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이 아닌 일반적 라틴 아메리카인도 우애와 연대의 가치를 잘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문화와는 너무나 다른 소위 '타자' 또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원주민 문화를 무의식적으로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주민 문화라고 하면 다큐 프로에서 보는 실제로 옷을 거의 벗은 원주민들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렇지 않고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주류를 이루는 혼혈인 '메스티소' 대중이 가지는 집단 무의식의 '깊은 문화'를 가리킨다.
쉽게 이야기 한다면 이들 대중의 '깊은 문화'는 유럽 세력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소위 좌파로 불리는 나라들의 급진적 혁명 또는 개혁의 힘은 바로 이들 나라의 대중의 '깊은 문화'가 현실적으로 표층으로 올라온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개혁 진보 세력의 지식인들이 자주 주장하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힘'이 추동한 것이 아니다.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이런 '깊은 문화'는 그들의 일상문화와 정치 문화에서 "정동"(감정과 정서의 움직임이 개인적 집단적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에 민감하게 만들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포퓰리즘이 성행하게 된 문화적 맥락이기도 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연대하여 조합 등을 잘 조직하고 사회 운동도 활발하게 하는 것도 이런 "정동"의 능력 때문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의하면 정동이 "행동할 능력"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틀 안에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게 만드는 능력은 정동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말로 "정동"은 감정이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로 "정동하다" 또는 "정동되다" 로 번역되는데 스페인어로 "afectar"이다.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에서 책을 선물할 때 우리는 "혜존"이라는 한자어로 표현한다면 그들은 "Con mucho afecto"라는 표현을 통해 고마움과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더라도 대부분 인사를 한다. 우리는 아는 사람만 한다.
이런 미시적 사회관계의 형성이 민주주의 발전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질"이 아니라 "삶의 결"이 부드러운 사회가 풍요롭고 존엄하고 여유 있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내가 늘 생각해오는 문제이지만 얼마 전부터 자전거를 권장하고 자전거 길을 만드는 것은 좋지만 인도를 뚝 반으로 잘라서 자전거 길을 만들어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수시로 지나가므로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늘 불쾌감과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개인 중심의 이기적이고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유럽에서 태동한 근대 경제학의 기본 전제에 비추어 보아 라틴 아메리카인의 우애와 연대의 문화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가 라틴 아메리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현대적, 도시적, 유럽 중심적 소비 위주의 문화와 이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적 연대의 문화가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시에 병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담론이 필요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지배 계급이 극우적 또는 수구적이지 않고 자유주의적 가치를 19세기부터 내면화한 것도 또 다른 중요한 맥락이 될 것이다. 지배하고 있는 나라의 국민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방향으로 통제 또는 통합하려고 지나치게 애를 쓰고 있지 않는다고 할까? 식민지 시대부터 지배 계급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일까? 혹은 가난한 대중으로 표현되는 피지배 계급의 저항과 독립의 기운이 워낙 강해서일까?
▲ 2008년에 에콰도르는 개정 헌법에 우애와 연대에 기반을 둔 "좋은 삶" 철학을 넣었다. ⓒ교육방송 |
얼마 전 교육방송(EBS)에서 만든 다큐 프로그램 <안데스> 6부작을 본 일이 있다. 이 다큐와 함께 생각해 볼 것은 2008년에 전면적으로 개정된 에콰도르의 헌법에 "좋은 삶"의 비전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에콰도르에서는 현재 근대적 삶의 방식과 병행하여 원주민 문화와 철학에 담긴 우애와 연대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정치 철학의 기초로 제도적, 현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유토피아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안데스>의 제6부는 에콰도르의 원주민들이 많이 사는 오타발로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원주민들이 어떤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근대성과 "좋은 삶" 철학이 병행하는 예로 오타발로 텔레비전의 앵커가 두 명인 것을 들 수 있다.
스페인어로 앵커가 보도를 하고 나면 원주민 여자 앵커가 케추아어로 같은 보도를 또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오타발로의 젊은이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에 나가 진출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 중에서 사업에도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이 해외에서 획득한 아이디어를 우리 같으면 당연히 가족에게 우선 전해줄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고향의 공동체를 위해 아이디어를 내놓아서 같이 이익을 얻는다는 내용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외에 우리 어린 시절의 먼 향수를 자극하는 예로 원주민들의 결혼식에 동네 사람들이 축의금을 내는 대신에 십시일반 계란과 밀가루, 설탕가루 등을 머리에 이고 들고 오는 모습,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 특히 지나가는 걸인에게도 정성껏 대접하는 모습 등등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기르는 가축에게도 늘 감사하는 모습 등등. 이런 삶의 방식이 바로 이 글 제목에 걸린 "좋은 삶(Buen Vivir)"의 방식이다.
"좋은 삶"을 에콰도르 원주민의 언어인 케츄아어로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라고 한다. 케츄아어는 에콰도르와 페루에서 주로 많이 쓰이고 있고 볼리비아에서는 아이마라어가 많이 쓰이고(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아이마라 족이다) 파라과이에서는 과라니어가 쓰이는 데 모두 이런 나라들의 원주민들은 "좋은 삶"의 철학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공동체적 우애와 연대의 문화를 이야기하면 우리 사회도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과연 "지금, 여기"의 우리 사회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아마 많이 없을 것이다. 잘 아는 사람의 관혼상제에 축의금 또는 부의금을 내는 전통은 아직 남아있을지라도 일반적인 사회관계와 권력관계의 잔인함과 폭력성은 우리가 너무도 자주 접하고 있지 않은가?
"수막"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이 지구의 완전히 아름답고 이상적인 실현"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철학을 주목해야 한다.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유럽 문화가 가지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생명 중심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근본적인 인식론적 전환이다. 석유 고갈과 생태 위기, 핵 발전의 위기 앞에서 "좋은 삶"은 에콰도르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인들 아니 전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이자 풍부한 상상력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철학은 흔히 이야기되는 자연을 보존하면서 성장을 지속하자는 "지속 가능한 삶"의 비전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카우사이"는 "풍요롭고 존엄한 선한 삶"을 의미한다. 영성적 가치가 담겨있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유럽 중심적 성장 또는 발전, 경쟁위주의 삶의 방식이다. 이런 흐름이 극단화 된 것이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체제'임은 물론이다. 우리 사회가 맹렬하게 매달려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에콰도르는 1970년대 초부터 원주민의 권리가 점차적으로 존중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90년에 원주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하면서 그들의 권리가 확보되고 정치지형에서 원주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현재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며 2007년에 집권했고 최근 재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집권하자마자 가지고 있던 로드맵에 따라 제헌의회를 조직하여 2008년에 새로운 헌법을 공포한다. 헌법 전문과 헌법 전체를 통틀어 "좋은 삶" 철학이 아주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다.
이 철학이 뛰어난 점은 자신의 철학만을 독단적으로 최고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것의 복수적 공존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에콰도르의 새로운 헌법은 원주민 철학과 문화 외에 기존의 유럽 중심적 근대성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복수 국민 국가"를 헌법에 명기하고 있다. 단일 국민 국가의 패러다임을 깨뜨리는 것이다.
"좋은 삶" 철학은 일인당 국내 총생산(GDP) 등의 성장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와 소외 없는 "함께 잘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헌법 전문과 제 275, 276, 278, 281, 283, 321, 334, 335조). 시민의 의무보다는 권리와 정의가 강조된다. 헌법에만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2009년부터 5개년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하위 법률인 '사회적 연대 경제법'을 통해 우애와 연대의 조합 운동이 추진되고 있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독립 관청이 세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성취를 엘리트 지식인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아오던 원주민 대중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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