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현대인은 충분히 지쳐있다. 예전보다 할 일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충분히 피곤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아이들이 의대를 가기 위해서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수능공부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러한 선행학습의 열풍에 맞추어, 의대 입시 전문 학원에서는 초등학생에게 고등학교 수학이나 자연과학 심지어 의대 예과과목까지도 가르친다니 참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은 의사가 가져야 할 환자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을 배우기에 앞서, 현란한 지식과 능숙한 기술을 익히기에 바쁘다. 그것은 일종의 기능인을 생산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의사는 이제 더 이상 환자를 치료하고 인류에 봉사하는 직업이 아니라, 돈과 명예를 단번에 얻을 수 있는 철저한 기능인이 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사교육 열풍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날마다 고군분투한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아이들은 선행학습을 받고, 대학생들은 취업을 위해서 어학 공부와 자격증 따기에 여념이 없다. 직장인들은 결혼과 집 문제에 시달리고, 직장에서 퇴직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또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 평생을 시달린 노후에 남는 것이라고는 빈곤과 외로움뿐이다. 이것이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원했던 모습인가? 오히려 우리는 사회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가꾸고 치장했던 것은 아닌가?
우리 사회는 오직 한 인간을 어떻게 하면 사회발전에 적절한 인간형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꿈은 자기실현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이미지의 실현이 되어버렸다. 이제 세상에 '나'는 없고, '세상을 위한 나'만이 존재한다. 이른바 '스펙 쌓기'는 우리가 사회에 얼마나 적합한 인간형으로 살아남느냐를 보여주는 치열한 경쟁의 증거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두 종류의 인간형이 있다. 하나는 사회가 원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기계형 인간이다. 사회는 그들에게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기능과 요건을 충실히 익힐 것을 요구하고, 조그만 실수나 잠깐의 휴식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폐품형 인간이 있다. 이들은 사회의 수치와 패배의 전형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이 쓸모없는 인간들은 세상에서 버려졌다는 분노와 슬픔을 간직한 채 유령처럼 사회를 부유한다.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현대인은 좀 더 유능한 기계가 되느냐, 아니면 사회적 낙오자가 되느냐의 갈림길에서 늘 아슬아슬한 인생의 줄타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한번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이 경쟁의 줄타기를 잠시 멈추고 쉬고 싶지 않은가? 아니 아예 이 줄타기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고 있지 않은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맥머피
작가 켄 키지(Ken Kesey)는 정신병원에서 보조원으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1962년에 이 소설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정신병원의 관리체제에 대한 고발을 통해서 당시 미국 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1960년대 미국의 상황은 경제적으로는 물질만능주의와 경제 발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정치적으로는 인종차별이나 여러 사회 문제를 엄격한 보수주의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러한 강압적이고 지배적인 사회체제에 저항하여 인간의 자유와 자연주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책은 당시 미국의 일그러지고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에 주인공 맥머피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다. 그는 정신병원이 힘든 교도소 생활보다 훨씬 자유롭고 편할 것만 같아서 일부러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까지 정신병원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는 감옥보다도 더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신병원의 환경에 대해 경악한다. 거기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병원에 있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그 곳을 떠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명 '빗자루 추장' 브롬든을 만나게 된다. 브롬든은 늘 빗자루를 들고 병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주변 상황을 용의주도하게 살핀다. 이 영리하고 예리한 관찰자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척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철저하게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키고 자신 안에 잔뜩 웅크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비겁하고 겁쟁이 같은 그의 행동은 그가 콤바인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병원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내올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맥머피와 브롬든은 아주 대조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맥머피는 사회에서 상습적인 구타와 싸움, 도박 등의 문제들을 일으켰던 범죄자일 뿐만 아니라, 다분히 선동가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사회 체계 내에서 순종적이고 얌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화가 필요하다. 반면, 브롬든은 정책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교화시킬 필요성도 없다. 그는 철저하게 미국 사회 바깥으로 내몰려서 일정 구역 안에서 보호와 감시를 받아야 하는 일종의 폐품형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너무나도 다른 맥머피와 브롬든의 첫 만남은 강렬하고도 인상적이었다. 우선 맥머피는 브롬든이 세상에 무관심하고 늘 방관자인 척 행동하지만 사실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 누구보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고, 늘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면 브롬든은 맥머피를 통해서 자신이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의 냄새를 기억해냈다.
"그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그가 왜 웃는지 아무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 마음에서 우러나는 웃음소리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문득 나는 그것이 수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웃음소리라는 걸 깨닫는다." (27쪽)
맥머피는 아직 사람 냄새를 간직한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브롬든은 맥머피의 웃음 속에서 이미 자신에게는 사라져버렸지만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있던, 언젠가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사람 냄새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 냄새는 브롬든이 탁 트인 들판의 먼지와 흙에서 그리고 땀과 노동에서 맡았던 것이기도 하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마치 봉인이 풀리듯이, 브롬든의 잔뜩 웅크린 육체와 정신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맥머피의 웃음은 그렇게 브롬든의 기억 속에 있던 인간에 대한 향수를 불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기계가 되어라. 더욱 더 효율적인 기계가 되어라.
브롬든이 정신병원에서 가장 오래된 환자라면, 랫치드 수간호사는 그보다 더 오래 정신병원에 있었다. 그녀는 늘 억압적인 시선으로 환자를 바라보면서 병원이 정한 규칙을 엄격히 지키기를 강요한다.
"수간호사는 병동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정밀한 기계처럼 운영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 그녀는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즉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위 환경에 맞게 조정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52쪽)
예리한 브롬든의 눈에 수간호사만큼 콤바인의 체계와 닮은 유형은 없다. 바깥세상이 콤바인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의해 정확하고 능률적으로 돌아간다면, 정신병원은 수간호사가 정한 규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콤바인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이라면, 수간호사는 이 거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우리를 관리 감독하는 충실한 일꾼이다. 그녀의 관리 하에 정신병원에는 만성 환자와 급성 환자가 있다. 만성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른바 콤바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사람들로서 오직 사회와 격리시키기 위해 병원에 있는 것이다. 반면 급성 환자들은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서 적절한 치료만 받으면 언제든지 콤바인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수간호사의 목적은 바로 이 급성 환자들을 사회의 목적에 부합하게 교정시켜서 콤바인의 적합한 인간형으로 즉,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기계로 개조하는 것이다. 콤바인을 위해 충실히 봉사하는 로봇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이른바 병원에서 말하는 치료의 '성공 사례'이다. 여기서 브롬든의 자조적인 독백을 들어보자.
"그렇다. 나는 알고 있다. 병동은 콤바인을 위한 공장이다. 도시, 학교, 교회 등에서 저지른 잘못을 고치는 공장이 바로 이곳 정신병원이다. 여기서 고친 제품은 신제품이나 다름없다. 아니, 가끔씩은 신제품보다 더 훌륭하게 고쳐져서 사회로 돌아간다. 그럴 때마다 수간호사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72쪽)
결국, 만성 환자나 급성 환자는 모두 내부적 결함을 가진 고장난 기계들이다. 다만 그들은 콤바인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인간은 마치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와도 같다. 그리고 사회는 그 기계가 고장이 나거나 혹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노화되었을 때, 미련 없이 우리를 세상 바깥으로 버릴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 기계가 되라고, 그것도 더욱 더 효율적인 기계로 거듭나라고 촉구한다. 멈추면 죽는다. 이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잠시 나를 바라보노라면, 겁에 잔뜩 질려 웅크리고 있는 브롬든의 얼굴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브롬든을 철저하게 자신 안으로 가두게 만들었던 거대한 콤바인의 힘이 우리를 제2의 브롬든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유를 꿈꾸는 자, 그대만이 탈출할 수 있다.
모든 일은 아주 우연하고 단순한 데서 시작되었다. 자유분방한 맥머피에게 억압적인 병원 환경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병원의 불합리한 규칙을 비판하면서 수간호사에 맞서기 시작한다. 예컨대, 그는 그룹 회의 모습을 이른바 '닭들이 서로 쪼아 대는 파티'에 비유하면서 수간호사를 비아냥거리거나, 프로야구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 환자들을 선동하는가 하면 병원 유리창을 깨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환자들은 맥머피의 이러한 행동들을 보고는 그야말로 병원의 실질적인 권력자에 맞서 싸우는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애초에 그가 의도했던 일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병원에서 자신이 좀 더 편안하게 지내기를 원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롬든 역시 맥머피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는 그가 콤바인으로부터 자신을 탈출시켜줄 유일한 구원자라고 생각했고, 이어서 브롬든에게 많은 변화들이 생겨났다. 우선, 맥머피의 반항적인 행동은 브롬든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해 말을 걸게 만들었다. 브롬든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참을 수 없는 어떤 힘을 느끼게 되고, 적극적으로 병원의 부조리함을 향해 싸우기 시작한다. 맥머피가 단순히 편하게 지내보자고 시작했던 행동들이 브롬든에게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저항의 힘을 가져다 준 셈이다. 이제까지 브롬든에게 콤바인은 너무나 무섭고 거대한 힘이어서 그의 귀와 입조차 닫아버리게 하고 2미터가 넘는 그를 충분히 작게 만들만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어쩌면 콤바인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콤바인'도 전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이런 일을 다시 못하게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막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482쪽)
이제 브롬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수간호사도 아니고 콤바인도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그는 더 이상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그렇게 그는 절대 권력의 횡포에 의해 움츠러들고 두려움에 떨던 아주 나약한 인간에서 자유와 새로운 삶을 꿈꾸는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났다.
저항의 힘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불씨를 전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맥머피와 수간호사의 갈등의 끝은 처절했다. 맥머피가 병원에서 크고 작은 싸움에 휘말리자, 수간호사는 그에게 여러 차례 전기 충격 요법을 시행했고, 급기야 뇌 전두엽 절제술이 그에게 가해졌다.
"병동 문이 열리면서 흑인 보조원들이 이동 침대를 밀고 들어왔다. 침대 가장자리에 차트가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 검정색의 굵은 글씨로 '맥머피, 랜들 P. 수술 완료'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잉크로 '뇌 전두엽 절제술'이라고 쓰여 있었다." (508~509쪽)
한동안 보이지 않던 맥머피가 정신병동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에게서는 더 이상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수간호사는 세상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던 맥머피를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만성 환자 다시 말하자면 완벽하게 폐품형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보자면 맥머피와 수간호사의 대결은 수간호사의 승리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정작 맥머피의 육체에서 정신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의 정신은 정신병원 곳곳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죽은 인간들에게 생명력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놀라운 마술이었다. 누구보다도 이러한 마술의 효과는 브롬든에게 강력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브롬든은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교묘하게 감추었던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정신병원을 탈출하고자 한다. 물론 바깥세상은 브롬든의 생각대로 무시무시한 콤바인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겐 이제 콤바인에서 이루어지는 불의와 착취에 적극적으로 맞설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맥머피는 가장 나약하고 소극적인 브롬든을 콤바인을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인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찾아서
브롬든이 보기에 맥머피의 모습은 육체적으로 심장만 뛰고 있을 뿐,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브롬든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이 모습은 맥머피가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맥머피의 육체에 남은 생명력을 거두어들여야겠다고 결심하고는 베개를 집어 들어 맥머피의 얼굴에 가져다댄다. 여기서 브롬든의 행동에 대한 윤리적인 관점은 잠시 접어두자. 오히려 브롬든의 극단적인 행동은 인간에 대한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폐품을 처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계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해라.' 그것이야말로 맥머피가 브롬든에게 가르쳐준 교훈이 아니었던가!
맥머피는 아주 쓸모없는 기계가 되었지만, 그 희생은 역설적으로 많은 쓸모없는 기계를 하나의 생명력 있는 인간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렇게 브롬든은 세상을 향해 뛰쳐나와 자유를 외쳤다. 이처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유와 휴머니즘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다.
누구나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이 소설의 독특한 제목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봤을 것이다. 작가 켄 키지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동요에서 영감을 받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제목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의 작품 해설을 보면, '뻐꾸기 둥지'는 속어로 정신병원을 의미한다. 그런데 원래 뻐꾸기는 스스로 둥지를 틀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자신의 알을 낳는다. 따라서 사실 뻐꾸기는 자신만의 둥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캔 키지는 그러한 제목을 붙인 것일까? 도대체 뻐꾸기 둥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뻐꾸기 둥지, 그것은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뻐꾸기 둥지는 우리에게 이중적 의미를 제시한다. 우선, 뻐꾸기 둥지는 말 그대로 정신병원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때 뻐꾸기 둥지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어둡고 부정적인 일종의 디스토피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 부조리한 현실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희망을 담은 유토피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우리가 뻐꾸기 둥지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발 앞서 거기로 날아갔던 맥머피를 통해서 이 유토피아로서의 뻐꾸기 둥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맥머피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도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가 날아갈 차례이다. 생생하게 숨 쉬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저 뻐꾸기 둥지를 향해서 이제 우리는 힘차게 날아올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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