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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메시지"라 했던 그 외계인의 종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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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메시지"라 했던 그 외계인의 종말은…

[프레시안 books] 더글러스 코플런드 <맥루언 행성으로 들어가다>

20세기에 산업화된 국가들을 중심으로 기술적 미디어가 학문적 관심으로 떠오르게 된 맥락을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단 그것은, 19세기부터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연이어 개발되고 극히 단시간 내에 상용화되어 일상이 급변하는 경험이 누적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미디어라는 특정한 기술적, 문화적, 사회적 영역을 연구하는 하나의 분과 학문이 성립하기 전에, 먼저 '기술'이 '인간'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하는 개인들이 생겨났다.

이때 '기술'은 바퀴에서부터 전력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지목될 수 있었고, '인간'도 인간 개체의 생물학적 육체에서부터 인류 문명 전체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로 규정될 수 있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인간의 산물인 기술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이것이 미디어 이론의 질문이었고, 그 이면에는 불안과 열광의 정념이 깔려 있었다.

▲ <맥루언 행성으로 들어가다>(더글러스 코플런드 지음, 김승진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기술에 대한 관심이 언제나 불안을 동반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 초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인쇄, 화약, 나침반" 같은 기술적 발견이 인류의 역사를 얼마나 크게 바꾸었는지 찬탄하면서, 인류가 과학과 기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전시키면 언젠가는 우주 만물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라는 베이컨의 비전은 단 몇 세기만에 기묘하게 고쳐 쓰였다. 인간 자신이 '자연'의 일부로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고, 더 나아가서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가 진화/진보라는 역동적인 변화의 프레임 속에서 고려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초부터 20세기까지, 인간 중심적인 목적론적 역사철학과 인간을 탈중심화하는 진화론적 세계관은 서로 충돌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상호 합성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도구적으로 받아들여서—우생학처럼 생물학적 진화를 특정한 방향으로 촉진한다거나, 사회진화론처럼 적자생존의 자연선택을 적극적으로 사회 내부에 도입하는 식으로—목적론적 역사철학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환경과 개별 생체의 상호 의존적 변화에 주목했던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의 접근법에 관심을 가졌다. 생물학계에서 라마르크주의는 19세기 중반에 다윈이 등장하면서 사실상 폐기된 이론이었다. 그렇지만 물리적 '환경'이 단순히 생물의 작용을 받는 수동적 배경이 아니라 생물체와 상호작용하면서 그에 구체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라마르크의 생각은, 20세기 초에 기술적으로 급변한 환경에 적응한 (또는 적응하지 못한) 현대의 인간에 대한 일종의 민족지학적 연구가 개진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연구'는 다분히 사변적이었지만, 새롭게 주어진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동기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기술을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 인간을 "보철물 달린 신"에 비유하면서 그 불안정성과 기이한 성격을 사색했다. 문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인간이 축조한 제2의 자연이자 새로운 인간의 발원지로서 도시 환경이라는 수수께끼의 공간을 탐험했다. 전쟁과 공장, 철도와 영화, 각종 신기술이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을 향한 미지의 입구로서 열광적으로 고찰되었다.

기술이 경험적 차원에서, 인간의 외부에서 단순히 발명되거나 사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을 에워싸고 그 내부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말하자면 선험적 차원을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작용이 여지껏 별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류의 미래를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인일 수 있다는 생각. 여기에는 확실히 열광이 있었다. 그러나 불안도 교차했다. 기계적으로 구동되는 새로운 도시 환경에 라마르크적인 '환경' 개념이 더해진 결과, 물질적 세계는 어떤 동인(動因), 심지어 어떤 생기를 획득했다. 인간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을 산출하는 것으로서, 세계는 '다시' 인간을 지배하게 된 것 같았다.

이런 프레임 하에서 미래를 건설한다는 것은 일단 환경을 통제하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환경을 통제한다는 것은 그 환경 속에서 산출될 미래의 인간을 미리 규정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하여 진화론은 다시 한 번 목적론적으로 봉합되었다. 이러한 접근은 20세기 전반기 유럽에서 예술과 정치, 건축과 기술을 통틀어 어떤 '혁명적 전위,'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진화론적 전위'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일련의 흐름을 낳았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 번의 대공황이 유럽을 뒤흔들면서 현재를 돌파해야 할 동기는 오히려 더 강해졌고, 실패한 계획안은 금세 또 다른 계획안으로 대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체제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됨에 따라, 이렇게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전전(戰前)의 경향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산발적으로 누출되거나 재발견되거나 또는 반복되면서, 20세기 후반기에 미디어 이론과 미디어 아트, 그리고 다시 '뉴' 미디어의 이론과 예술로 이어져 나갔다.

자, 서론이 길었다.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은 이러한 계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이미 여러 분야에서 통용되었던, 그러나 일반에—특히 유럽 대륙 바깥에—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던 어떤 관점을 1960년대에 하나의 학제적 학문 또는 인류 역사의 대통일 이론으로 종합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모든 기술은 미디어로서 (마치 텔레비전처럼) 인간을 '향해' 작용하며, 그것이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해온 인류 역사의 숨겨진 반쪽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반쪽 또는 반작용의 영역을 마저 이해해야만 인류가 기술에 휘둘리며 고통 받지 않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이미 세상에 뛰쳐나온 기술을 다시 밀어 넣거나 그 영향을 차단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라는 베이컨의 말은 이렇게 뒤집힌다. '우리는 기술에 복종함으로써만 기술을 지배할 수 있다.'

▲ <미디어의 이해>(마셜 맥루언 지음, 김성기·이한우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맥루언은 미래주의자라기보다는 역사가 또는 기껏해야 교육 개혁가였고, 기술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기술 혁신이라는 '폭탄'을 던지는 대담한 발명가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맥루언은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 심지어 새로운 인간을 상상했던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수호성인"으로 떠받들어졌다. 하지만 그들에게 '마셜 맥루언'은 결국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알쏭달쏭한 문구나 "모든 것은 미디어의 문제다"라는 기계적인 기술결정론의 동의어, 또는 미디어 분야의 '앤디 워홀,' 어쨌든 뭔가 쿨하고 괴짜 같은 '우리 편'의 선구적인 유명인사 이상의 대단한 의미는 없었다. 그래봤자, 결국 옛날 사람이니까.

캐나다 소설가 더글러스 코플런드(1991년 데뷔작 로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캐나다 작가.-편집자)가 쓴 <맥루언 행성으로 들어가다: 마셜 맥루언의 삶과 미디어 철학>(김승진 옮김, 민음사 펴냄)은, 대략 1970년대부터 시작된 디지털 미래주의가 정점을 찍고 서서히 위축되던 2000년대 후반에 <캐나다의 위인들(Extraordinary Canadians)>이라는 논픽션 시리즈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저자인 코플런드도 맥루언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작업 의뢰를 받기 전까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하니, 모국인 캐나다에서도 맥루언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아닌 모양이다.

코플런드의 맥루언은 기묘할 정도로 역사와 단절되어 나타난다. 그는 캐나다의 대평원에,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 가톨릭적 가치관 속에, 기형적인 뇌 속에 갇혀 고립된 개인이다. 그처럼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맥루언은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외부 세계를 낯설게 바라본다. 그는 몇 개의 우연들, 몇몇 모더니즘 작가들과 대도시의 동료들이 주는 생산적인 자극에 힘입어, "맥루언 행성"의 외계인으로서 이 지구 문명에 대한 번득이는 통찰을 내놓는다. 사람들은 외계인에 환호하지만, 금세 외계인을 버린다. 그는 병들고 잊힌다.

이것은 그 자체로 썩 재미있는 이야기다. 20세기의 캐나다는 낯설고 이국적인 무대를 제공하며, 맥루언은 독특하고 조금은 연민을 자아내기도 하는 흥미로운 캐릭터로 그려진다. 미디어 이론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맥루언과 토론토 학파를 둘러싸고 있었던 가톨릭의 영향을 곱씹어보는 것도 유익한 경험이 될 것이다.

다만 맥루언의 동료들,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그가 읽었던 책들에 대해 너무 적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조금 아쉽다. 아무리 대중적인 전기라도, 어쨌든 학자였던 사람의 일생을 그리면서 그의 학문적 생활을 적당히 넘겨버리는 것은 부당하다. 맥루언을 중심으로 구대륙의 이전 세대 학자들과 신대륙의 선구자들, 그리고 동세대 인물들과 그 다음 세대 사이에서 벌어진 상호작용들을 더 구체적으로 해명할 수 있었다면 한 명의 학자로서든 하나의 현상으로서든 '마셜 맥루언'을 더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싫은 소리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맥루언 행성으로 들어가다>는 '맥루언을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러니까 애초에 이 책을 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답을 주지 못한다. 저자는 맥루언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정확하게 예측한 대단한 인물이라고 몇 번이고 말한다. 당시에는 맥루언이 너무 선구적인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특히 학계의 반발을 샀지만 지금 우리는 맥루언이 옳았음을 바로 안다는 것이다.

의심스럽지만 이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세상에 이미 실현된 예언만큼 재미없는 것이 있을까? 맥루언의 책이 신통방통한 예언서일 뿐이었다면, 그가 예언한 세계의 원주민인 우리가 저 불완전한 과거의 예언자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맥루언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예언했다고 거듭 단언하면서도 좀처럼 맥루언이라는 인물에—그의 말과 행동에—동조하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여서 조금 재미있었다. 그는 자신과 맥루언 사이에 가로놓인 반세기의 거리를 좀처럼 가로지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어쩌면 그것이 저자 개인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미디어 이론은 그 자체가 역사의 소산이었다. 그것은 19세기와 그 이전으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20세기의 현상이었고 그 시대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의 충격에 대응하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기술의 충격을 설계하는 지난 세기의 독특한 방법론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방법론은 새로운 세기와—충돌하지조차 않고—미끄러져 버리는 것 같다. 여기서 '이것을 구제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은 조금 잘못된 질문이다. 아마도 더 적절한 표현은 '우리가 아직도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가 될 것이다. 어려운 질문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이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보는 동안, 베를린 트랜스미디알레 2014는 "잔광(Afterglow)"이라는 주제어를 발표했다. "디지털 혁명은 또 다시 끝났고 이번에는 '당신이' 패배했다. 혁명이 휩쓸고 간 황무지 속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음울한 이미지다. 나는 어쩌면 저 잔광이 오히려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결국 미디어 이론의 키워드는 "기술"과 "인간"이었다. '기술이' '인간을' '향합니다'라는 저 세 개의 말뭉치가 절대로 아무 문제없이 매끈하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미디어 이론을 추동했다. 그것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질문이고 어쩌면 언제까지나 열린 질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해방되고자 했던 인간의 오랜 소망을 반영하고, 그 자기 해방의 기획에 가로놓인 한계와 모순들을 직시하고자 했던 부단한 노력을 함축한다. 지난 세기의 잔광이 걷히는 새로운 세기의 어스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너무 잘 적응해 버린 것이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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