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연재는 <낮은 한의학>(사이언스북스 펴냄) 책으로도 묶여, 시민과 소통하려는 한의사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관련 기사 : 정조 독살은 헛소리! 홍삼의 불편한 진실!) 이상곤 원장은 '낮은 한의학' 시즌 2에서는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선조입니다. 왜란을 비롯한 온갖 역경 속에서 조선의 쇠락을 막지 못한 왕으로 평가 받는 선조. 과연 그의 심신의 건강은 어땠을까요?
이명과 편두통에 침을 선택
선조를 괴롭힌 가장 무서운 질환은 귀울음 곧 이명이었다. 증상은 즉위 28년 8월부터 시작돼 평생 동안 이어졌다.
<동의보감>에서 파악한 귀의 본질은 '공한(空閒)'이다. '고요함을 소중하게 여기고 마음이 텅 비어 한가함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음이 번뇌로 가득 차거나 화가 뻗치면 귀에 병이 생긴다. 귀는 고요하면서 차가운 기관이다. 우리가 뜨거운 불에 손을 데면 반사적으로 귓바퀴를 잡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포영화에 소리가 없으면 무덤덤해지듯 귀는 어둡고 차가운 공포를 주관하는 곳이다. 생긴 모양도 외부는 넓고 내부로 갈수록 좁아진다. 소리를 모으기 좋게 생겼다. 그래서 한의학은 귀를 구심성(求心性)의 음적(陰的) 기관이라 규정한다.
한의학에서 뜨겁고 팽창하는 힘은 화(火)이며 차갑고 수축하는 힘은 수(水)다. 귀는 확실히 음적이며 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차가운 귀에 뜨거운 화가 올라오면 귀는 달아오르면서 자기 소리를 시끄럽게 증폭한다. 이런 기전으로 스트레스는 귀울음을 유발한다. 이명이 오면 자신의 심장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선조는 이명 치료를 위해 약물을 먹으라는 신하들의 청을 거절하는 대신,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 허임(許任)의 침을 맞길 원했다. 이렇게 엄포까지 놓았다.
"귓속이 크게 울리니 침을 맞을 때 한꺼번에 맞고 싶다. 혈(穴)을 의논하는 일은 침의가 전담해서 하라. 침의가 간섭을 받으면 그 기술을 모두 발휘하지 못해 효과를 보기 어려우니 약방은 알아서 하라."
여러 차례에 걸쳐 침을 맞은 점, 침의에게 의존한 점을 보면 침이 선조의 귀울림을 많이 개선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선조의 질환을 치료한 공으로 양반이 되고 부사 자리에 오른 허임은 동아시아 최고의 침구 서적인 <침구경험방>을 쓰기도 했다.
선조는 편두통을 앓기도 했다. 침으로 편두통을 치료한 의관에게 선물을 하사한 기록도 있다. 사실 선조의 편두통은 난치의 질병에 가까운 것이었다. 명저 <편두통>(강창래 옮김, 알마 펴냄)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편두통을 "뚜렷한 절망과 은밀한 위로"라고 표현한다. 편두통은 크게 소화 불량, 월경, 호르몬과 관련지어 일어나는데 선조의 편두통은 소화 불량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색스는 "편두통이 올 때는 위가 평소처럼 편안하지 않고 먹는 것을 조심하면 증세가 줄어든다. 반대로 위장을 부담스럽게 하면 더 잦고 심각해진다"고 설파했는데 선조의 소화 불량증과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선조의 편두통은 색스의 분류로 따지면 '하얀 편두통' 유형에 속한다. 정서적 자극을 받으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의기소침해지는 유약한 억제형이면서 미주신경 긴장증에 가깝다는 것.
선조와 허준
선조 당시의 어의(御醫)는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이다. 선조는 허준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실록이나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은 드라마와 많은 차이가 있다. 실록의 허준은 여러 차례에 걸쳐 탄핵을 당한다. 야사(野史)로 전해오는 허준의 '난리탕' 처방 일화는 청탁을 배격하는 허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허준이 당대의 명의로 뜨는 어의가 되자 사대부들의 왕진 청탁이 쇄도했다. 비록 어의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사대부와 의관의 신분 격차는 엄청났다. 왕진 청탁을 거절할 명분이 필요했던 그는 각기병이 생겨 움직일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그런 와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허준은 선조와 신하들이 몽진을 떠나는 상황에서 제일 앞장서 종종걸음으로 내달렸다. 오성 이항복은 그 모습을 보고 "어의 허준의 각기병에는 '난리탕'이 최고"라고 비꼰다.
허준은 드라마와 달리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평생 후원자였던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갔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많은 진료 청탁과 이 부탁을 정성껏 수행하는 허준의 모습이 곳곳에 드러난다. 1569년 당시 유희춘은 나주에 사는 나사침과 그의 아들 나덕명의 병을 진찰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남원에 사는 신흔의 질환 치료를 부탁하는데 허준은 "병이 비록 중하지만 치료될 수 있다"고 보고한다.
유희춘은 자신의 병은 물론 부인의 고질병 치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종기 치료를 위해 얼굴에 지렁이 즙을 바르고 토사자환을 처방한다. 호불호가 분명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성을 다해 진료하는 인간 허준의 또 다른 면이다. 실록은 왕의 말을 기록한 글이지만 사대부의 시각으로 쓰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사간원은 허준을 강력히 비난한다.
"허준이 본시 음흉하고 범람한 사람으로 자신이 수의가 되어 약을 씀에 있어 많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저질러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써서 마침내 선왕께서 돌아가셨다."
어의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비난이 쇄도하면서 결국 허준은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특히 인간적인 평가에서 모진 곤욕을 치른다. "음흉하고 범람한" 사람으로 규정 당하며 사대부들의 왕진 청탁을 거절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하지만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사간원이 허준의 석방 명령 환수를 주장하자 오히려 의관으로서의 고집을 칭찬한다.
"약을 처방함에 있어 허준의 치료 능력을 잘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대로 옳다고 생각하면 시행하며 정성껏 처신하는 그 뜻을 감안하여 석방한다."
"망녕되이 극히 찬 약을 썼다"는 대목은 선조도 말한 바 있다. 선조 40년 10월 9일 새벽 선조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다 넘어져 의식을 잃는다. 그러자 의관들은 한꺼번에 청심환, 소합원, 생강즙, 죽력, 계자황, 구미청심환, 조협가루, 묵은 쌀죽 등의 약을 한꺼번에 올렸다. 청심환, 구미청심환, 죽력 등은 모두 성질이 찬 약제들. 선조는 이튿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의관들은 풍증이라고 말하나 내 생각에는 필시 명치 사이에 담열이 있는 것 같다. 망령되이 너무 찬 약제를 쓰다가 한 번 쓰러지면 다시 떨치고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미음도 마실 수 없으니 몹시 우려된다. 다시는 이처럼 하지 말라."
이런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2주 후인 10월 26일 지속적으로 먹어오던 영신환이라는 약물을 선조가 거부하는 일이 벌어진다.
"새로 지어들인 영신환을 복용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 약 속에는 용뇌 1돈이 들어 있다. 용뇌는 기운을 분산시키는 것이니 어찌 장복할 수 있는 약이겠는가. 그것도 지금처럼 추운 시기에 말이다. 요즈음 먹어보니 서늘한 느낌이 들어 좋지 않다. 의관들이 필시 오용하였을 것이다."
12월 3일에는 허준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진료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다.
"사당원(砂糖元)을 들이자마자 또 사미다(四味茶)를 청하니 내일은 또 무슨 약과 무슨 차를 계청하려는가. 허준은 실로 의술에 밝은 양의(良醫)인데 약을 쓰는 것이 경솔해 신중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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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를 위한 변명
반면 의관으로서의 허준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조선 최고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고금의 의료 서적에 널리 통달해 약을 쓰는 데 노련하다." (선조)
"허준은 내가 어렸을 때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근래 내 질병이 계속돼 그를 곁에 두고 약을 물어 쓰고 싶다." (광해군)
의관으로서의 이런 평가와 달리 실록이 그의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혹평을 일삼은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실록은 심지어 허준에 대해 "성은을 믿고 교만을 부리므로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역시 치료 청탁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점과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 외골수 같은 진료 행태 때문에 생긴 부정적 결과가 아니었던가 싶다. 만약 그가 진료 청탁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면 <동의보감>을 비롯한 수많은 저작이 나올 수 있었을까.
비록 많은 사대부와 권신들이 임진왜란에 허둥대면서 도망간 선조와 허준의 모습에 대해 비난하지만 그들의 나약함은 어쩌면 시대가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숭배한 사대부와 권신들은 내성외왕의 경지를 임금에게 강요하고 허준을 자신들의 주치의로 만들려 했다. 선조에 대해서는 밖으로는 왕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한편, 안으로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며 끊임없이 압박을 가했다. 성리학의 대가인 주돈이는 성인의 경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인은 중정(中正)과 인의(人義)를 본성으로 삼고 주정(主靜·무욕한 까닭에 고요하다)하여 인극(人極)에 이른다."
사대부와 학문의 극적인 경지를 다투던 욕심 없는 사람이 과연 전쟁에 능률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까. 뿔이 강한 짐승은 강한 이빨을 타고날 수 없고 이빨이 강한 짐승은 강한 뿔을 타고날 수 없다. 오직 성리학만을 숭상하고 성인의 경지를 숭상한 사대부에 의해 만들어진 선조, 전쟁에서의 비겁함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치욕의 군주' 선조는 왜란 중 의주에서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시 한수로 읊어낸다.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 /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다 / 조정 신하들은 이날 이후에도 / 동인이니 서인이니 나누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痛哭關山月 / 傷心鴨水風 / 朝臣今日後 / 寧腹各西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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