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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벨 경제학자는 '창조 경제'를 "헛소리"라 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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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벨 경제학자는 '창조 경제'를 "헛소리"라 욕했나?

[기고] 창조 경제와 '돈이 도는 경제 민주화'

창조 경제와 '돈이 도는 경제 민주화'

얼마 전 201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토머스 사전트 교수가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를 듣고 "헛소리(bullshit)"라는 짧은 코멘트를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이른바 주류 거시 경제학의 '대가'로 알려진 경제학자이고, 작년(2012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우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창조 경제가 가지고 있는 천박함을 느끼는 수준도 달라지겠지만. 사석에서 한 소리이니 이걸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집권당에서 모셔온 경제학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참 창피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나는 한때 이런 경제학자들이 쓴 책을 가지고 경제학 공부를 했던 적도 있다. 물론 한 과목 정도였지만.

새 정부의 국정 과제를 관통하고 있는 창조 경제를 이전의 '국민의 정부'나 '참여 정부'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창조 경제를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돈이 도는 경제 민주화'를 곳곳에 내걸었으니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우선 창조경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인 것은 벌써 소문이 돈 것 같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만 빼고 말이다. 그래도 여기에 어떤 내용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과거(2006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그렇게 외치고 다니던 '창조 경영'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명박 정부 시절 '기업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라는 구호를 살짝 바꾼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게 한다.

▲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토머스 사전트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cla.umn.edu

원래 창조 경제란 말은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 시절의 정책 어젠다 가운데 하나로서 정부가 DCMS(Department of Culture, Media and Sport)같은 정부 기관을 만들어 이른바 창조 산업(Creative Industry)을 본격적으로 육성하려고 하면서부터 출현한 용어이다. 여기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존 호킨스는 창조 경제에서 출발하여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육성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으로 창조 산업을 구체적으로 선정하여 창조 경제의 규모와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2012년 12월에 발간된 <A Dynamic Mapping of the UK's Creative Industries> 보고서에는 영국 전체 창조 경제 규모와 경제적 파급 효과에 대해서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2010년 보수당 정권으로 바뀐 후에도 이와 같은 정책적 기조는 계속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창조 경제를 위하여 창조 산업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어떤 정책과 제도가 필요한지를 분석하고 제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창조 산업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 측정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꽤 오랜 기간 논쟁도 진행 중이다.

여기서 창조 경제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참신한 창의성에 기반을 두고 나온 아이디어를 경제적 가치가 있거나, 거래 가능한 상품/서비스의 단계로 구체화하는 모든 활동 매커니즘"으로 정의되어 있다. (<Creative Economy : How People Make Money from Ideas>(John Howkins 지음, Penguin Press 펴냄))

이런 것이 창조라면 과연 창조와 혁신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잘 알다시피 혁신에 관해 조지프 슘페터라는 경제학자는 제품, 원료, 공정, 시장, 조직에서 생기는 새로움을 혁신으로 유형화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 중에서 기존 것들의 새로운 결합(new combination)을 통한 창조에 더 큰 무게를 두었다.

그리고 이후 지식의 중요성, 특히 지식의 암묵적(tacit) 성격과 네트워크화가 중요해짐에 따라 꼭 정보가 많이 있다고 혁신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호킨스의 책으로 다시 돌아가 "창조는 새롭지 않고 경제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결합시켜 특수한 가치와 부를 생산해내는 것"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가 슘페터가 말한 혁신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혁신과 창조는 동일한 것을 단순히 말만 바꾼 것인가? 노무현 정부 시절의 화두가 '혁신'이었다는 것 때문에 새 정부에서 혁신이라는 말을 다 없애려는 시도 가운데 탄생한 것이 바로 '창조'라는 개념이다, 라는 주장도 있을 법하다. 실제로 정부가 바뀌면 뭔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그리 틀린 말이 아니라고 보면 두 용어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분명한 것을 혁신과 창조는 서로 배타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혁신이라는 말 대신 굳이 창조라는 말을 쓰려고 한다면, 창조와 혁신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창조라는 개념을 단순한 구호가 아닌 국정을 관통하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창조라는 개념이 기존의 혁신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창조라는 개념 속에 협력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로 기업이 주도했던 기존의 혁신이 대부분 개별적인 것이었다면 창조는 협력과 네트워크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지적 결과물을 창출해 내는 오픈 콜라보레이션(open collaboration), 집단 지성,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 등에 입각한 새로운 사업 영역이나 경제 활동에 대한 높은 관심은 이러한 차이를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공유 경제, 협동조합에 대한 높은 관심도 동일한 맥락이다. 창조의 이러한 협업적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환원적 개별주의나 경제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두 번째는 창조라는 개념이 기존의 혁신 개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혁신의 가장 중요한 주체인 기업의 경영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기존의 혁신 개념이 의존하고 있던 기업경영의 금과옥조는 바로 단기 금융 수익과 주주 이익 극대화였다. 창조 경제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스티브 데닝 같은 사람은 기업들이 단기 주주 가치 극대화에 입각하여 기업을 경영할 경우, 기업의 다른 이해당사자(stakeholder)인 노동자들이 창조적 재능을 온전히 발휘하거나 소비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될 것이고, 따라서 지속적인 혁신을 꾀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현재와 같은 자본 과잉 상태에서 자본 수익률이 점차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자본 수익에 더 이상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따라서 창조 경제를 위해서 기업과 같은 민간 부문은 주주 가치 극대화라는 망령에서 벗어나 소비자 가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정부는 대공황 때 그랬던 것처럼 투자를 늘리는 일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회 기반 시설, 기술, 교육에 대한 방대한 투자가 필요하며, 어떤 경제에서도 일자리 창출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 기사 : Is the US in a phase change to the creative economy?)

세 번째, 창조 경제가 가능하려면 교육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여 창의적인 인재를 육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부가 시장 규칙을 준수할 수 있게 하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또 필요한 곳에서는 규제도 하고, 규칙을 지키지 않은 기업들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 민주화의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국정 과제의 최우선으로 경제 민주화를 내세웠던 박근혜 정부는 '돈이 도는 경제 민주화'라는 미명 하에 이러한 점들을 덮어버리려 하고 있다. 돈이 돌게 하려면 경제 민주화가 기업 활동을 '과도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을 바로잡고 정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티글리츠의 지적처럼 결국 문제는 시장이나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여기서 '정치'란 박근혜 대통령의 말대로 '국회에서 알아서 할 일'이 아니며, 방미 기간 중에 댄 애커슨 제너럴모터스(GM) CEO의 불만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식의 소통도 아니다.

더구나 '격'이 맞지 않는다면 소통을 불통으로 만들어버리고, '과거'를 들춰내서 정치적 대립과 국론 분열을 조장하여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정치의 핵심은 경제의 게임 규칙을 정하고,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엄정하게 벌칙을 부과하는 경제 민주화여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경제 민주화는 '돈이 도는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이 너무나 커져버린 재벌들이 중심이 되어 온갖 특권과 '갑'의 횡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기득권을 약화시키고, 탐욕을 휘두르는 '살찐 고양이'들과 부자들의 지대 추구 행위를 막는 것이다.

또 이 부를 통해 새로운 기득권을 만들어 내거나 강화시키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라야만 돈이 제대로 골고루 돌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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