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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루이비통 가방마저도 우주의 풍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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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가짜 루이비통 가방마저도 우주의 풍요라니~

[프레시안 books] 마커스 분의 <복제예찬>

먼저 이 책이 무엇에 관한 것이 아닌지 말해야겠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복제 방식 또는 복제 기술에 관한 책이 아니다. <복제예찬>(노승영 옮김, 홍시 펴냄)의 저자 마커스 분은 복제의 개념을 미메시스 또는 모방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가능한 넓게 확장하고, 가능한 다양한 복제의 사례들을 검토한다. 하지만 엄밀히 이 책은 복제에 대한 책도 아니다. 오히려, 복제는 문자 그대로 이 책의 '화두'다.

마커스 분은 불교도 또는 불교 수련자로서 복제라는 사태를 성찰하고 그로부터 좀 더 보편적인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같은 불교도만을 위한 책이냐고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복제에 대한 불교 철학적 접근이 관련 제도를 개선하고 다른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데 – 또는 적어도 세계와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 –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약속하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스스로 복제하는 세계

▲ <복제예찬>(마커스 분 지음, 노승영 옮김, 홍시 펴냄). ⓒ홍시
현대를 살아가는 불교도이자 철학자로서, 저자는 기존과 다른 세계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단, 그는 플라톤적 세계관과 그것을 현실화하는 각종 제도 및 관습에 문제를 제기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본질 개념은 철학적 차원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제1의 대상이다. 플라톤 철학은 추상적 본질을 '원본'으로 상정하고 현상계는 그에 대한 저열한 복제로 비하하는데, 이것이 세계 전체와 복제 일반에 대한 이해를 크게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 철학에 대한 비판적 주석은 서양 철학사 내에도 넘쳐나는데, 왜 불교 철학까지 가야 하는가? 그것은 플라톤 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차이의 철학을 문제 삼기 위해서다. 저자는 차이의 철학이 본질과 동일성의 관념에 비판적으로 접근한 것은 옳지만, 동일성의 관념을 아예 폐기하면서 차이를 새로운 우상으로 만들거나, 또는 차이화의 흐름 속에서 비(非)종교적이고 비(非)세속적인 허무주의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으로 불교 철학을 제시한다.

저자의 관점에서, 불교 철학을 택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철학 자체의 개념을 갱신하는 것을 뜻한다. 저자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물화된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말하자면 삶과 그것을 견인하는 믿음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철학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복제라는 강력한 원리에 의해 – 세상만물이 능동적으로 즐겁게 그 원리를 실현시킴으로써 – 돌아가는 세계의 모델을 제안한다.

여기서 복제란 물화된 대상을 생산하는 것이기 이전에 접속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본질을 가능한 정확하게 또는 부득이 저열하게 베끼는 것이 아니라, 닮음이라는 "주술적"(또는 그저 '수행적') 관계를 매개로 차이와 같음을 생성하는 것이며, 원본 또는 본질이 없기에 출발점도 목표점도 없이 그저 무한히 계속되면서 세계를 – 풍요를! – 생산하는 유희로 나타난다.

픙요는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가 복제를 이중적인 관계의 생산으로 논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언뜻 게오르그 짐멜의 유명한 "다리와 문" 테제가 떠오른다. 짐멜은 다리와 문이 서로 다른 두 영역을 분리하는 동시에 연결하는 기묘한 관계를 만든다고 말한다. 문은 인간이 뜻대로 설정하고 뜻대로 여닫을 수 있는 경계다. 그것은 스스로 자연과 분리됨으로써 '인간'이 되는, 끊임없이 "연결된 것을 분리하고 분리된 것을 연결"하면서 자연과 구별되는 질서를 세우는 인간의 고유한 역동성 또는 숙명을 나타낸다.

게오르그 짐멜과 마커스 분은 모두 분리와 접속 또는 차이와 같음이라는 양가적인 관계의 생산에 주목하지만, 그 생산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 짐멜의 관점에서, 그것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소외 또는 해방되어 저 자신의 세계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결될 수 없고 정답이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유로운 활동이다. 반면 분의 관점에서, 그것은 인간 사회를 포함하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작용이다. 그것은 우주가 스스로 저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보편적 활동이며, 인간은 그에 동조하며 자유를 얻는다.

실제로 <복제예찬>은 풍요롭게 저 자신을 생산하는 다산적 우주에 대한 예찬이다. 역으로, 이 책은 인간이 그런 우주적 흐름에 동조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분리하고 틀 짓고 질서를 부과하는 것을 비판하거나 적어도 매우 헛되게 본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서, 인간이 자기 복제에 기반한 자연의 풍요를 흉내 내어 만든 매우 인위적인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 즉 고도 기술화된 시장 경제 체제의 위치는 다소 기묘한 것이 된다.

저자는 생물학적 생식에서 가짜 루이비통에 이르기까지, 힙합 음악에서 순수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넘나들면서,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복제의 능동적 운동에 주목하고, 그것이 드러내는 본질 없는 자가 생산적 세계의 풍요로운 다양성에 감동한다. 알고 보니 우리의 우주 자체가 바로 영구 동력 기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장 경제 체제는 이 우주의 일부로서, 그 자체가 우주의 경이로운 복제인 동시에 말하자면 '타락한' 복제다. 그것은 우주의 흐름에 따라 복제를 통해 놀라운 풍요를 생산하지만, 어째서인지 풍요의 생산과 파급을 억지로 규제하고 심지어 억압한다.

▲ 아르카디 &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SF 소설 <노변의 피크닉>.
어째서일까. 풍요의 생산과 파급을 규제하는 것이 풍요를 생산하는 이 인위적인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모두에게 행복을, 공짜로, 원하는 만큼" 공급하는 그런 풍요의 체제를 세울 방도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자가 풍요에 대한 원초적 소망의 표현으로 인용하는 이 구절은 <노변의 피크닉>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말이다. <노변의 피크닉>은 구 소련의 소설가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1972년 발표한 SF 소설로, 외계인의 알 수 없는 '방문' 이후 혼란에 빠진 세계를 다룬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구인 소년은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준다고 알려진 외계인의 황금 공에 대고 저 말을 외친다. "모두에게 행복을, 공짜로, 원하는 만큼." 그 직후, 소년은 외계인의 알 수 없는 장치에 의해 온 몸이 산산이 으깨진다. 그 모든 위험을 알면서도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일종의 산 제물로 소년을 데려 왔던 지구인 남자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결국 황금 공에 대고 소년의 소원을 되풀이해 말한다. 소설은 거기서 끝난다.

두 가지 자유

아마도 최근 200년을 통틀어 다른 체제에 대한 상상이 가장 위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 시점에서, 마커스 분이 <복제예찬>에서 보여주는 순정한 낙관주의는 기이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측면에서 나는 저자를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보았다. 그리고 그 노력의 일부를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저자는 전 세계의 온갖 영역에서 수집한 풍부한 사례들을 들면서 슬픔과 기쁨, 경이와 감동의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데, 딱 한 군데 본인의 대학 수업에 관한 대목에서 "불쾌감"과 "화"를 드러낸다. 학계에서의 복제, 즉 표절 문제 때문이다. 복제는 "사랑," "지식을 공유하려는 욕망," "지식에 대한 욕망," "생산과 형상의 마법에 대한 매혹"에서 비롯되는 우주적인 작용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고작 돈을 벌거나 학위를 따거나 교수 자리를 얻으려고,"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복제를 한다. 저자는 이 비천함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화가 난다.

불교 수련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최대한 이해하자면, 모든 문제는 이들이 깨달음과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기서 어떤 불교적인 계몽의 필요가 생겨난다. 폭력적인 전유에 기반한 사적 소유의 헛됨을 깨닫고,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춤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가 되면 세상은 극락이 될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인간이 바뀌지 않으면 답이 없다. 과격한 결론이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을 생산하는 것은 모든 계몽의 기획이 지향하는 바다. 지난 체제의 생산물인 우리는 (다른 체제 이전에) 다른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종교적 섭리 속에서 자유를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막막한 인간의 자유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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