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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만 원'을 든 개그맨? 전두환은 매력적인 반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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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9만 원'을 든 개그맨? 전두환은 매력적인 반면교사!

[인터뷰]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의 고나무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무명의 군인이었으나 쿠데타로 권력을 접수,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 대통령 퇴임 9개월 만에 청문회 자리에 서고 8년 뒤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으나 83세에 이르는 이날까지 살아남아 불법 축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사람. 그 당사자 전두환을 비롯하여 '전두환 시대'에 책임이 있거나 이에 대해 증언해야 할 이들이 침묵한 채 '아직 살아'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672억 여 원의 환수 여부와 전두환 일가의 또 다른 범죄 혐의 추적이 최근 좌우를 막론한 관심사다. 2013년 10월 예정이었던 환수 시효를 2020년으로 늘리는 일명 '전두환 추징법'은 압도적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했고, 검찰은 일가에 대한 수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고나무 지음, 북콤마 펴냄). ⓒ북콤마
"29만 원짜리 수표를 든 전두환 포스터를 만들어도 그는 아파하지 않는다." 풍자는 저항의 스타일이지만 전두환은 더 이상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범죄자'다. "그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숨은 재산을, 현실적으로 추징하는 것뿐이다."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북콤마 펴냄)을 쓴 고나무 <한겨레> 기자의 이 말은 이제 실현될 수 있을까?

2010년경부터 보수를 알고자 독재 시대의 회고록을 읽어 온 고나무 기자는 지난 대선을 거치며 늦은 감이 있는 역사 청산에 기자의 방식으로 나섰다. '한국 사회의 리더는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자문하며 전두환이 권력 중추를 접수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쿠데타 당시 미국 국무부 기밀 자료 가운데 전두환 시대를 새롭게 비춰줄 자료들을 단독으로 발굴했고, 그 시대 회고록과 언론 자료를 긁어모으고 솎아내길 반복했다. 노재현, 허화평, 이학봉, 안무혁 등 5공의 주요 인물 그리고 전두환 본인이 인터뷰를 거부했지만 호텔리어 최영수, 작가 천금성, 전 공화당 사무총장 예춘호 등이 시대에 대한 소중한 증언을 들려주었다.

'철저히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야심에 따라 이 책은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사람의 동기를 좇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두환의 재산 문제부터 1979년의 쿠데타, 그가 살아온 길과 참조한 것들, 인간관계 등이 점점이 찍혀 선과 면을 이루고 하나의 그림이 되어 간다. 그 다면적인 접근 속에서 전두환과 5공의 남자들은 '쳐다봐서도 안 될 악마'가 아닌 입체로 부각되며, 민주주의를 갈구하면서도 충분히 강하지 못했던 세력들의 '부작위의 죄'도 드러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판단이 이념적 이분법과 정서의 영역으로 넘어간 데 대해 본래 시좌를 되찾으려는 시도도 읽힌다.

기자로서의 경험과 고민이 스스로를 크게 변화시켰다고 말하는 그는 '프레시안 books'와의 인터뷰에서도 오랜 습관이 아니고서는 나오기 힘들 신중함으로 단어를 골라가며 대답했다. 지난 12일 그를 만나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 고나무 <한겨레> 기자.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전두환의 재산 문제가 처음 조사된 1988년부터 법원이 추징금을 확정하고 여러 의혹이 추가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미결 상태다. 수사기관의 의지 부족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정권마다 상이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고나무 : 일단 이 문제에 대해 지난 정권의 방기 혹은 무책임을 논한 박근혜 대통령의 지적은 옳다. 하지만 전두환 비자금 추징 문제는 그것이 시작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의 내란죄 수사 자체가 김영삼 정부, 정권으로 치면 신한국당 시절에 시작된 데서 알 수 있듯 진보와 보수 간에 의견차가 있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정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책임자가 있다면 검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정권 일부에 책임을 묻자면 일차적으로 두 전 대통령을 너무 일찍 사면해 준 김대중 정부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덧붙여 비자금 규모를 밝혀놓고도 끝내 추징하지 못했던 노무현 정부, 정확히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 당시의 검찰' 역시 책임을 물을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참고로 이번 채동욱 검찰총장 하의 검찰은 지켜보고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선거개입 이슈에 대한 검찰과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전두환 재산 문제에 대한 수사를 강화하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었다.

고나무 :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나친 음모론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대통령의 한마디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과거 정부에서는 왜 안 됐을까? 이 음모론은 5.18 피해자들에게 특히나 더 납득되지 않을 것 같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는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례에 해당한다. 당연히 해결해야 했을 정의의 문제에서조차도 소위 진보·개혁 진영은 힘이 없었던 거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한 기자 입장에선, 무능한 진영이 제기하는 음모론이 우스울 수밖에 없다.

과거 기록을 통해 전두환과 박근혜란 인물의 역사적 인연을 추론해 보면, 박 대통령이 검찰 수사 강화를 지시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지금 상황을 박 대통령이 싫어하지는 않을 거다, 정도로만 이야기할 수 있겠다.

프레시안 : <한겨레>는 언론이 로데이터를 공개하고 시민이 그걸 내려 받아 제보하는 '크라우드 소싱' 방식으로 전두환 은닉 재산 찾기를 기획했다. 전두환 재산과 관련한 여러 단독보도가 시민 제보를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검찰 수사와 선의의 경쟁을 할 것'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는가.

고나무 : <한겨레>가 지난 5월 20일에 이 기획 기사를 내보내자마자 채동욱 검찰총장이 전두환 미납 추징금 문제를 언급하고 즉시 전담 수사팀이 꾸려진 점 등을 고려하면, 언론기관의 선도적인 문제제기가 검찰 수사를 자극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후에도 전두환 재산 이슈에 관한 한 <한겨레>가 선도해 왔다고 자부한다. 검찰 쪽에서 드러내 놓고 반응이 오지도 않았고 올 리도 없지만 기사를 잘 보고 있다는 전언은 들은 적 있다. 선의의 경쟁 외에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겨레>는 이 문제를 계속 추적할 것이다.

당신은 왜 권력을 접수했는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전두환이란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이를 긴 호흡으로 취재해 책을 내게 만든 동기나 동력원은 무엇이었는가.

고나무 : 2010년경 정치부에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박정희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논쟁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진영 논리를 뛰어넘어 한국의 보수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길로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기록, 즉 군사독재 시절에 활동한 정치인과 관료들의 회고록을 빠져들어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보수에 꽂힌' 건 2~3년 전부터다. 그 중에서도 청년 김종필이란 인간에 끌렸다. 과거의 그에게서 아주 매력적이고 명민한, 그냥 군인을 넘어선 엘리트 정신을 발견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6월 8일 '육사 발전기금 200억 원 달성' 기념행사에서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장교를 사열하는 전두환을 보고, 이 사람에 대해 정리하는 것이 보다 시급한 역사적 과제라는 생각을 했다. 정치인 전두환이 현재 우리에게 매력적인 반면교사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대선이 있었다. 박근혜의 집권을 '역사의 퇴보'와 동일시하는 진보 진영의 자기 최면을 자주 목격했다. 1979년 겨울에도 시민들은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당연히 와야 할 것'들은 유예됐다. 책에 쓴 대로 "'그(전두환)는 연구할 가치가 없는 평범한 악일 따름'이라는 진보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클수록 반항심처럼 '민주주의가 1979년의 시대정신이었다면 7년간 성공적으로 시대정신에 맞서 싸운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반문"이 솟아올랐다.

프레시안 : 전두환은 40대 이상에게는 분노를 일으키는 악마로, 젊은 세대에게는 '29만 원' 같은 조롱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대비가 나온다. 저자가 속한 70년대 생, 90년대 학번이 전두환에 대해 가지는 정서적 특징이라 할 만한 게 있을까.

고나무 : 나는 1976년생, 96학번이니까 그 세대에 속해 있긴 하지만, 주어를 '70년대 생, 90년대 학번'으로 하여 '우리 세대는 전두환에 대해 이렇게 느낀다'라고 대표하여 발언하기는 적절치 않다. 다만 책에서 밝힌 대로, 전두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감이 허용된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전두환을 쳐다보기도 싫은 악마나 '29만 원'을 든 개그맨이 아니라 정치인 전두환, 한국 정치의 반면교사로서의 전두환으로 학습지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새로운 사실과 증언의 발굴이 절실했을 텐데, 전두환 시대의 비밀을 쥔 핵심 인물들은 거의 다 인터뷰를 거절했다.

고나무 : 상당한 거절을 당하리라 예상했다. 그냥 기자도 아니고 그분들이 선입견을 갖고 있을지 모르는 <한겨레> 기자니까. 예상은 했지만 아쉬웠다. 그러나 인터뷰를 거절한 사람들 가운데 노재현 전 국방장관이나 이학봉, 안무혁 씨 같은 이들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해명할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가졌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점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고위공직자이면서 범죄 행위에 가담했으니까.

프레시안 : 만약 전두환을 직접 인터뷰하게 된다면 가장 처음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

고나무 : '당신은 왜 권력을 접수했는가.' 전두환은 1995년에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를 읽어봐도 '구체적으로 대통령직을 생각한 것이 언제냐'라는 검사의 질문에 대답을 않고 있다.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제일 궁금한 부분이다. 그래서 책을 썼고 책에 한 챕터('전두환의 욕망')로 들어가 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그 무엇과도 투쟁하지 않았다. 당시 역사책과 회고록을 아무리 찾아봐도, 사익 외에 '신군부가 왜 군부 권력을 접수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기 어렵다." (80쪽)

"가치관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출세해야 한다는 순수한 욕망 자체였을까? "그들은(12·12 쿠데타군) 전적으로 개인적 이익욕이라는 모티브로 움직였다"는 위컴(12·12 쿠데타 당시 한미연합사령관 존 위컴 주니어-편집자)의 시선에 대해 전두환은 뭐라고 답할까." (171쪽, '전두환의 욕망' 중)


선한 권력의 부작위

프레시안 : 이 책에서 12·12 쿠데타 세력이 엘리트로 성장하고 권력을 탈취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학과 공부는 미국식, 훈련은 일본식, 물론 의식주의 방식만은 가난한 한국식'으로 교육받았다는 육사 11기 이동희의 회고처럼 없는 동네에서 활개 치는 골목대장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렇게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뒤쳐져 있었지만, 1979년 쿠데타가 일어나던 상황에서는 "누구도 민주주의가 대세임을 부정하지 못했"고 "민의는 신민당을 향해 있었다"고 썼다. 그런데 어째서 '조직된 85명'이 3740만여 명 인구의 한국을 접수해 버릴 수 있었을까.

고나무 :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책에 인용한, 당시 상황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기록으로 갈음하고 싶다. 그들은 1979년부터 1980년 사이 한국 정치를 좌우할 주연배우가 5명이라고 기록했다. ①군부 ②신민당 등 정치적 반대파의 힘 ③대학생과 지식인, ④임시 대통령과 그 휘하의 행정부, ⑤미국의 영향(123쪽, 원 출처 1979년 11월 8일 주한 미국대사관 국무부 전문 1쪽)이 그것이다. ①에서 ⑤까지가 시대적 사건을 결정하는 요인인 셈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말할 때는 주로 ②, ③번만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요인의 일부다. 87년 6월항쟁의 경우엔 그 두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겠지만 다른 사건의 경우 야당, 대학생·지식인을 합친들 나머지 세 가지 요인을 이길 수 있었을까? 특히 1979년 쿠데타 전후의 상황을 파악할 때는 군부와 관료, 재계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기 일쑤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을 모든 악의 사악한 근원으로 여김으로써 한국 정치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 결정이 국가에 운명적일 수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의 반열에 전두환이 오른 것은, 우연이다"라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1979년 말의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고 무기력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당시 한국 정치의 여러 요인 중에 민주주의를 이끌어야 할 책무가 있는 집단-특히 관료, 재계, (쿠데타에 반대했던) 군부-들이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거다.

프레시안 : 이 책을 쓰면서 그 시대와 쿠데타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나.

고나무 : 크게 변했다. 과거엔 쿠데타란 말에 악마적 사건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면, 자료를 검토한 뒤부터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정치적 행위가 되어 있었다. 그저 벌어지면 안 됐을, 쳐다보기도 싫은 사건이 아니라 공부를 해서 밝혀야 할 현상이라는 깨달음이었다고 할까. '전두환은 악마가 아니다'라는 글라이스틴의 기록은 가슴을 쳤다. 대학 시절 읽은 어떤 진보 성향의 학자들의 책에서도 이런 설명은 없었다.

정치라는 개념의 크기도 내 안에서 확장된 것 같다. 예전엔 그 단어를 들으면 곧바로 민주주의를 연상시켰는데, 보수나 독재, 쿠데타를 공부하면서 정치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민주주의란 말도 예전에는 '뭔가 성스러운 것'이라는 정서적 태도로 대했다면 전두환이란 인간에 대해 학습하면서 정서적 온도가 낮아졌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적 정치'를 의미한다는 생각, 즉 어떤 작동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신민당은 그들이 단지 시끄러운 반대 운동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현명한 정책을 입안하고 유능한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있음을 과거보다 더 보여줘야 할 것이다"라는 글라이스틴의 기록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프레시안 : 쿠데타 당시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해서도, 전두환 재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도 '선한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부작위의 죄'라는 표현을 썼다. '선하다'라는 도덕적인 판단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나무 : 그때는 '선함=민주주의'로 좁혀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대립항은 독재 대 민주주의다. 가령 쿠데타라는 악이 발생하면, 진압하는 것이 선이다. 민주당, 신민당에 선하다는 표현을 써선 안 되겠지만 독재 대 민주주의라면 거기에 선하다는 형용사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이 말은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 씨의 표현이다.

프레시안 : 전두환의 쿠데타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고나무 : 기자는 복화술사다. 내 표현보다 좋은 표현이 있다면 그걸 인용하는 수밖에 없다. 조갑제 씨가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 쓴 다음의 문장이 갈음해 주리라고 본다.

"그(쿠데타 당시 육군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의 증언을 정리하면서 느낀 나의 주관적 소견을 덧붙인다면, 정승화 씨는 선한 사람이다. 선하기에 이런 증언을 할 수 있는 집념과 용기가 우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강하지 못했다. 우리 역사가 그에게 '강해야 할 때'라고 요구할 때 그는 역사의 부름에 화답하지 못했다. 우리가 12·12 사건과 정승화 씨로부터 끌어내야 할 과제는 '선하면서도 강력한 권력'을 이 나라에 세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중,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288쪽)에서 재인용)

글쟁이 혹은 월급쟁이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책을 쓰면서 만난 인터뷰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인가.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멜빌, 콘라드'라 불렸지만 전두환 전기를 쓴 이후로 문단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천금성 작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고나무 : 일단 전두환의 육사 동기인 장석윤 선생이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고 지병을 앓고 계신 중에서도 육사 정치군인들이 권력에 개입한 역사를 용기 있게 반성하고 발언한 거의 유일한 전두환의 육사 동기였다. 그와 나눈 이메일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같은 육사를 나왔지만 권력과 돈보다는 자존심과 자기 주장을 지켰던 나의 동창, 나의 후배, 나의 친구들의 주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참뜻을 독자들에게 전달코자 무딘 필치로 이 책을 엮었다." (장석윤, <탱크와 피아노> 중.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238쪽)에서 재인용)

또 배순훈 ST&T중공업 회장(대우전자 전 사장, 국립현대미술관 전 관장, 1998년 김대중 정부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편집자)에게서 5공화국의 경제적 과제와 전두환노믹스의 유산에 대해 들은 것도 뜻 깊은 경험이었다.

"1980년대 후반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에 시작한 중화학공업 투자에 수요가 확대되어 시장이 우호적으로 변했던 시기입니다. 한국에게는 뜻밖의 행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기를 잘 운영해서 국가 경제를 살린 것은 5공화국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고위직 공무원이나 금융계 인사들이 부정하게 축재를 한 의혹이 커졌습니다. 민주화된 후 당선된 대통령마다 대기업과 얽힌 공무원의 부정부패 척결을 제일 큰 과제로 삼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국토 개발과 관련한 졸속 행정과 부동산 투기와 관련해 발생한 정보의 비대칭도 부정부패를 촉진시켰습니다.(후략)" (284쪽)

그리고 천금성 작가와의 두 차례에 걸친 대면 인터뷰는 단순히 전두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글 쓰는 사람으로서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경험이었다. 호텔리어 최영수 사장 역시 영감을 준 인터뷰이였다.

"해양 문학 작가는 글로 흥했고 글로 쇠락했다. '전두환 전기 작가'라는 낙인의 흉터는 2013년까지도 쉬 없어지지 않는다. 그는 1980년에 작가의 도덕이 아닌 생활인의 본능을 좇아 움직였다. 일흔두 살의 소설가는 뒤늦게, 생활인의 계산이 아니라 글쟁이의 본능을 좇아 살고 있다. 그를 몰락시킨 것도 글이지만 그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도 글이다. (…) 책이 팔리든 안 팔리든 그는 여전히 취재하고, 글을 쓴다. '책을 써서 성취하겠다는 계산보다, 글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본능 때문에 쓰는 것 같다'라고 상경하는 케이티엑스 열차 안에서 취재 수첩에 끄적였다." (249~250쪽)

프레시안 : 이 책은 일간지라는 틀에 담기 어려운 긴 호흡의 취재, 글쓰기에 대한 야심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을 가능케 한 노력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고나무 : 한국의 신문 저널리즘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긴 호흡의 글쓰기나 새로운 방식의 탐사 기획에 인색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현상과 사건을 더 오래 취재하고 대중적인 글쓰기로 풀어내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확산되고 있다. 나 역시 이런 변화의 흐름에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 문제의식에 상응하는 환경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필요한 설득 작업과 긴 취재가 가능한 시간, 공간을 찾는 것은 '기자' 고나무의 노력에 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나 선배와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던 배경이 컸다. 가령 내가 전두환과 관련된 과거의 모든 논란 재산을 목록화하겠다고 했을 때, <한겨레21> 전임 편집장이 3주라는 시간을 과감하게 허락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번 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한겨레> 기자로서 독자를 위한 좋은 기사를 생산하는 일과 신문에 다 담지 못하는 취재 결과물을 논픽션이라는 형태로 풀어내고자 하는 욕망의 교집합을 계속 유지하는 것, 그게 10년차 기자로서 나의 주된 고민이다.

프레시안 : 다음 책을 쓴다면 무엇에 대해 쓰고 싶은가.

고나무 : 요즘은 범죄, 마약, 인간의 나약함에 꽂혀서 관련된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닥치는 대로 보고 있다. 최근엔 올더스 헉슬리의 <모크샤>(이양준 옮김, 싸이북스 펴냄)나 보들레르 등의 작가들이 마약 경험을 이야기한 <해시시 클럽>(조은섭 옮김, 싸이북스 펴냄) 같은 옛날 기록들을 읽어봤다. 아직 '야마'가 확실히 선 것은 아니다. 하다 안 되면 말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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