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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가 악당인가, '돈'의 복잡한 얼굴!

[프레시안 books] 제프리 잉햄의 <자본주의 특강>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이는 현대 사회 또는 경제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말 중의 하나이다. 사실 자본주의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것 같다. 그 전에는 '산업사회'나 '시장경제'와 같은 말들이 훨씬 더 많이 쓰였고, 사실 '시장경제'는 여전히 자본주의보다 더 많이 쓰이는 듯하다.

각각의 말은 현대 사회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핵심으로 짚어 낸다. '시장경제'라는 말로 현대 사회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여러 자원들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고 수요-공급의 가격 메커니즘에 의해 배분되는 것을 현대 사회의 핵심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란 말은 현대 사회의 어떤 부분을 핵심으로 지목할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자본' 그리고 '자본의 지배'를 현대 사회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자본이란 무엇이고 자본의 지배란 무엇일까? 자본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그것이 '이윤'이라는 이름의 불로소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의 지배란 그러한 이윤 추구를 위해 사회 전체가 조직되고 운영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즉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윤을 낳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합의된 이론은 없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자본도 여러 가지로 정의된다.

우선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러나 '자본주의'란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주류 경제학 교과서들은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토지, 노동과 더불어 자본을 생산의 3요소 중의 하나로 파악한다. 여기서 자본은 그 자체 생산성을 가진 생산 수단, 즉 '자본재'라 불리는 시설, 설비, 도구, 부품, 원재료 등을 가리킨다. 하지만 1960년대에 영국 캠브리지 대학과 미국 MIT 대학 소속의 경제학자들이 벌인 논쟁에서 밝혀진 것처럼, 자본재의 생산성(자본재가 생산에 얼마만큼 기여하는가)은 현실에서는 계산할 수 없는 허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 수단 그 자체를 이윤의 원천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다음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개념을 보자.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자본가)이 시장이라는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해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이들(임금 노동자)을 최대한 착취함으로써 이윤을 얻는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자본은 단순히 생산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으로 특유한 사회관계, 즉 생산 수단의 소유 관계이고 핵심은 그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다. 자본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노동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통해 이윤을 산출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은 고전파 경제학과의 대결 속에서 고전파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과 '노동'을 매개로 한 사회관계의 분석에 집중한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게도 생산 수단에 국한되어서만 쓰지 않는 우리의 일상적인 '자본' 개념과 괴리가 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자본이란 이윤을 '창출'하는 자산 일반을 가리키고 여기에는 생산 수단 뿐만 아니라 ('인간 자본', '사회 자본'과 같은 신조어들은 차치하고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궁극적인 척도인 화폐, 그리고 화폐로 쉽게 전환될 수 있는 증권, 채권, 파생상품 등의 금융 수단들이 포함된다. 실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주경철 옮김, 까치글방 펴냄)에서 역사학자 브로델은 자본이라는 말이 본래 생산 수단 이전에 사업 자금을 가리켰다고 밝히고 있으며 자본에 '생산 수단'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진 것은 18세기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는 생산 수단과 생산관계 편향을 벗어나 그 화폐·금융적 측면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금융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현대의 신자유주의 금융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제프리 잉햄의 <자본주의 특강>(홍기빈 옮김, 삼천리 펴냄)은 그 자신 화폐 연구의 권위자로서, 자본주의에서 신용화폐와 금융이 차지하는 역할과 중요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1.
▲ <자본주의 특강>(제프리 잉햄 지음, 홍기빈 옮김, 삼천리 펴냄). ⓒ삼천리
잉햄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화폐, 금융 및 통화제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투쟁이 있다. 자본주의에서 화폐, 금융 및 통화제도가 핵심적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장에서 가격 메커니즘에 의해 자원이 배분되기 위해서는 신뢰할만한 지불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화폐는 그러한 지불 수단의 역할을 한다. 둘째, 기업의 비용과 이윤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화폐라는 계산의 단위가 확립되어야 한다. 셋째, 생산이나 금융투기에 투자되는 화폐자본은 은행기업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생산되는 대부에 의해 창출된다. 이전에는 작은 규모로만 존재했던 기업, 임노동, 시장교환이 경제 전체에 일반화된 것은 화폐라는 지불 수단이자 계산 수단이 은행제도를 통해 대량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85~86쪽)

그렇다면 화폐란 무엇인가? 화폐란 스미스에서처럼 실물경제를 거울처럼 비추고 그 자체로는 경제에 아무런 영향도 안 주는 '중립적 베일'이나 상품교환을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생산과 배분은 권력에 기초하고 있고 여러 사회적, 경제적 행위자들 사이의 투쟁은 화폐에 가치변동을 일으키고 그들 사이에 이익과 손해를 배분한다. 국가와 자본의 '동맹'으로 제도화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현대의 자본주의적 신용화폐의 가치의 변동은 이를 매우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화폐가 중립적이지 않고 편파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화폐가 상품이나 교환 수단이기 이전에, 국가와 자본의 청구권 또는 채권-채무 관계, 즉 사회적 부와 권력관계를 계산하고 표현하는 지불 수단인 데서 기인한다. <자본주의 특강>의 화폐에 대한 논의(4장)는 너무 간략하기 때문에 같은 저자의 <돈의 본성>(홍기빈 옮김, 삼천리 펴냄)과 기타 자료를 참조하여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화폐는 일차적으로 교환 수단이 아니라 "채무를 변제하는데 쓰이는 '청구권' 또는 '신용'"(또는 채권)이다.(106쪽) 잉햄에 따르면 화폐는 귀금속과 같은 상품이 교환의 매개체가 됨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라 채무를 계산하고 청산하기 위해 생겨났다. 화폐의 기원은 청구권 또는 채권-채무 관계를 나타내는 증표에 있다. 국가는 재화와 서비스를 준 구성원들에게 채무에 대한 상환을 약속하고 채무증서(charta)를 발행한다. 민간은행은 환어음(bill of exchange)을 발행하여 상인들이 신용거래를 할 수 있게 해준다. 거래에서 환어음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발행한 은행에 대해 그 만큼의 가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 즉 채권을 가진다. 따라서 환어음 또한 일종의 채무증서이다. 간단히 말해 국가와 은행은 채무를 지고 채무상환을 약속하는 채무증서를 발행하고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국가와 은행에 채권/청구권을 가진다. 이러한 채무증서가 바로 화폐의 기원이 된다. 사람들이 채무증서를 국가와 은행에 들고 가 채무를 상환 받는 대신 제3자와의 거래에서 주고받으며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국가와 은행이 발행한 채무증서를 제3자와의 거래에서도 주고받을 수 있는 화폐로 신뢰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국가와 은행의 채무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그리고 이후에 화폐로 발전하는) 증서의 가치는 그들의 권력(조세징수 및 자원 동원 능력) 또는 부에 의해 뒷받침될 때 신뢰받을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채무를 상환할 능력, 즉 지불 능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지불 능력이란 1971년 브레턴우즈 국제 통화 체제 붕괴 때까지는 대체로 금과 같은 귀금속 보유량을 의미했고 그 이후로는 국가와 은행이 사회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 즉 권력에 기초한 순수한 신용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이 증서를 누구든지 국가와 은행에 빚진 채무(또는 내야 되는 조세)를 청산하는 데 쓸 수 있다는 약속이 있다면 이 증서는 널리 쓰일 수 있다. 이제 채권자들은 국가와 은행에 직접 채무증서를 들고 가서 채권-채무 관계를 청산할 필요가 없다. 국가와 은행에 채무를 갚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채무증서를 주고 그 사람들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국가에 조세를 바쳐야 하는 사람은 매우 많고, 은행 또한 충분히 크다면 은행에 채무를 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국가와 은행에 대한 채권-채무 관계가 제3자에게 양도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채무증서는 재화와 서비스를 매매하는 데 사용되는 화폐-교환 수단으로서 널리 유통될 수 있다.

둘째, 화폐는 사물이나 상품이 아니라 청구권 또는 채무의 크기를 재는 '추상적' 계산 단위이다. (사물이나 상품을 대표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귀금속과 같은 상품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주화를 사용하던 시기에도 화폐의 가치가 금속함량과 관계가 있었던 적은 없으며, 다만 일정량의 금이나 은로 교환해주겠다는 약속만이 가치를 보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일뿐 그러한 약속을 제공하던 금본위제 시기에도 놀랄 만큼 적은 금으로 파운드 국제 통화가 유지되었다. 중요한 것은 금보유량이 아니라 파운드라는 계산 단위였다(<돈의 본성>, 286쪽). 화폐의 기원이 청구권과 채권-채무 관계를 표시하는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나타내는 증표들은 귀금속과 같이 반드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일 필요가 없었다. 대신 그것은 청구권, 채권-채무의 크기를 계산하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부에 대한 청구권, 채권, 채무를 나타내고 계산하는 추상적 단위, 즉 계산화폐이다. 그러므로 화폐란 '한국은행권'과 같은 중앙은행권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앙은행권은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오히려 화폐라 하면 은행계좌에 기록된 숫자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셋째, 현대의 화폐는 단순히 계산화폐이자 청구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신용화폐라는 특수한 제도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화폐형태는 베버의 표현을 따르면 국가와 자본의 "기념비적인 동맹"(92쪽) 덕택에 발전했다. 국가나 민간은행 단독으로 발행한 화폐에는 결점이 있다. 채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 폭력 조직으로서의 근대 국가는 설사 채무상환 능력이 있더라도 지불 약속을 지키지 않을 위험이 있다.(또는 국가 자신이 발행한 증서를 조세로 받아들이지 않을 위험이 있다.) 이 경우 증서는 휴지조각이 된다. 또한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국가는 지불 능력을 넘어서 증서=화폐를 남발할 수 있다. 이 경우 인플레로 화폐=채무의 가치가 하락하여 채권자가 손해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민간의 상인들은 국가를 그리 신뢰하지 않고 국가가 발행하는 증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는 국가가 발행한 증서가 신뢰할 수 있는 화폐로 기능하는데 제약을 가한다. 한편 은행이 사적으로 발행한 환어음에도 문제가 있다. 우선 부도가 날 위험이다. 설사 부도가 나지 않더라도 사적 환어음은 기존의 거래관계 밖에서는 신뢰를 받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유통될 수 있다. 역시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화폐로 기능하는데 제약이 있다.

▲ <돈의 본성>(제프리 잉햄 지음, 홍기빈 옮김, 삼천리 펴냄). ⓒ삼천리
이 문제가 해결되고 공적으로 신뢰받는 현대적인 자본주의 신용화폐가 등장하게 된 것은 국가와 자본을 매개하는 중앙은행의 설립 덕택이다. 현대적인 중앙은행의 시초는 1694년 설립된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이다. 그것은 "상업은행들이 신용화폐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국가의 권력과 안전성에 함께 결합시킴으로써 공적 통화와 사적 신용의 통합을 가능케 했다."(112쪽) 런던의 상인들에 진 채무의 불이행을 선언한 찰스 2세가 1688년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후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는, 런던 상인들이 설립한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미래의 조세나 관세 등을 담보로 120만 파운드를 빌린다. 잉글랜드은행은 빚을 갚겠다는 왕의 약속을 담보로 같은 금액의 은행권을 발행해 민간인들에게도 대출하였다. 이 은행권이 왕의 지불 약속에 의해 보증되었으므로 마술처럼 "사적인 부채[신용]는 (…) 공적인 화폐로 변모하게 되었다." (114쪽)

중앙은행 제도의 이점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화폐 발행을 별도의 기관에 맡기므로 채권자 입장에서는 화폐 가치 하락에 대한 우려가 가시게 된다. 중앙은행은 "'모종의 변하지 않는 가치 척도가 존재한다'는 허구를 확립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다.(121쪽)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 즉 화폐 가치의 보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국가와 자본의 지불 능력(조세 능력 또는 재정 상태)을 감안해 통화량(지불 약속의 크기)을 조절한다. 만약 국가와 자본의 지불 능력보다 통화량이 더 빨리 증가하면 그 화폐의 가치는 하락할 것이다.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리거나 보유 금융 자산을 매각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통해 사회의 지불 능력을 초과해 생산된 화폐를 흡수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의 가치는 채무 이행에 소극적이거나 화폐를 남발할 수 있는 국가가 직접 발행한 화폐보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 덕택에 화폐는 더 널리 더 많이 유통될 수 있고 국가도 오히려 더 많은 화폐를 발행하고 쓸 수 있게 된다.

한편 민간은행도 중앙은행을 통해 자신들이 생산/대부하는 화폐에 대한 신뢰를 제고할 수 있다. 중앙은행의 도움으로 "은행 시스템은 개인들의 채무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불 수단인 국가가 발행한 화폐로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115쪽) 예를 들면 가게에서 은행이 생산한 신용화폐인 신용카드를 받는 까닭은 그것을 한국은행권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앙은행은 민간은행들의 대규모 파산을 막는 '최종 대부자의 역할'도 한다. "지불 시스템 전체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122쪽) 이렇게 자신들이 기존에 사적으로 생산하던 신용화폐에 중앙은행의 공적인 신뢰가 더해진 결과 은행은 더욱더 신용(대부)을 늘리고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잉햄에 따르면 "민간은행 네트워크가 가장 강력하고 튼튼한 국가의 공적 통화나 국가 부채 시스템과 통합된다면 은행 네트워크의 안정성도 강화될 것이고 그 결과 경제 성장도 속도를 더하게 될 것이다."(112쪽)

2.
이제까지 본 바와 같이 잉햄에 따르면 화폐는 일차적으로 상품이나 교환 수단이 아니라 청구권과 채권-채무 관계를 나타내는 추상적 계산 단위이자 그것을 실현/청산시켜주는 지불 수단이다. 화폐란 곧 제3자에게 양도 가능한 채무를 나타내는 증서(청구권 또는 채권)인 것이다. 그것이 상품이나 교환 수단이 되는 것은 추상적 계산 단위이자 지불 수단으로 확립된 이후이다. 그리고 현대의 자본주의 신용화폐는, 국가-자본의 동맹이 중앙은행을 통해 제도화된 구조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청구권 또는 채권-채무 관계, 즉 부와 권력관계가 (국가가 보증하는 중앙은행권과의 교환가능성을 통해) 공적으로 정당화되고 계산되고 표현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폐의 독특성은 자본주의에 다음과 같은 역동성을 불어 넣는다.

첫째, 화폐가 채권-채무 관계를 나타내는 추상적 계산 단위라는 것은, 당장 귀금속 또는 중앙은행권을 소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신용(지불 능력 및 약속)에 기초해 채무를 짐으로써 현대적 부의 척도인 화폐가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화폐란 실물이 아니라 추상적인 단위이고 채무를 지기만 하면 생산될 수 있으므로 일반적인 상품에 비해 생산에 제약이 작아 그 공급이 크게 팽창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국채 발행을 통한 국가의 적자 재정지출, 예치된 예금의 90퍼센트까지 대출 가능한 은행, 그리고 전체 현금의 최대 9배까지 대출 가능한 은행 시스템 덕택에 생산과 소비가 팽창하고 자본주의적 상품거래 관계가 확산되며 자본 축적이 확대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이렇게 손쉬운 화폐 생산 때문에 금융의 불안정과 취약성이 커지고 지불 능력을 초과하는 자산 거품이 발생한다.(4장 4절)

둘째, 화폐가 채권-채무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채무증서라는 것은 화폐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채무를 질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채무를 질 수 있는 능력은 지불 능력에 달려 있는데 이는 결국 자원 동원 권력을 나타낸다. 국가권력은 조세능력에, 그리고 자본권력은 소유한 부에 기초하여 채무를 지고 화폐를 생산함으로써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다. 반면에 자원 동원 권력이 작은 국가와 자본의 채무 능력=화폐생산 능력은 제약된다. 또한 중앙은행은 민간은행들에게 자신들이 생산한 화폐를 공적으로 신뢰받는 중앙은행권으로 교환(인출)할 수 있는 특권을 주는 반면, 그 밖의 행위자들(산업자본, 노동자, 소비자)에게는 그러한 특권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부의 척도이자 자본의 원천으로서의 화폐의 생산과 배분은 권력에 기초하는 것이다. 잉햄의 지적대로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성공적인 두 나라(영국과 미국)가 가장 빚이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121쪽)

셋째, 자본주의적 신용화폐의 생산과 배분은 권력에 기초하기 때문에 불평등한 결과와 더불어 사회적 투쟁을 초래한다. 화폐가치의 변화는 청구권과 채무-채권 관계, 즉 권력관계에 변화를 초래하고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부와 권력을 불평등하게 배분한다. 그러므로 화폐가치에 영향을 주는 화폐의 생산과 배분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투쟁의 중심축이 된다. 특히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화폐의 가치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로 자본의 사회적 배분 및 권력 관계가 변화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채무자 계급들(생산자와 소비자)은 '싼 화폐'의 풍부한 공급(은행 신용의 낮은 이자율)을 선호하며, 그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경우 자신들 채무의 실질 가치가 감소되는 것을 환영한다. 반면 채권자 계급들은 실질 이자율을 0보다 크게 유지하기 위해 '빡빡한' 통화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 붙인다."(172쪽)

3.
화폐의 가치, 화폐의 생산, 그리고 부와 권력, 즉 자본의 배분을 둘러싼 투쟁은 기업, 자본 및 금융 시장, 그리고 국가에 걸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첫째, 주주, 채권자, 경영자, 노동자들은 기업 자산과 이윤에 대한 각자의 청구권을 늘리기 위해 투쟁한다. 노동자들은 고용 안정과 임금 인상, 노동과정 및 숙련의 개선을 요구한다.(165~168, 206~207쪽) 케인스주의 시기에서처럼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면 기업은 이를 상품 가격에 반영하고 국가는 재정지출을 확대한다. 그 결과 화폐 가치를 하락시키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며 채권자들과 금융가들의 이익이 감소한다.(130~133쪽)

반대로 채권자들과 금융가들은 기업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늘리려고 한다. 채권자들과 금융가들은 노동 운동 약화, 국가 재정지출 축소, 통화량 감소 및 물가 상승 억제를 통해 화폐 및 자본시장에서 실질 이자율을 높이려 한다.(135~136쪽) 게다가 "금리 수취자의 복수"가 시작된 1980년 대 이후 사모펀드 등 "금융 모험사업가들"은 저평가된 기업을 차입매수한다. 이들은 착취 증가와 비용 감소(구조조정)를 통해 기업 주가를 상승시키고 3~5년 후에 되팔아 막대한 수익을 남긴다. 또한 주주들은 스톡옵션을 전문 경영인에 부여한다. 이렇게 하여 기업 경영의 목표는 기업 성장과 매출 증대로부터 노동 유연화를 통한 단기적인 '주주가치' 상승으로 이동한다. 기업은 상품이 되고 금융 중개기관들은 기업 간 인수합병 흥정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긴다.(213~214쪽 및 7장 2절)

둘째,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서 이익을 얻는 1차 시장(화폐 시장, 자본 시장) 보다 불확실성 속에서 자산가치의 변화를 예측하여 투기를 벌이는 2차 시장(금융 시장)이 확대된다. 투자은행은 2차 시장에서 내부자 정보를 과점하여 투자 기회를 포착할 뿐 아니라 기업 정보를 생산함으로써 주가를 상승시켜 이익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소규모 투자자들은 큰 손해를 본다.(7장 1절) 하지만 장기적인 자산 수입의 증가보다 단기적인 자산 가치 상승을 목표로 한 이러한 금융 거래는 시스템 리스크를 키우고 이에 따라 경기침체와 붕괴의 가능성이 커진다.(7장 3절) 지구적인 화폐, 자본, 금융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9장 1절)

셋째,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평화 유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재생산, 시장 실패 교정과 위기관리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국가는 복지를 통해 자본이 책임지지 않는 '인적 자본'을 유지 보수하고 중앙은행과 규제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와 규제를 통해 통화를 안정시키고 금융 위기 시에 '유동성'을 공급해 연쇄 도산과 화폐 증발을 막는다(8장). 이러한 기능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역할의 범위와 규모에 대한 정치적 투쟁과 맞물린다. '경로의존성'과 여러 계급과 이해집단들의 투쟁에 따라 '자유 시장경제'와 '조정 시장경제'를 포함한 다양한 자본주의의 변종이 만들어진다(9장 2절).

넷째, 잉햄은 베버를 따라 화폐와 자본의 생산과 배분을 둘러싼 사회적 투쟁에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면 안정이 이루어지지만 불균형이 생기면 오히려 자본주의의 위기를 촉발한다고 주장한다. "[인플레이션이나 부채 디플레이션에 빠지지 않은] 가격 수준의 안정은 생산과 소비의 수요 및 공급을 형성하는 다양한 경제적 이익집단들이 시장에서 서로 용인할만한 안정적인(그렇다고 반드시 평등한 것은 아니다) 세력 균형에 도달했음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128쪽) 예를 들면 자본과 노동의 갈등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면 투쟁이 격화됨으로써 경제 활동이 교란되고 생산비용을 합리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워진다.(168쪽) 또한 채권자(금융 자본)와 채무자(생산 자본, 노동자, 소비자) 사이에 권력이 불균형해지면 인플레, 그리고 부채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노동의 승리로 임금과 물가가 상승하고 정부지출도 증가하면 인플레와 자산 거품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때 인플레를 잡겠다고 정부 지출을 축소하고 실질 이자율을 크게 상승시키면 곧바로 이자 비용을 줄이기 위한 자산매각과 부채청산이 시작된다. 갚아야할 부채의 가치보다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가치가 더 크게 폭락하는 부채 디플레이션이 촉발될 수 있다.(4장 4절)

끝으로 잉햄은 자본주의는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사이에 힘의 균형이 존재할 때에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와 자본이 융합하게 되면 정치적 엘리트들이 부, 경제적 자원, 이윤의 기회 등을 모두 전유하려고 들고 권위주의와 부정선거가 판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01~302쪽)

4.
잉햄의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자본은 생산 수단일 뿐만 아니라 신용화폐이고 그것을 둘러싼 사회관계"이다. 신용화폐는 결코 중립적인 교환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독자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시장 거래 자체를 가능하게 하고 이윤의 합리적 계산을 가능케 하고 산업 투자에 자금을 공급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 또한 반면에 신용화폐는 생산자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거품을 발생시키며 경제를 불안정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착취, 합리적 계산, 산업투자 확대, 자산가치 상승 등을 통해 이윤을 얻는 자본은 권력과 부의 불평등 및 이해관계자들의 투쟁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 및 제도 속에서 작동한다. 그러한 투쟁과 관계 속에서 자본주의는 위기를 반복한다. 특히 잉햄은 "자본주의 체제를 교란시키는 가장 위협적인 요인은 부채에 기초한 통화 및 금융 질서에 내재해 있는 취약성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337쪽) 자본주의의 세 가지 기본적인 취약성인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과소소비와 과잉생산의 주기, 금융 불안정이 모두 지불 능력을 넘어 팽창하기 쉬운 신용화폐의 취약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잉햄의 <자본주의 특강>은 이제까지 간과되었던 고전적 자본주의 이론들과 그들 사이의 논쟁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앞에서 보았듯이 이 책은 그동안 자본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간과되었던 자본의 화폐적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신선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잉햄의 분석은 마르크스(생산 수단을 둘러싼 자본-노동 관계, 자본주의 국가론)보다는 베버(화폐를 둘러싼 한 채권-채무 관계, 국가중심적 국가론)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그의 주장은 여러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잉햄의 <자본주의 특강>은 자본의 생산 수단 및 생산관계로서의 측면에 경도되어 자본의 화폐적인 측면을 '허구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던 그 동안의 자본주의에 관한 논의에 대해 훌륭한 반대쪽 균형추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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