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바탕으로 무슨 다른 작품을 써낸다거나 혹여 소설을 능멸하려는 의도 따위는 애초에 없다. 나는 다만, 한 작가가 만들어낸 몇 가지 소스를 가지고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를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왜? 일단은 의도도 목적도 없는 사소한 놀이 충동에 불과하다고나 대답해 둔다.
▲ <망친 책,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여름언덕 |
작가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건 다음 문제다. 보다 신실한 독서는 한 권의 책이 내포하거나 암시하는 여러 다른 맥락들을 스스로 발견해 자신만의 맥락 안에서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이끌어내는 데 있다. 어떤 책에 대한 평가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저명한 작가의 책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수용하거나 동의하는 자세부터 취하는 건 그런 점에서 (조금 극언을 하자면) 독서의 궁극적 의미를 스스로 훼손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망친 책,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는 바로 그러한 창조적 독서의 한 도발적 양태를 부추기고 제안하는 책이다.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이라는 책으로 이름을 알린 프랑스 출신의 작가다. 개인적으론 처음 접하는 이름인데, 이력을 훑어보자니 문학작품에 내재한 여러 다양한 독법의 가능성들을 물고 늘어져서 기존의 해석틀을 변형시키거나 해체시키는 작업을 주로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언급하는 책 <망친 책,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또한 마찬가지 맥락으로 이해된다.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아울러 소위 '대가'라 불리는 이들의 작품들 중 실패작이라 불릴만한 작품들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며 그들이 왜 그러한 오류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들을 요모조모 밝혀내고 있다. 짐짓 모종의 선정성을 겨냥한 비틀기나 흠집잡기로 여겨질 공산도 있지만, 여러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튼튼한 논리와 확신에 찬 어조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흥밋거리를 과장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니라는 신뢰가 생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들쑤시는' 작가는 조아생 뒤 벨레, 피에르 드 롱사르, 피에르 코르네유, 몰리에르, 볼테르, 장 자크 루소,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빅토르 위고, 기 드 모파상, 마르셀 프루스트, 르네 샤르, 장 지오노,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이다. 가히 프랑스 문학계의 '명예의 전당'에서 레드 카펫을 짓밟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김시습, 박지원 등에서부터 현대의 서정주, 김수영, 황석영 등을 한데 몰아 날을 벼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 '무시무시한' 이름들에 난도질을 가하거나 위의를 깎아내리기 위해 이 책을 쓴 건 아니다. 서문에서 눈에 밟히는 다음과 같은 언술은 그러므로 조금 더 섬세한 이해가 필요하다 여겨진다.
"성공한 작품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전통 비평은 자신의 판단을 표명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텍스트의 심층 내지 의미론적 복합성의 이미지들에 심취하는 반면, 실패에 관심을 갖는 이 비평은 진부한 것과 공소空疎한 것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전통 비평은 대개 작품을 예찬하고자 애쓰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비평은 무엇보다도 우선 작품을 비방하고 훼손하려 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칭송하는 목소리들의 반대편에서 고의로 비방하는 것의 필요성을 주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단순히 '비방' 자체에 방점을 두고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저자가 인용하는 작품들은 아주 유명한 작가들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이다. 그 작품들이 유명해질 수도, 가치를 가질 수도 없었던 구체적 요인들에 대한 점검을 통해 저자는 글쓰기의 방법과 목적을 제고하고, 그를 통한 보다 적극적인 독서의 방법론적 의미를 제안하는 데 더 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나름 유쾌하고 재미있는 '공부'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저자는 실패를 낳게 되는 요인들을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눠 설명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첫째는 '주제'의 측면, 둘째는 '장르'의 문제, 셋째는 '저자 그 자신'이다.
가령, 빅토르 위고의 시 '신'은 주제 자체의 모호함과 언술 불가능한 측면을 적시하지 못한 위고의 실수가 전면적으로 드러난 경우이고, 롱사르의 '라 프랑시아드'와 볼테르의 '라 앙리아드', 샤토브리앙의 '순교자들' 등은 내용과 정합하지 않는 고대 서사시 형식의 잘못된 변용으로 실패하게 된 케이스다. 그리고 르네 샤르의 '원조 방앗간'은 시인이 자신의 진면목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해 불구가 되어버린 경우다.
저자는 모든 실패작들엔 이 주요한 세 가지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작가의 무기력과 얕은 계산이 들통 나는 것이라 분석하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보다 세밀하고 첨예한 사례들이 묘한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자신의 논리에 스스로 힘을 받기라도 하는 듯 더 신랄해지는 어조는 나름 통쾌한 맛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문제는 다시 책을 어떻게 똑바로 읽을 것인가, 에 대한 본원적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어떤 문학 바운더리 안에서 흔하게 재연, 반복되는 거장들에 대한 칭송은 그들의 피치 못할 그늘이랄 수도 있을 실패작에 대한 함구와 방관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기 마련이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우상숭배'는 프랑스든 한국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한다. 이 책의 저자가 궁극적으로 의도했던 바가 그 지점만은 아니라 하더라도, 소위 명성과 위엄이라는 것이 독서에 어떤 부작용을 낳고 한 작가를 신비로 치장하는지에 대한 문학적 재고는 어느 시대에나 불가피한 일이다. 그건 한 작가를 매도하기 위해서도, 그럼으로써 그 비판자의 삿된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시대의 거장이 썼든, 어느 변방의 무명작가가 썼든 문학작품의 위의와 가치는 결국 그것을 읽는 사람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 끊임없이 갱생되고 변화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어쩌면 문학 전통에 대한 얄궂은 도발이라는 가십거리와도 무방하고, 저자 자신의 재기발랄한 재능 발현을 즐기는 것에서도 더 나아간 지점에 있다. 관건은 결국 지금 책을 펼치고 있는 당신과 내가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내느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모든 걸작들이 좁은 방 한 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을 이유도 명분도 부질없어진다. 당신은 어떤 책을 펼치고 있는가. 그 안에서 당신은 누구의 얼굴을 향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 피에르 바야르. ⓒ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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