53년까지의 기간에 일제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고문, 학살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김기협 : 1950~53년은 전쟁 중이라 비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는데, 48년부터 50년까지도 그랬습니까?

김동춘 : 1948, 49년 그리고 50년 전쟁 이전까지 전국의 모든 경찰서에서 고문이 이뤄진 정도였습니다. 아주 작은 파출소에도 고문 도구가 있었거든요. 게다가 1948년 말에 국가보안법이 공포되고 1년 만에 10만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모두 크고 작은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그 규모나 양, 강도를 봤을 때 일제 강점기 때보다 심했을 거라고 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현실을 느끼면 역사가 보인다

김기협 : 책에도 묻어나지만 아쉬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게 또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김동춘 : 제 본연의 연구자로서의 입장을 앞세운다면, 저는 전부터 한국전쟁의 진실 가운데 보통 한국인들이 경험했던 진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거기엔 피학살자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월북자, 실종자, 혹은 군에 징집되었던 보통 한국인 남성들이 있지요. 군사적·외교적·정사적 진실에 비해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총 2만 5000여 명이 징집되었으리라 추산되고 그 중 상당수가 실종, 사망했는데 이를 국가가 전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나오지만 길거리에서 그냥 잡아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또한 당시 국제법상 17세 미만은 징집 불가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요. 더 비참한 것은 전장에 나갔다가 거의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 온 청년들이 있었는데, 징집 기록이 없어서 두 번 입대한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화해위에 있을 때 꽤 많은 숫자가 접수되었어요. 군대 두 번 가는 거, 한국 남자들에게 제일 큰 지옥이지요.(웃음)

돈 많은 이들은 징집에서 빠지고 돈 없는 이들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고…. 이런 보통 한국 남자들의 경험이 한국전쟁의 진정한 진실일 텐데, 그것이 충분히 밝혀져야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알려줄 수 있을 텐데,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연구자 입장에선 굉장히 괴로운 일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일방적 정보만 전달받고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거의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에 가 있습니다. 저 용산의 끔찍한 전쟁기념관에 박제된 채로요. 정부 기구에 들어가서 일하면서도 우리가 수집한 기록, 사료들을 평화 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었어요.

김기협 : <전쟁과 사회>의 중요한 테마가 이 전쟁이 우리들에게 내면화되어서 계속되고 있다는 건데요. 그런데 80년대까지 그건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 뒤로는 약화된 셈이고요. 그런데 이 추세를 낙관적으로 보십니까? 전쟁 국가로서의 성격을 벗어나는 길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건가요.

김동춘 : 기억은 정치라고 봅니다. 어떤 건 과도하게 기록하려 하고 어떤 건 완전히 망각하는 게 곧 정치이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도 전쟁은 아니지만 다른 형태의 국가 폭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건 단지 용역 폭력에 대한 경찰의 묵인처럼 물리적 차원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합리적인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 정당 간 경쟁이라든지, 내부 고발자들에 대한 가차 없는 보복, 위험하다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한 사찰까지, 지금은 말하자면 목숨이 아니라 일자리를 끊는 방식으로 폭력이 계속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과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전히 동일한 종류의 국가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국가 기관이 일개 시민한테 명예훼손 소송을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지요. 국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일반인이 쟁송에 휘말린다는 것은 돈과 시간, 정신적인 파괴를 의미합니다. 과거는 물리력이었다면, 지금은 법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내부의 반대자들을 완전히 파탄시키고,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교육적인 효과까지 거두고 있습니다.

김기협 : 우리가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생각이 대대적으로 드러난 것은 연평해전과 천안함 사건에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굉장히 놀란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시라는 마인드에 대해 면밀하게 살펴온 선생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주변 사람들보다 그런 일들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나요.

김동춘 : 저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굉장히 취약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심하게 말해 하루아침에 깨질 수 있는 유리잔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회의적인 글을 많이 썼습니다. '민주화 된 한국'은 기업 사회라고, 거기서 관철되는 방식은 과거의 전체주의적인 방식 거의 그대로라고요. 한국의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정치적 반대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고문당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까지는 진전했지만, 사회적으로 폐기될 수 있는 위협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에서 적시한 대로 청산되지 않은 한국전쟁과 얽혀 있고요.

그런데 이 원인을 분단 문제로만 환원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권력과 계급 차원의 문제가 저간에 깔려 있습니다. 어떤 권력이든지 자신들에게 정치적 위협이 된다면 법과 폭력을 사용해 누군가를 억압할 수 있는 준비하고 있으며, 민주적인 시민들이 제재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쪽의 견제하는 힘이 약해지는 순간, 폭력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아르헨티나의 과거 군부정권 아래에서 '더러운 일'을 했던 군인들은 지금 월마트에 고용되어 노조 파괴 작업에 종사하고 있다. 월마트의 노동자 감시 체제는 과거 군부 정권이 유지하던 국가적 감시 체제의 연장이다. 그 작업에 과거 학살과 고문의 가해자들이 일하고 있다는 것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청와대 주도의 민간인 불법 사찰, 용산 참사, 쌍용차 문제 등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을 목격했는데, 나는 이것이 한국 정치의 저류에 흐르던 국가폭력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보았다." (6~7쪽)

김기협 : 문제들은 역으로 기억이 흐려짐으로써 극복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과 관련해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는데, 90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통일 시대의 역사학에 관한 학술대회 토론 중에 어느 교수가 독일 사례를 언급하면서 '독일 통일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조건 중 하나는 민족사 교육의 부재였다'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서독에서는 서독 식의 독일사, 동독에서는 동독 식의 독일사를 가르쳤다면 통일이 오히려 더 어렵지 않았을까, 이런 취지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쨌든 앞으로 전쟁에 대한 기억, 혹은 기억과의 전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특히 한국전쟁에 대한 감각이 더욱 희미해지는 시대에 젊은이들에 대한 바람과 당부를 듣고 싶습니다.

김동춘 : 역사 교육이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중요하지요. 그러나 제가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그때부터 역사가 다시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민족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노력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문제들을 얼마나 자기 피부로 느끼고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야만 역사와 현실 사이를 오갈 수 있고요.

2000년 무렵 참여연대에서 활동할 때, 롯데호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 적이 있었어요. 호텔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이 처음으로 노조를 만들어 보고 처음으로 파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파업 중 어느 날 경찰이 와서 "손 뒤로 하고 엎드려"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가씨들이 '광주(5.18 민주화운동)는 옛날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제 뭐였는지 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이 자기 피부로 와 닿았을 때,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지 않고 있음을, 현재 속에 과거가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죠. 한국전쟁의 문제들 역시,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도 알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공부는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자기가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느냐, 과거에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기협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직장을 빼앗는 것이 덜 가혹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과거엔 거친 수단밖에 없었다면, 지금은 훨씬 더 정교한 방법으로 탄압과 억압이 이뤄지고 있기도 하고요. 바로 목숨을 끊는 게 아니라 숨을 못 쉬도록 하여 서서히 목을 죄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김동춘 : 네.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로부터 전쟁을 추체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선생의 부친이신 김성칠 선생님의 일기(<역사 앞에서>(김성칠 지음, 정병준 해제, 창비 펴냄))를 읽고 너무나도 강렬한 리얼리티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끊임없이 전선이 바뀜에 따라 하루는 대한민국이, 하루는 인민공화국이 되는 혼란 속에서 이 비극을 어느 쪽에서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 절실하게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그건 제가 운동 세대로서 답을 요구받은 질문들과 비슷했기 때문에 훨씬 더 가깝게 육박해 왔습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라고 그 고리가 없을까요. 있죠. 회사에 노조가 있다고 칩시다. 거기 들어가면 힘들지만,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있는 거지요.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자기 문제를 고민하면서 역사를 보면 정말로 역사가 보일 겁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하잖아요. 문제는 반복입니다. 역사를 모른다고 질책하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절실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과거를 함께 고민하면 훨씬 더 정확한 이해해 이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기협 : 긴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의 다음 작업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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