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인종차별의 역사>는 단순한 인종차별 역사기록물은 아니다.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류가 경험해온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에 어떤 사상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인종차별이란 인종에 대한 증오와 혐오다. 그런데 이런 증오와 혐오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났을 리 만무하며 어떠한 경로로든 학습되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직접 배운 게 아니라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자연스럽게 학습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습이 작동하려면 어떤 사상적 기반이 필요하다. 물론 사상적인 기반 없이도 증오와 혐오가 학습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지속가능하려면 사상적 배경이 있어야 좀 더 긴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 <인종차별의 역사>(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 하정희 옮김, 예지 펴냄). ⓒ예지 |
하지만 그 철학적, 사상적 배경이 사실은 매우 허술하다는 점도 이 책에 잘 규명되어 있다. 실제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시된 사상적 자원들 중 제대로 검증되어 오랫동안 살아남은 경우는 없다. 그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뿐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종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터무니없는 믿음'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20쪽) 존재하지 않는 실제를 가정하고 설득력 있는 이론 구성을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한철 메뚜기 같은 것이 인종차별의 사상이라면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는)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다. 위대한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인종차별의 사상들이 끊임없이 퇴출되어 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인종차별이 어떤 특정한 계기를 만나면 사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비극적인 참사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인종차별 사상은 다양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과 조우하곤 한다. 인종차별의 사상은 세상을 지배하려는 독재자들의 권력욕과 결합되어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고, 억울한 사연을 지닌 민족공동체와 만나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하고, 직장에서 쫓겨나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약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심지어 학교생활이 재미없는 학생들의 놀이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때부터 인종차별의 사상은 타인종에 대한 공격적인 혐오와 증오의 기반으로 기능하면서 현실적인 힘으로 전화된다. 이렇게 되면 사상은 더 이상 사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증오와 혐오에 기반한 현실은 참혹하다. 그것은 때로는 '집단 따돌림'이나 '묻지마 폭행'으로, 더 나아가 '집단학살'로 이어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타자의 행위가 아니라 (젊은이, 여자, 동성애자,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등의) 속성에 대한 평판을 근거해서 타자로서의 타자를 증오하는 모든 형태"(358~359쪽)가 인종차별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한다. 즉 성차별, 동성애차별, 종교차별 등 다른 종류의 차별과 일맥상통하며 서로 쉽게 전화한다는 것이고, 그 근원에 인종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종차별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모든 종류의 차별을 타파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종차별은 모든 차별의 원형이고, 인권문제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종차별의 역사적 기원이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사실상 인종차별에 대한 대응이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야만을 경험한 후 존엄한 인간이 다시는 이러한 일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모든 나라가 동의한 합의서가 바로 세계인권선언이었다. 그래서 종교, 인종, 국적을 초월해서 전 인류가 동의할 수 있는 핵심적 내용을 선언에 담고자 했다.
세계인권선언이 "모든 사람"(all human beings)을 주어로 삼아 이 모든 사람이, 즉 인종, 형통 등과 무관하게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졌다는 제1조와 인종, 피부색, 종교 등과 무관하게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규정하는 제2조에서 출발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유엔은 그 후속조치로 1966년 자유권규약과 함께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을 채택함으로써 인종차별의 철폐야말로 인류의 절체절명의 과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요즘의 국제동향은 인종차별이 단순히 '표현'에 그쳤더라도 강하게 단죄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종차별의 발호를 초기에 잡지 않으면 쉽게 확산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미 자유권규약(20조 2항)에서는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를 금지하고 있으며, 인종차별철폐협약(제4조)에서도 "인종차별을 촉진하고 고무하는 조직과 조직적 및 기타 모든 선전활동"을 분명한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 자체를 금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와 충돌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지만, 앞으로도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표현 자체를 금지하려는 흐름은 계속 확대될 것이다.
이러한 노력애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인종차별은 여전히 위협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짧은 생애주기를 가진 인종차별의 사상도 현대의 발달된 과학기술과 결합하면 쉽게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종차별이 고대로부터 존재했지만 인종차별로 인한 대형 참사는 주로 20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인터넷 등 발달된 소통도구를 통해 차별적 편견이 쉽게 확산되고, 대량 살상 무기가 개발되면서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길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비극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20세기 초반 홀로코스트였고, 그 이후에도 캄보디아, 동티모르, 구 유고슬로비아, 르완다 등지에서의 대량학살로 이어졌다.(15장)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인종에 대한 '혐오'과 '편견'은 언제라도 이런 비극적인 참사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시민의 힘에 주목한다. 평범한 시민이 "정치적 책임자를 민주적으로 교체하는 것"(360쪽)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인종차별을 비롯한 모든 종료의 차별과 편견이 싹틀 수 없게 하려면 전방위적인 반차별/인권 존중의 이행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반차별/인권 교육을 강화하여,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지시켜야 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점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인종차별은 잘못된 믿음이라고 아무리 되풀이해서 말해준다고 해도 그들은 문제의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인종차별주의가 자기한테 정말로 필요 없게 될 때에만, 즉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덮친 어려움들을 직면하고, 또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만 인종차별주의를 포기할 것이다." (24쪽)
<인종차별의 역사>가 수차례 강조하듯이 차별과 혐오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학습을 저지하는 기제들을 지역사회, 학교, 회사, 개별 커뮤니티 등 인간이 모이는 모든 곳에서 작동하게 해야 한다. 가장 원칙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인간이 항상 서로를 인격체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민주적 연대 속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학교에서 학생이 삶의 주체로 존중받는 학교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게 하고,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인격적인 주체로서 존중받는 작업장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한다면, 차별과 혐오는 자신이 기생할 숙주 자체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더 많은 인권, 더 많은 민주주의를 사회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종차별을 비롯한 모든 차별과 편견의 준동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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