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는 10점 기준으로 안전(9.1)과 시민 참여(7.5), 교육(7.9) 같은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였지만 고용(5.3), 일과 생활의 균형(5.3), 건강(4.9), 삶의 만족도(4.2), 소득(2.1), 공동체(1.6) 등에서는 매우 낮았다. 예를 들어, 15~64세 남성 중 75퍼센트가 보수를 받는 직장에서 근무하지만 여성은 53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만큼 일과 생활 사이의 균형이 비교 대상국 어느 나라보다 매우 낮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소득 상위 20퍼센트가 하위 20퍼센트의 5배 이상인 소득 격차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바로 가기)
오스트레일리아가 3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 세계 금융 위기의 영향이 적었고 장기간의 경기 침체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분석도 외환 금융 위기를 겪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러나 정작 이 발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개인의 소득이나 국가의 경제력 수준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더 높은 소득이 더 나은 생활을 누리게 하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교육과 의료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경우에도 가처분 소득은 5위, 가계 금융 자산은 17위에 랭크되어 있다. "행복은 소득 순이 아니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대목이다. 가처분 소득과 금융 자산에서 가장 높은 미국은 전체 지수는 6위에 그쳤다.
뿐만 아니라 이 지수가 말해주는 행복도는 국가 간 경제력 비교를 위해 널리 사용되는 GDP(국내 총생산) 순위와도 다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스터린 역설(Easterlin's Paradox)'이 보여주듯 대부분의 선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GDP가 안정적으로 성장했음에도 삶의 만족도에는 변화가 없는 현상도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경제력만이 행복을 재는 유일한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요즘에는 그리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GDP가 증가해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공식적인 발표를 접하면서 자신의 삶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이 통계 수치가 조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GDP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사이먼 쿠즈네츠조차도 "한 나라의 복지 수준은 국민 소득을 측정한다고 해서 도출해낼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생산 증가가 생활수준의 향상과 동의어라는 생각은 거의 종교적인 신조가 되었고, 정치가에게는 더욱 그랬다. GDP가 정책 결정자나 정치인의 목표가 되면서 이들의 정책을 자문하는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GDP를 증가시키는 프로그램을 지지하면서 부자는 더 큰 부자로 만들고 다른 모두는 더 가난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경우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을 관성과 타성으로 만든 것은 시장에 대한 숭배였다. 이들에게 효율적인 자원 배분 기제로서 시장은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고, 또 모든 사물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신이다.
이러한 타성과 신조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70년대 초 <로마클럽보고서> 발간을 전후하여 진보(progress)를 다시 정의하고, 측정하려고 했던 일단의 연구자들과 통계 관련 국제기구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데이터 부족이나 가중치 부여 등 기술적인 문제들 때문에 곧 한계에 부닥치고 말았다. 이후 1995년에 미국의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 경제, 환경 지표들을 종합한 'GPI(Genuine Progress Index)'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 지표는 시장에서 측정할 수 없는 이른바 비시장적인 사회적 환경적 자산을 진보를 재는 데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유엔에서도 국민 경제의 건전성을 재는 '인간 개발 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를 개발하여 여기에 GDP뿐만 아니라 기대여명이나 문맹률 그리고 교육 성취도 같은 것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 지수 역시 통상적인 의미의 '개발'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누릴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지수는 개발도상국의 발전 정도를 평가해보는 데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으나, 기대여명이나 문맹률, 교육 성취도가 이미 높은 이른바 부유한 국가들의 전반적인 복지 수준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적었다.
수상 연도는 서로 다르지만 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은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더라도 GDP는 증가할 수 있고, 또 세계화가 국민들의 물질적 행복과 생산량 사이의 괴리를 오히려 확대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프랑스의 전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새로운 지표 개발 작업을 주도한 이 두 사람은 GDP가 증가함에도 우리의 삶이 더욱 팍팍해지는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질을 재는 새로운 척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GDP는 틀렸다>(박형준 옮김, 동녘 펴냄)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으로 고쳐 번역된 책에 따르면 GDP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진보뿐만 아니라 인간의 복지와 행복을 측정하는데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정부가 제공하는 무상 의료 보험, 가계에서 이루어지는 육아 등 일부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둘째 시장 가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장 가격과 사회가 부여하는 가치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다는 점. 기업들의 생산과 소비 행위로 인한 무분별한 환경 훼손이 시장 가격에 반영되지 않을 경우 GDP는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고, 더 심각하게는 엑손 발데즈 호의 기름 유출 사고 이후 들어간 막대한 피해 복구액과 소송비는 GDP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된다.
셋째 가격과 수량 등의 개념을 얘기할 때, 제품과 서비스의 질적인 향상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점. 제품의 질적 향상을 과소평가하게 되면 물가 상승 비율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되며 이는 실질 소득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값싼 암 치료제가 개발되어 의사, 병원, 제약 회사의 이익이 감소하여 GDP는 오히려 줄어드는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반대로 질적 향상을 너무 과대평가하면 실질 소득을 과대평가하게 될 것이다. 유럽 국가의 장밋빛 높은 소득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행복은 과연 GDP 순일까? ⓒgoldenageofgaia.com |
그렇다면 제2차 세계 대전 후 경제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기구 OECD가 '더 나은 삶 지수'를 만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동안의 경제 발전으로 회원국 국민의 소득이 늘고 질병도 감소하였지만 대신 마음의 병이나 자살 등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고, 경제 개발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 파괴로 나타난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 제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사정 때문이다. 개발과 경제 성장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내달려온 선발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또 이러한 지표가 개선되려면 복지 지출이나 환경 보전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출 확대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질 높은 고용을 통해서 일과 삶을 조화롭게 만들고, 공동체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지향하는 기업들의 투자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반성이나 외침 그리고 기대와는 여전히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량 소비주의에 포획되고 물신화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내면서, 이른바 '불평등에 의존한 성장' 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좀 심하게 말하자면, '더 나은 삶 지수'와 같은 새로운 지표들을 개발하고 이를 확산시키려는 노력들이 기존의 물질적 불행과 불평등을 오히려 합리화하고 무마시키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새로운 지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심각한 경고로 들린다.
'더 나은 삶'이란 표현이 등장한 또 다른 이유는 상당히 철학적인 개념인 행복을 수치화하여 측정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데 있을 것이다. 그냥 생각해보아도 행복은 대체로 상대적인 개념이며, 그것을 가져다주는 원천도 다양하여 일의적이지 않다. 또 행복은 물질적인 것처럼 합산할 수도 없고, 또 한순간에 생겼다가도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로버트 스키델스키 같은 경제학자는 개인이 규정할 수 없고, 그 자체로 측정이 절대로 불가능한 행복을 재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시도, 즉 GDP나 성장 대신 행복을 측정하고 이를 추구하자는 것은 하나의 잘못된 우상을 다른 우상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라는 그의 지적은 뭔가 새로운 지표가 필요함을 느끼는 경제학자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월가를 점령하라!' 이후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높다. 반성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비단 경제학에만 국한될 이유는 없을 것이지만 '침묵하는 경제학자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경제학 아니 경제학자들은 불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보면, 이미 실패한 시장 만능주의가 자신의 실패를 더 큰 재앙으로 덮으려는 시도,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면서 국가의 재정 지출 확대를 막으려는 금융 자본, 조세 피난처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부를 지키려는 소수의 부자들과 기업들, 증세는 안 되고 부자 감세는 계속되어야 한다면서 낙수 효과(trickle down effect)를 선전하는 이데올로그들이 있어 나 같은 경제학자들은 더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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