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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을 사랑한 작가, 죽음의 '황홀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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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을 사랑한 작가, 죽음의 '황홀경'으로

[철학자의 서재]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아센바하, 이성과 의지의 인간

독일 근대 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베니스에서의 죽음-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민음사 펴냄) 중)은 에로스, 즉 섹슈얼한 사랑을 다룬 연애소설로도 읽히고, 예술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 예술가 소설로도 읽힌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아마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 즉 작가이자 시인 구스타프 폰 아센바하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아센바하는 작가로 큰 명성을 얻어 귀족 작위까지 얻은 나이 지긋한 저명인사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이 아센바하가 어떤 여름 일상을 벗어나 낯선 장소인 베니스로 휴가를 떠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의 죽음으로 끝나는 중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아센바하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소설의 전반부는 아센바하가 신체의 병약함을 극복하고 자기 스스로와 일상을 엄격하게 잘 통제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항상 긴장한 채, 신체의 타고난 병약함을 정신의 강인함으로 극복하며 뛰어난 예술적 업적을 쌓아왔던 것이다.

그에게 명성을 안겨다준 소설들은 인간의 아름다운 품격이란 바로 절제와 이성에 있음을 주로 역설하며, 거기에는 강인한 절제력과 뛰어난 지성을 가진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우아하고 절제된 생활을 견지해왔던 아센바하의 이와 같은 삶에 대한 태도는 베니스로 향하는 배에서 만난 한 무절제한 늙은이에 대한 그의 시선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아센바하는 배에서 나이를 망각한 채 요란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품위 없이 젊은이들과 한바탕 어울리는 늙은이를 보며 깊은 혐오감을 느낀다.

늙은이, 소년을 만나다

▲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베니스에서의 죽음-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그런데 이런 아센바하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아센바하는 유명한 휴양지 베니스에 도착해 한 호텔에 머물게 된다. 그는 이 호텔에서 폴란드 귀족임이 분명해 보이는 한 가족과 마주친다. 이 가족 구성원의 한 명은 열너덧 살 즈음으로 보이는 금발 소년인데,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미모를 가지고 있다. 소년의 그 경이로운 미모는 주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아센바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소년의 아름다움에 아센바하의 시선 또한 사로잡힌다.

문제는 아센바하의 소년을 향한 첫 시선의 사로잡힘이 다만 스쳐지나가는 찰나적 사건이 아니라, 진짜 사랑 그것도 에로스적 사랑의 시작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눈에 알아보는 나이 지긋한 저명인사가 열너덧 살 밖에 되지 않는 아이, 그것도 소년을 사랑하게 되다니! 그러나 사랑은 사람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의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 아센바하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소년을 피해 베니스를 떠날 결정을 하지만 의도된 우여곡절을 거쳐 베니스에 더 머물게 된다.

아센바하의 시선은 계속해서 소년의 뒤를 쫒는다. 그의 하루 일정은 소년의 동선에 맞춰진다. 소년이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에 맞춰 그도 식사를 하고, 소년이 베니스 구경을 나서면 그 뒤를 쫒아 베니스의 뒷골목을 헤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소년이 있는 곳엔 늘 아센바하 또한 있다. 아센바하는 시선 속에 소년을 언제나 담아두고자 몸부림을 친다. 소설은 의지와 지성의 작가 아센바하가 사랑 앞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마침 베니스엔 콜레라가 창궐하고 관광객들은 하나둘 베니스를 떠나기 시작한다. 콜레라를 피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치명적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 후에도 아센바하는 베니스를 떠나지 않는다. 소년이 베니스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길한 죽음의 기운이 날로 더해가며 베니스에 짙게 깔리지만 아센바하는 개의치 않는다. 소년을 보지 못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 두렵고 싫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어느 날 아센바하는 자신의 늙은 신체를 두고 한탄하기에 이른다. 단지 소년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 소년을 만지고 싶고 그와 함께 어울리고 싶은 욕망의 고통에 시달리는 까닭이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베니스 행 배 위의 그 주책없는 늙은이처럼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흰 머리를 염색하고 얼굴에는 화장을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뛰어노는 소년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는다.

플라톤의 영향

▲ <파이드로스>(플라톤 지음, 김주일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이제이북스
이러한 토마스 만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줄거리는 이 소설을 사랑, 연애 감정을 다룬 소설로 다가오게끔 만든다. 그런데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다보면 이 소설이 플라톤의 사랑에 대한 견해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파이드로스>같은 경우는 여러 번 직접 언급되기까지 한다. 이는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이해할 때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소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플라톤을 경유해 가보도록 하자.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직접 여러 번 언급되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는 연애학의 고전으로 불릴만한 책이다. 에로스에 대한 체계적인 동시에 매우 오래되었으며, 또 유명한 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반에 가까운 분량이 사랑하는 이의 악덕, 즉 연애의 부작용 분석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플라톤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사랑에 빠진 이는 연인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자 하며, 자신을 떠나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 외의 것에 관심을 두어 그것을 탐구하고 연마하는 것을 싫어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들을 만나는 것도 못마땅해 한다. 즉 말하자면 연애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발전과 전인격적 성숙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실컷 상대의 독립과 발전을 가로막다가 더 이상 연인에게 매력을 못 느끼게 되면 이별을 궁리하며 헤어지고 그때부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다. 그동안 자신이 상대에게 준 것들을 아까워하며 후회할 뿐더러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상대를 비난하기 일쑤이다. 사랑은 이처럼 몰이성과 부덕의 원천이기 쉬운 것이다. 연애를 경험해본 이들 중 플라톤의 분석이 틀렸다고 부정할 수 있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플라톤이 비난하는 사랑하는 이의 몰이성 상태와 부덕은 사랑에 빠졌을 때 흔히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인 까닭이다.

플라톤은 이런 사랑의 원초적 모습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정의한 사랑을 시적으로 풀이해보자면, 에로스로서의 사랑이란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곧 사랑이다. 당신이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상대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면 사랑의 부작용, 몰이성과 부덕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그러한 사랑은 상대와 자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고전주의자 중의 고전주의자인 플라톤의 해법은 당신이 발견한 아름다움 너머,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변치않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이성을 통해' 발견하란 것이다.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머물러 단지 그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고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가 가진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러한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아끼며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럼으로써 영혼과 영혼이 결합하게 되면 설사 둘이 헤어지게 되어서 신체가 멀어지더라도 서로의 영혼은 영원히 결합한 채로 남게 되리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에로스적 사랑이 육체에 대한 사랑에 머무르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육체를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정신으로 포착해, 두 사람의 결합이 신체의 결합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의 성숙을 돕는 정신의 합일, 정신의 승리로 승화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에로스를 거론하는 저작은 <파이드로스>말고도 <향연>이 있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다른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에로스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보여주지만, 결국 에로스를 생산의 힘, 생산의 원동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녀의 사랑이 자식 생산으로 귀결되듯, 정신에 대한 사랑은 정신의 자식을 낳는다. 플라톤의 사랑관은 이처럼 플라톤답게 육체적 매력, 육체의 홀림을 뛰어 넘어 정신의 고결함에 이르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다시 베니스에서의 "죽음"으로

우리의 주인공, 점잖고 이성적인 노신사 아센바하 역시 사랑의 몰염치한 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앞서 설명했듯 걸맞지 않게도 한참 나이 어린 소년의 아름다움에 홀렸을 뿐더러, 이성을 잃고 부끄러움이나 염치도 없이 소년의 뒤를 스토커처럼 쫒는다. 사랑의 힘에 휘둘리는 아센바하는 급기야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던 베니스 행 배 위의 주책없는 늙은이처럼 젊어보이게끔 치장을 하고, 외관을 꾸민다. 그를 사로잡은 비이성적 열정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다. 동시에 이 사랑은 그의 영감을 고조시키고 예술에 대해 다시 성찰하게끔 이끈다. 그는 고양된 감수성과 사랑의 열정 속에서 예술가의 작품 활동이란, 결국 에로스의 신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신체를 포함하는 아름다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욕망, 즉 사랑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는 예술혼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구가 언어든 음표든, 아니면 붓이든 간에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를 형상화시키는 것에는 이성, 절제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떠한가? 독일 근대 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이 아센바하의 입을 통해 말하는 사랑의 도식은 플라톤의 그것과 너무나도 유사하지 않은가? 사랑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며,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힘을 가졌다. 그 힘에 도취되지 말고, 이성의 힘으로 통제할 때 아름다운 사랑의 진정한 결실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결론. 이제 우리는 왜 아센바하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에로스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로부터 창조적 생산물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에의 도취를 이성의 힘으로 절제해 형상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소년의 아름다음에 대한 도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름다움의 힘이 지닌 불가항력적인 면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도취의 황홀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의 욕망, 황홀경에 취해 있기를 원했다.

도취의 황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벗어나지 않거나 결국 그것은 무아의 세계, 자타 구분이 없는 무분별, 영원한 어둠의 세계로 흡수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토마스 만은 파악했던 것 같다. 마치 마약에 취하고 또 취해 그 세계의 황홀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이처럼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통해 해석할 때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러한 길을 통해 보면 이 소설이 사랑에 대한 소설인 동시에 토마스 만의 예술관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보다 분명해진다. 사랑은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이며, 예술은 그러한 사랑의 도취를 이성의 역량으로 형상화 낼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재미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만이 에로스에 도취된 채 맞이한 아센바하의 죽음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센바하는 사랑하는 이를 눈에 담은 채, 도취 속에서 죽어갔다. 그것은 탐미적 죽음이며, 부서지지 않은 사랑 안에서의 죽음이다.

▲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71, 'Death in Venice'.) 영화 속 아센바하가 소년 타지오를 바라보고 있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사랑의 힘을 이성으로 통제하여 보다 높은 성취 혹은 보다 완전한 이성적 사랑,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랑을 획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의 도취 속에서 사랑에 중독되어 행복하게 죽어갈 것인가?

독자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만일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몹시 궁금하다. 이성으로 통제된 사랑도 좋겠지만, 비록 죽음으로 이어질지라도 그것이 사랑의 황홀경 속에서라면 그런 사랑도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은 혹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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