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을 맞아 '번역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명의 번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 자신의 번역서 한 권을 골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편집자> |
<반자본 발전사전>(원제 'The Development Dictionary')(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아카이브 펴냄)의 번역은 두 가지 점에서 어려웠다. 첫째, 열일곱 명이나 되는 필자들이 발전, 환경, 평등, 도움, 시장, 요구, 한 세계, 참여, 계획, 인구, 빈곤, 생산, 진보, 자원, 과학, 사회주의, 생활 수준, 국가, 기술 등 19가지 개념에 대해서 쓴 글을 모은 사전이다 보니 문체가 제각각이었다. 번역가가 저자의 문체에 익숙해지려면 예열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문체에 겨우 익숙해졌다 싶으면 완전히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는 필자와 맞닥뜨리니 벅찼다.
또 대부분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필자가 아니라서 모두가 명료하게 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원문은 모호해도 명료하게 옮기려고 애썼다. 문체가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한 예술 작품이라면 모를까, 문체보다 내용이 중요한 책의 번역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명료하게 옮겨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 <반자본 발전사전>(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아카이브 펴냄). ⓒ아카이브 |
가령 needs라는 단어는 맥락에 따라서는 '필요', '욕망', '욕구', '결핍'으로 옮겨도 무방할 때가 있지만 <반자본 발전사전>에서 needs는 인간이 생명체로서 갖는 생리적 욕망이나 욕구와는 달리 사람이 한 사회 안에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한다고 자타가 간주하는 물질적 풍요를 뜻하는 말이기에 결국 '요구'로 옮겼다. 물론 시행착오를 거쳤다.
책의 제목을 '개발사전'이 아니라 '발전사전'으로 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처음에 무심코 '개발'로 옮겨나가자 맥락과는 동떨어진 풀이가 튀어나왔다. '발전'으로 바꾸자 막혔던 구멍이 뻥 뚫렸다. 하지만 '발전'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발전'이 아직도 긍정적 의미를 잃지 않았다고 믿어서였다.
"자연을 개발하지 않고 살리는 것이 발전한 사회의 시민 의식"이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개발'이라는 말은 이제 긍정성을 잃었다. <반자본 발전사전>을 쓴 사람들의 의도는 우리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단어들에 얼마나 위험한 뜻이 담겼는가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보았기에 부정의 뉘앙스가 강한 '개발'은 번역어로서 적절치 않다고 번역자는 판단했다. <반자본 발전사전>이 논파하려던 것은 비좁고 허술한 '개발론'이 아니라 드넓고 단단한 '발전론'이었다고 번역자는 믿는다.
<반자본 발전사전>은 긍정 일변도로 받아들여지는 '발전'이라는 말을 전방위적으로 비판하는 책이지만 번역가는 어떨 때는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단어에게 온전한 뜻을 조금이라도 되찾아주고픈 안타까움을 느낀다. 가령 영어 populism은 기존의 영한사전에서 '대중영합주의', '대중추수주의', '인기영합주의' 등 부정 일변도로 그려진다. '포퓰리즘'이라는 음역도 부정적으로 쓰이기는 마찬가지다.
populism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토지 소유 제한과 철도 국유화, 금융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미국에서 소농과 자작농이 중심이 되어 벌인 정치 운동이었다. 그들은 Popular Party라는 정당까지 만들어 대통령 후보까지 냈고 스스로를 populist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소수 금권 세력에 맞서 반특권주의, 반엘리트주의를 내세웠기에 미국을 움직이는 기득권 세력의 눈 밖에 났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의 언론을 장악한 금권 세력은 populism을 무책임한 정치 운동으로 몰아갔고 결국 populist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미국은 농업부터 군수산업부터 금융까지 철저히 큰손들만을 섬기면서 큰손들의 손실을 공산주의처럼 국민의 세금으로 메꿔주는 무책임한 나라가 되었다.
populism의 긍정적인 뜻을 온전히 담아내는 말을 굳이 지어내자면 '서민주의'가 떠오른다. populism은 역사적 맥락에서는 분명히 긍정적으로 쓰였고 지금도 학술적으로는 중립적인 뜻으로 쓸 때가 많으므로 '서민주의'처럼 긍정성을 가진 새로운 대응어가 필요하다. 일부 온라인 영한사전에서는 '인민주의'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공산주의를 연상시키므로 부적절하다. 미국의 populist, 곧 서민주의자는 자본가 못지않게 반공주의자였다. 미국의 서민주의자는 관료주의를 혐오했으며 집단에 기대기보다 자립을 추구했다. 서민주의자는 인민주의자일 수가 없다.
서민주의자는 사민주의자일 수도 없다. 진보정의당의 당명이 정의당으로 결정되자 사민당을 밀었던 당원들이 실망과 분노를 토로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유럽의 진보를 이끌어온 구심점은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은 사민당으로 결집하여 대내외적으로 투쟁과 양보와 타협을 통해서 좀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한국의 노동조합도 한때 그런 기대를 모았지만 조직력이 탄탄한 한국 대기업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익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기득권만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19세기 말 서민당을 탄압했던 미국 금권 세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나만의 물질적 이익과 풍요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본가든 노동자든 금권의 노예다. 유럽의 잘 나가던 대기업 노동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산별노조를 결성하여 노동자 전체의 이익을 대변했지만 한국의 대기업 노동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기대를 버릴 때가 되었다.
미국의 서민주의를 이끌었던 농민들은 한국에서도 소수가 되었고 한국도 미국처럼 기업농 체제로 돌아갈 기미가 보인다. 돈 많은 기업농이 아니라 젊은 자영농을 늘리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시골 농민만 서민이 아니라 도시 자영업자도 서민이다. 한국에는 자영업자가 아직 많다. 자영업자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며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이 강하지 않아 서구 사민주의를 숭상하는 한국 진보 세력에게는 성에 안 찰지 모르지만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독립심이 강하고 자기 고장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역사의 진보를 확신하는 나머지 내가 잘못하면 패배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현실을 꼼꼼히 살피는 더듬이가 퇴화한 진보주의 맹신 집단보다는 낫다.
<반자본 발전사전>이 갈망하는 사람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기회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도는 무국적 야심가들이나 관광중독자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사는 터전을 떠나지 못하는 서민들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대변하는 서민주의가 한국에서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는 날 서민주의의 번역어 populism도 원래의 긍정적 의미를 다소나마 되찾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잦은 고장으로 심심치 않게 돈을 잡아먹었던 낡은 차를 2년 전 엔진 문제로 폐차시키면서 고민에 휩싸였다. 아이들이 어리다면 여러 모로 차가 있으면 "태우고 다니기" 편하겠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커서 그럴 필요성은 없었다. 아이들이 웬만큼 컸더라도 차는 어쩌다가 가족 여행을 멀리 떠날 때 요긴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드니까 장거리 운전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면서 기차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 쪽으로 더 마음이 끌렸다. 차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목돈도 필요했고 어영부영 결정을 미루다 보니 반년 이상을 차 없이 살았다. 차가 없으니 딱 하나 불편할 때는 장을 보러 갈 때였다. 차가 있을 때는 한두 주일에 한 번씩 몰아서 장을 보았다. 그런데 차가 없어서 장을 한꺼번에 많이 볼 수가 없으니 여러 번 장을 보러 가야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지니 그게 더 좋았다.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배낭을 매고 슈퍼에 걸어갔다 오는 것이 꽤 운동이 되었다. 그런데 머리가 희끗한 중년 사내가 배낭을 메고 장 보러 다니는 것이 궁상맞아 보였던 모양이다. 한 지인이 마침 차 한 대를 처분하려던 참이었다며 차를 주마고 했다. 며칠 고민을 하다가 못 이기는 척 차를 넘겨받았다. 마음 한구석에도 차 없이 지낸다는 것이 조금은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것은 물질적 불편함이 아니라 심리적 불편함이었다. 다른 집들 앞에는 다 차가 서 있는데 우리 집 앞만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면서 묘한 박탈감이 조금씩 쌓였던 모양이다. 아이들도, 다 커서 차가 딱히 필요할 일이 없었지만 막상 차가 없으니까 무언가 우리 집에 결여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차를 몰게 되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덜 걷게 되었다. 차가 없이 사는 나를 딱하게 보는 남이 없었더라면 많이 걸으면서 더 건강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먹고 살려면 장은 봐야 하니까 꼬박꼬박 운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꺼번에 식료품을 차로 실어나를 수 있으니까 걷는 시간을 따로 짜내야 하고 그나마도 들쑥날쑥이다. 내 행복의 기준을 나의 특수한 필요와 요구에 맞춰서 정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생각하는 보편적 필요와 요구에 맞춰서 정한 것이다. 나의 눈이 아니라 남의 눈으로 나의 현실을 보고 남의 눈에 속박당하는 것, <반자본 발전사전>의 문제의식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반자본 발전사전>을 쓴 필자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라는 공장제 생산양식은 역사 발전의 필연적 정점으로 나타난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 어디서나 관철되어야 할 정당성을 가진 선험적 체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연히 나타난 체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석탄이라는 화석연료가 무진장하게 파묻혔던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그 화석연료를 써먹을 수 있는 기계를 때마침 만들 수 있었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 자본주의라는 공업 문명이라는 것이다. 화석연료의 장점은 농축된 물질이 내뿜는 폭발적 에너지다. 그러나 단점은 언젠가는 고갈된다는 것이다. 자연이 100만 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서 만든 화석연료를 사람은 겨우 1년 안에 써버리니 고갈되는 것도 당연하다. 지금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었지만 석유도 화석연료다. 언젠가는 바닥이 난다. 그런데도 불과 2백년이 조금 넘는 공업 문명의 위력에 현혹당하여 비서양인까지도 서양의 공업 문명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가 추구해야 할 전범으로 삼아왔다고 <반자본 발전사전>은 지적한다. 그리고 산업 생산력을 갖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면서 하루빨리 공업화에 뛰어들어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는 경쟁에 나서면서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모든 가치관이 획일화되었다고 우려한다. <반자본 발전사전>은 화석 연료에 입각하여 쌓아올린 공업 문명의 막강한 생산력을 무기로 서양이 전 세계인을 지난 200년 동안 어떻게 홀렸는지를 발전, 환경, 평등, 도움, 시장, 요구, 한 세계, 참여, 계획, 인구, 빈곤, 생산, 진보, 자원, 과학, 사회주의, 생활수준, 국가, 기술이라는 19개의 주요 개념을 통해서 드러낸다. 이 19가지의 개념은 우리가 세상을 명료하게 응시하려고 쓰는 일종의 안경이다. 그러나 <반자본 발전사전>은 이 개념들 하나하나가 다 불량 안경이라고 본다. 불량 안경으로는 세상을 정확하고 바르게 읽을 수가 없다. <반자본 발전사전>은 우리가 좋은 사회를 그려나가는 데 쓰는 핵심 개념들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서 원래의 맥락을 파헤치고 현재의 빗나간 좌표를 일깨워준다. 가령 '자원'을 뜻하는 영어 resource는 원래 봄마다 새로 솟아나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까 화석연료처럼 한번 쓰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생 가능한 것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화석연료는 재생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자원이라고 볼 수가 없고, 따라서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굴러가는 공업 문명 모델은 일회적이고 유한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자원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는 재생 가능한 종자까지도 유전자 조작을 통해 반드시 '시장'에서 거래되어야 할 재생 불가능한 살아 있는 소모성 '화석' 상품으로 변질시키기에 이르렀다. <반자본 발전사전>은 경제 성장을 통해서 이 세상을 좀더 '평등'하게 만들겠다는 논리도 가만두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불의는 한 체제 안에서 벌어지는 불평등을 꼬집는 데 쓴 말이었지 여러 체제들 사이의 불평등을 꼬집는 데 쓴 말은 아니었다. 공동체마다 '빈곤'과 풍요의 가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옛날에는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국민소득과 '생활수준'이라는 획일적이고 협소한 가치 기준으로 모든 나라를 줄세우기하면서, 못 사는 나라에게 굴욕감을 주고 선진국 사람들이 누리는 최소한의 기본 '요구'도 못 누리고 있다는 불안감을 안기면서 빨리 따라잡아야겠다는 욕망을 부추긴다. 그리고 그 욕망은 무분별한 자연 수탈로 이어진다. 자연 수탈은 다시 인간 수탈로 이어진다. 지불 능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물건만을 생산하도록 굴러가는 국가 경제와 세계 경제의 하수인으로 만인을 오그라뜨린다. 빈곤 퇴치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가난한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일하도록 몰아간다. <반자본 발전사전>은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전제에 깔린 숨은 전제를 까발린다. 그래서 기회의 평등이라는 발상조차도 거부한다. 그것은 삶이 경쟁이고 시합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반자본 발전사전>은 또 국경을 넘어서 자유롭게 교류하는 생활이 선진 문명인 것처럼 보통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연 환경과 사회 환경에서 떨어져 나오는 독립성을 강조하는 쪽으로만 선택의 자유를 받아들이는 모래알 같은 개인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경쟁 사회를 이룩하려는 논리라고 꼬집는다. 이런 개인은 자기와 제일 가까운 집단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자기한테서 먼 집단하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초국가 중산층이 되어서 비슷한 소비 성향과 비슷한 보수적 정치 성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런 소수의 중산층을 편하게 하는 문명이 선진 문명이라고 모든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구동성으로 선전된다. 그리고 거기에 진입하지 못한 다수의 서민과 빈민은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공세에 밀려 상호 경쟁을 하면서 갈수록 빈곤의 늪에 빠져든다. 그러나 <반자본 발전사전>이 단순히 자본주의만을 비판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반자본 발전사전>은 현대의 선진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복지조차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사람답게 살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갖추고 살아야 한다는 전문가와 관료의 오만하고 일방적인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보아서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유한한 지구에서 가진 것이 많아서 펑펑 쓰는 사람보다 가진 것이 없어서 못 쓰는 사람을 더 부끄럽게 만드는 삶의 길과 많이 다르지 않다고 보아서다. 이것이 보통 진보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반자본 발전사전>의 필자들이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이다. <반자본 발전사전>의 필자들은 '진보'라는 말 자체도 오염되었다고 믿지만 넓은 뜻에서 그들을 진보의 울타리 안에 묶을 수 있다면 그들은 '진보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본주의라는 말도 이슬람 테러주의자들 때문에 안 좋은 쪽으로 많이 쓰이지만 이 말에는 장점도 있다. 근본주의의 장점은 어떤 주장의 논리적 귀결을 끝까지 따라가서 밝혀낸다는 것이다. <반자본 발전사전>의 필자들을 근본주의자라며 피상적으로 비웃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의 말과 행동이 따로 놀지 않아서다. 이반 일리치 같은 사람은 만년에 얼굴에 종양이 생겼지만 아편으로 통증을 이겨내면서 전통적 방식으로 치료하여 현대 의학을 비판했던 자신의 믿음대로 자신의 "궁핍한 운명"을 받아들였다. 발전을 통해 생산된 물질을 더 많이 차지하는 데 종국적 목표를 두는 한 일국의 노동자는 타국의 노동자와 종국적으로 일자리를 놓고 다툴 수밖에 없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는 것을 모두가 전범으로 삼는 한 자연 수탈은 노동자라는 자국민 수탈을 낳고, 자국민 수탈이 한계에 부딪치면 식민지라는 타국민 수탈을 낳고, 타국민 수탈이 한계에 부딪치면 후손을 생각하지 않고 물쓰듯 소비하고 그 빚을 후손에게 떠넘기는 후손 수탈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지금 자본주의 세계를 강타한 금융 위기의 본질도, 부동산이라는 거품에 현혹되어 집값 때문에 허리가 휘어질 후손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집값만 오르기를 바라고 그렇게 오른 집값을 믿고 흥청거리던 사람들의 후손 수탈극이다. <반자본 발전사전>을 엮은 볼프강 작스는 개정판 서문에서, 오직 부자처럼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상만을 전범으로 삼는 신조를 지구도 사람도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는 처지인데도 아직 발전의 신조가 지속되는 중요한 이유는, 인정받으려는 욕망과 정의에 대한 열망이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들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을 했고 경제적으로도 웬만큼 여유로워졌다 하더라도 좀 더 많은 물질을 향유하려는 경쟁 무대를 아예 떠나지 않는 한, "상상력의 탈식민화"는 요원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과거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이 발전에 집착하는 것은 나도 대접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인정 욕구보다는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또 다시 식민지의 수모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훨씬 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라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는 보여준다. 중앙집권제의 역사가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된 나라라는 특성도 작용했겠지만, <반자본 발전사전>이 저발전 세계를 발전 세계로 끌어올린다는 미국의 전후 구상은 소수의 예외를 빼놓고는 실패했다고 단정짓는데도, 분단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한국이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선진 공업국으로 성장한 것 역시 그만큼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깨달음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자본 발전사전>을 읽다 보면, 신분제라는 폐해만 접어두고 본다면 농업 경제를 추구하면서 일부러 상업 경제를 억누른 조선 왕조야말로 <반자본 발전사전>의 필자들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사회와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후발 제국주의 공업 국가는 조선을 가만두지 않았다. 조선도 <반자본 발전사전>의 필자들이라면 바람직하게 여겼을지도 모를 쇄국 정책을 취하다가 나중에 개방으로 돌아섰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조선의 순탄한 발전 가능성을 보고 위협을 느낀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켰다. 일본만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주의 산업 국가는 타국을 집어삼키면서 커나갔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운명을 보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탐욕을 추구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라는 <반자본 발전사전>의 근본적 비판은 근본적으로 옳지만 <반자본 발전사전>의 근본적 비판은 지금도 타국을 침공하는 강대국에 행동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100만명이 넘는 영국 국민이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행진을 벌였지만 토니 블레어는 이라크전에 뛰어들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민주주의가 자국 국경선을 넘지 못하는 한 <반자본 발전사전>의 권하는 탈발전의 길은 식민지의 악몽을 겪은 나라들에게는 '그림의 떡'인지도 모른다. <반자본 발전사전>이 처음 나온 것은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직후였던 1992년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사회주의도 결국은 일사불란한 획일화와 무한 발전을 위한 무한 노동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전략과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자본주의가 일대 위기를 맞이했다. 그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를 견제해온 사회주의가 힘을 잃었다는 데 있다. 견제 세력이 없어지니까 자본주의는 긴장을 잃고 부자만을 살찌우는 초기의 정글 자본주의로 돌아갔다. 그리고 국경선을 넘나들면서 임금을 쥐어짜서 결국은 사람들이 빌린 돈을 못 갚아서 은행이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망하게 생긴 은행을 살린 것은 결국 나랏돈이었고 그 나랏돈은 국민의 세금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고비를 넘기자 은행들은 다시 고액의 보너스 잔치를 벌이면서도, 은행을 살리느라 적자가 늘어난 정부가 세금을 올리려고 하면 세금이 낮은 나라로 가겠다고 협박한다. <반자본 발전사전>은 국가와 초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이나 계획에 거부감을 갖고 지역 차원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풀뿌리운동을 중시하지만, 만약 국가가 지역 차원의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국가의 지원은 실보다는 득이 많을 수 있다. 영국의 경우 1997년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자치 영역이 늘어났다. 영어에 짓눌려 사멸 위기에 몰렸던 웨일스어도 영국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사용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똑같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있더라도 다양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부와 그렇지 않은 정부의 차이는 크다. 그리고 다양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부들이 중지를 모아서 가령 법인세를 획일화한다든가 하는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내야만, 본사를 세금이 낮은 타국으로 옮기겠다는 금융 자본의 공갈도 이겨낼 수 있다. 낮은 차원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높은 차원의 변화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반자본 발전사전>의 가장 큰 미덕은 우리가 생각하는 더 나은 삶의 이상이 사실은 얼마나 물질에 치우쳤는가를 다시금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근본을 생각하는 <반자본 발전사전>의 시각에서 보자면 발전을 내거는 정부는 다 똑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자본 발전사전>이 누누이 강조하듯이 인간은 누구나 자기 현실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라면, 주어진 현실 속에서 어제와 다른 내일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다수의 삶을 살찌우려는 정부와, 어제와 달라서는 안 되는 내일을 지키면서 소수의 삶만을 살찌우려는 정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볼프강 작스는 작은 섬나라 영국의 경제 지상주의가 세계를 거덜내는 판국에 거대 인구를 가진 인도까지 공업화 대열에 나서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는 간디의 경고로 개정판 서문을 끝맺는다. 하지만 일찍이 1930년대부터 <반자본 발전사전>의 필자들이 눈살을 찌푸렸을 철저한 사회 공학과 발전론의 관점에서 스웨덴을 복지 사회로 만들어나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도 누구보다 간디를 존경한 사람이었다. 뮈르달은 "저발전 세계의 위기가 깊어지고 풍요한 나라의 사회적 질병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간디의 이상과 실천은 갈수록 절실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뮈르달도 발전론자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작스처럼 근본을 잊지 않는 발전론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뮈르달은 한 나라를 실제로 사람다운 세상으로 바꾸어놓았다는 것이다. 현실만 따지고 근본을 잊는 것도 위험하지만 근본만 따지고 현실의 차이를 살피지 않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 이 책은 <The Development Dictionary> 개정판의 번역이다. 영어 development는 보통은 '개발'로 옮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개발'은 이미 긍정적 의미를 많이 잃은 말이다. 이 책을 쓴 필자들의 의도는 우리가 막연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단어들이 얼마나 위험한 뜻을 담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옮긴이는 보았기에, 이미 부정의 뉘앙스가 강한 '개발'은 번역어로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긍정의 뉘앙스가 더 강한 '발전'으로 옮기는 것이 필자들의 뜻에 부응하는 공정한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발전'은 '개발'보다 외연이 크다. The Development Dictionary가 논파하려던 것은 비좁고 허술한 '개발론'이 아니라 드넓고 단단한 '발전론'이라고 옮긴이는 믿는다. 딱딱한 내용에다가 문체도 각양각색인 필자들이 다양한 주제로 쓴 글을 옮기면서 애를 먹었지만 보람도 컸다. 막연하게만 알았던 중요한 어휘들의 밑바닥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시간이라는 것은 세상도 말도 바꾸어놓는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역사 감각을 다시 얻을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좋았다. 역사 감각이 있는 사람은 현재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분장에 잘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현재가 암울하다고 해서 쉽게 절망하지도 않고 지금 잘 나간다고 해서 긴장을 풀고 낙관하지도 않는다. <반자본 발전사전>이 주는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그런 역사 감각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역사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시간은 발전의 뜻을 또 다시 바꾸어내면서 역사를 진정으로 발전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희재의 주요 저서 및 역서 <번역의 탄생>(이희재 지음, 교양인 펴냄) <몰입의 즐거움>(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해냄 펴냄) <소유의 종말>(제러미 리프킨 지음, 민음사 펴냄) <문명의 충돌>(새뮤얼 헌팅턴 지음, 김영사 펴냄) <미완의 시대>(에릭 홉스봄 지음, 민음사 펴냄) <리오리엔트>(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산 펴냄) <반자본 발전사전>(볼프강 작스 외 지음, 아카이브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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