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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노예짓도, 탁상공론도 그만! 대안은 있다!

[프레시안 books]정태인·이수연의 <협동의 경제학>

나는 아직도 '서평'이라는 장르의 글쓰기가 친숙하지 않다. '독후감'이면 모를까, 서평은 '평'이므로 책을 저울에 올리고(critic) 무게를 재야 한다. 게다가 이건 옛날 동대문 시장 헌책 고물상들이 했듯이 그냥 양만 재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의 내용에서 몇 개의 중요한 측면들을 들어 그것이 질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혹은 하찮은 것인가도 설명해야 한다. 이런 부담스런 작업을 하고 싶은 책이 많을 리 없다. 그래서 학술 저널에 실리는 상당히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서평이 아니라면 사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태인 선생과 신예 이수연 씨의 공저 <협동의 경제학>(레디앙 펴냄)이 나왔다.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하고 겸손한 외양을 하고 있다. 서점에 가보면 소위 '경제경영 코너'에 항상 쌓여있는 무수한 책들 - 그 중 80퍼센트는 경제학 교과서의 주장들을 이리저리 짜깁기 해놓은 종이더미들이다 - 과 뒤섞여 있어도 별로 표시가 나지도 않는다.

▲ <협동의 경제학>(정태인·이수연 지음, 레디앙 펴냄). ⓒ레디앙
하지만 나에게는 서평을 쓰고 싶은 또 반드시 써야할 책이다. 누군가라도 나서서 배경 음악이라도 좀 깔지 않는다면 이 책이 얼마나 독특한 책인가 그리고 중차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책인가 등이 잘 드러나지 않고 따라서 매주 쏟아져 나오는 '책'이라는 이름의 엄청난 종이더미에 그냥 깔려서 묻혀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협동의 경제학>은 지금까지의 주류 경제학 300년의 전통과도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책이지만, 주류 경제학의 폐쇄적인 체계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혹은 아예 그것을 파괴하려고 했던 대략 150년간의 비판적 경제학의 전통에서도 중요한 방향 전환을 시도하는 책이다. 이 짧은 글에서 이렇게 큰 이야기를 이것저것 어지럽게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첫 번째 문제는 '위악적 인간 본성론에서의 탈출'이라는 구절로 또 두 번째 문제는 '사회의 재구성'이라는 어구로 집약하여,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가늠해 보겠다.

1.

유불선을 막론하고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마음을 닦는 법'의 핵심 요결의 하나는 위선과 위악을 모두 멀리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의 마음은 인위적인 의미에서의 선과 악을 훌쩍 넘어있는 것이다.

그 본래의 마음이 가림 없이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도록 계속 닦으려면 조심해야 할 것은 위선만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실제 모습보다 자기를 더 악하고 망가진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위악 또한 똑같이 아니면 더 심하게 위험한 일이다. 맹자(孟子)가 말하듯, 그렇게 되면 사람은 스스로를 막 대하면서 스스로를 내다버리는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위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인간은 실제로 짐승이 되어 버리며, 그렇게 스스로를 짐승이라고 여기는 자들의 막가는 행동이 세상을 채우면 세상은 실제로 정글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도 아니다. 묵자가 말하듯 한없이 이타적인 존재도 아니며, 양주(楊朱)가 말했듯이 한없이 이기적인 존재도 아니다. 이 '양주묵적'의 잘못된 주장을 넘어설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며 인간과 사회가 나아갈 바른 길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18세기 초 유럽의 사회 사상가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력으로서 인간의 이기심에 착목했을 때에도 이는 일방적인 인간 본성론의 차원은 아니었다. 인간을 그저 '예수의 어린양'으로 규정하여 종교적 당위로서 인간과 사회의 삶을 찍어 누르려고 했던 기독교 신학의 '위선'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 모습의 인간과 사회를 보려고 했던 과학적 시도였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펴냄)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을, <도덕감정론>(박세일 옮김, 비봉출판사 펴냄)에서는 인간의 동정심을 논하면서 실제의 인간과 세상은 그 두 가지의 상반된 측면이 자연법의 인도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인간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헌신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또 스스로의 이익을 생각할 때에는 한없이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 후자의 측면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 세상의 경제의 작동을 정말로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권력'의 맨 얼굴을 그대로 볼 것을 요구하면서, 또한 그것의 작동이 빚어내는 나름의 질서와 법칙을 볼 것을 요구한 마키아벨리에서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이 시작되었듯이, '이기심'의 맨 얼굴을 그대로 볼 뿐만 아니라 이것이 빚어내는 천태만상의 질서를 차분히 묘사한 애덤 스미스가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시작한 이로 칭송되는 것은 그래서 아주 의당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경제학 특히 19세기 말의 신고전파 경제학 이후로 포괄적인, 그래서 과학적 태도와 양립할 수 있는 인간 본성론은 사라져 버리고, 그 '개인적 이기심'이라는 것이 인간의 유일무이한 본성이라고 못 박힌다. 20세기 말엽의 주류 경제학으로 가게 되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인간은 '모지리'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를 어겼으니 이 땅 위에 숨 쉬고 살아갈 자격도 없는 존재로 여겨지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된다.

그렇다면 경제학이 해야 할 일은? 말할 것도 없다. 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제약 조건만 주어진 상태에서 야수적 이기심 하나만 달랑 남은 인간들 - 이를 인간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 이 서로 뒤엉켜 일구어내는 천태만상을 가장 아름답고 선한 자연적인 질서라고 신성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현존하는 인간과 현존하는 세상을 어떻게 하면 그 '자연적 질서' - 내가 보기에는 '자연의 정글' - 에 더 가깝게 몰고 갈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설계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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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부론>(애덤 스미스 지음,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펴냄). ⓒ비봉출판사
요컨대 인간의 본성은 인정사정없는 이기주의자이며, 자기 혼자의 이익을 늘릴 수 있다면 법으로 억제하지 않는 한 무슨 짓이든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인간들이 주인되는 세상인 시장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며 완벽한 질서이니 여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세상을 그 질서 안으로 편입해야한다는 것이 오늘날 경제학의 주요한 메시지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애덤 스미스의 후예라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 본성에 위선도 위악도 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과 사회를 보아 그 속에서 패턴과 법칙을 찾으려 했던 애덤 스미스는 과학자였지만, 실제 존재하는 인간보다 훨씬 더 악한 모습을 인간에 뒤집어 씌워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이 유일하게 올바르고 합리적인 세상이라고 강변하는 이들의 주장은 산업 사회에 잔존하는 형이상학일 뿐이며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협동의 경제학>은 이러한 현대 경제학의 위악을 걷어내고 다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동기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요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인간 누구나 스스로의 이익을 늘리고 싶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반드시 타인을 배제하는, 즉 누군가를 '엿 먹이는' 행위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세상에는 '나'와 '타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있다.

문제는 그 개인을 둘러싼 '게임'의 법칙이 무엇이냐, 즉 그 개인의 특정 행동을 둘러싼 사회적 제도적 상태가 어떠하냐이다. 이에 따라서 똑같이 스스로의 이익에 골몰하는 개인이라고 해도 타인들과의 협력이 얼마든지 가능하기도 하고 또 심지어 전체의 이익을 정열적으로 추구하는 행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미시경제학 교과서에서 짜놓은 일련의 각본, 즉 인간의 이기심이 어떻게 효용 극대화에서 일반 균형 및 파레토 최적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지게 되는가는 무너지게 된다. 대신 집단적 행동의 전혀 다른 패턴과 논리의 가능성이 뻗어 나오게 된다. 합리적 예측도 없고 일반 균형도 없지만, 얼마든지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로 배반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고 굳게 뭉치기도 하는 천태만상의 행동 패턴의 논리가 도출된다. 주류 경제학의 불변의 공리였던 '이기적 개인의 효용 극대화 행동'이라는 전제와는 완전히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는 경제학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행동 경제학 분야에서 또 후생 경제학의 이론 분야에서 꾸준히 이루어져 온 것이다. <협동의 경제학> 또한 그 논의를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이지 새로운 이론화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협동의 경제학>이 이렇게 새로운 경제학 체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어떤 논의의 맥락과 어떤 논리적 체계에 놓고 있는가에 있다. <협동의 경제학>은 이를 단순히 주류 경제학의 일방적 논리와 독선에 대해 도전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를 '사회의 (재)구성'이라는 건설의 목표에 부합하는 기초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2.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시작 또한 19세기 초라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시스몽디(Sismondi de Sismondi)는 시장 경제의 내적 논리를 내재적으로 추론해가면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가 아니라 과소소비라는 논리적 모순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그리고 영국의 로버트 오웬 (Robert Owen)을 추종하는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론에 근거하여 자본주의 경제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라는 정의롭지 못한 기초에 서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 두 가지, 즉 시장 자본주의 시스템의 내재적인 논리적 모순 그리고 그 도덕적 부당성의 논지는 칼 마르크스에 이르러 하나의 논리적 체계로 구성되면서 이후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모태가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주장대로 자본주의가 정의롭지도 못하며 또 만성적인 불안정성과 공황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결함투성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대안적인 경제 제도 및 정책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가? 그 구체적인 계획을 내올 수 있는 기초가 되는 대안적인 정치경제학의 논리 체계는 어떻게 되는가? 요컨대, '비판적'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대안적' 정치경제학은 존재하는가?

이는 결코 추상적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20세기의 역사에서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또 파국으로 밀어 넣었던 심각한 문제이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혁명 정부를 수립했던 나라들은 어떻게 해야 대안적인 정치경제 시스템을 건설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어처구니없는 실패를 거듭해야 했고 그 결과 다시 숱한 사람들이 희생당해야 했다.

<자본>(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길 펴냄)을 아무리 읽어도, 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을 아무리 연구해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책과 제도들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는가의 논리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이 '대안적' 정치경제학이 빠져있는 '비판적' 정치경제학은 진보 세력의 실천적 무능력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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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길 펴냄). ⓒ길
'대안적' 정치경제학은 어째서 그렇게 쉽지 않은가? 이는 기존 사회의 파괴라는 비판적 부정적 태도가 아니라 '사회의 (재)구성'이라는 건설적 적극적 태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장 자본주의가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파괴하는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질문들에 답해야 해결되는 문제이다. 사회란 무엇인가? 개인과 사회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산업 시대에 들어와서 사회는 어떻게 산업 기술과 양립할 수 있는가? 무수히 다양한 인간 사회의 경제 활동들에서 인간의 자유와 도덕이라는 가치와 산업적 효율성이라는 두 가지의 목적을 최대한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등등.

이 '사회의 (재)구성'이야말로 본래 마르크스 이전의 생-시몽이나 로버트 오웬 등과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던졌던 중심적 질문이다. 혁명가라기보다는 사회 개혁가인 이들은 보다 인간적이고 도덕적이면서도 새로운 산업 기술과 혁신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효율적인 형태의 사회를 조직하고자 했고 이를 '개인주의'에 반대되는 운동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라고 이름 붙였던 바 있다.

하지만 이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라는 것이 곧 드러났다. 뒤르켐 이후의 숱한 사회학자들이 이 '사회적인 것'의 존재를 포착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직도 시원한 답은 나올 기미가 없다. 모든 이들이 '사회'를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정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회는 마치 모비딕 마냥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론적으로도 이러한 상황이니 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의 실천적 구체적 틀을 마련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1930년대 이후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해왔던 사회 정책과 경제 정책의 결합에서 과감하면서도 뛰어난 결과를 가져온 중요한 시도를 볼 수 있지만, 이것이 아직 체계적인 정치경제학의 이론으로 구성된 것은 전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 운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사회민주주의조차 자본주의 경제의 '관리'를 주된 패러다임으로 하게 되면서, 이 '사회의 (재)구성'이라는 문제틀 자체가 정치경제학에서 소멸해 버렸다는 데에 있다. G. D. H. 콜이나 군나르 뮈르달 또 칼 폴라니 등의 드문 예외를 빼면, '경제'가 아닌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틀에서 정치경제학을 구성하려는 노력 자체가 잊히게 된 것이다.

<협동의 경제학>의 후반부는 바로 이러한 '사회의 (재)구성'을 정치경제학의 중심적인 문제로 제기하는 것을 목표로 구성되어 있다. 책 앞부분의 논의는 그래서 이 뒷부분으로 오게 되면, 사람들이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함께 협동과 단결의 관계를 구성하고 또 그러한 정신을 내면화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조건에서인가를 계속 파고든다.

이러한 질문은 사실 아주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는 것이라서, 온갖 난해하고 화려한 개념과 이론이 난무하는 사회 과학의 담론 세계에서는 주목을 끌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향의 질문과 탐구야말로 '대안적' 정치경제학의 핵심 문제, 즉 이기적 개인이 모래알처럼 튕겨대는 시장 자본주의의 원리가 아니라 사회가 강화되고 재구성되도록 하면서 또 그것을 전제로 인간과 자연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원리로 운영되는 경제 질서라는 문제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유일의 입구이다.

<협동의 경제학>은 이러한 거창한 의미 부여가 좀 무색하리만치 구체적이고 소박한 문제들부터 시작하여 논의를 풀어나간다.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과 같은 사회적 경제 영역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공 부문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핵심 원리인 공공성의 구성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시장 경제의 지속가능한 활력을 어떻게 재부팅할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영역의 구성과 조직이 이것들을 아우르는 가장 큰 영역이라 할 생태 경제의 구성과 조직과 어떻게 모순되지 않게 만들 것인가 등의 문제로 나아간다.

이 네 가지 영역, 즉 사회적 경제, 시장 경제, 공공 부문, 생태적 경제는 서로 다른 조직 및 운영 원리들로 구성되는 독자적 영역들이다. 이 영역들이 서로 잘 어우러지고 조화되도록 하는 '나라 살림의 계획'이 곧 이 책이 '대안적' 정치경제학의 틀로서 제시하는 '네 박자 경제론'이 된다. 독자들은 원자 알갱이 같은 개인들이 이런저런 게임의 상황에서 벌이는 이런저런 선택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했다가 어느 덧 이 네 가지의 사회적 영역들이 구성되고 조직되는 큰 이야기로 나아가게 된다. '사회의 (재)구성'을 중심적 질문으로 삼는 '대안적' 정치경제학의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3.

<협동의 경제학>은 읽기가 편하다. 난해한 개념으로 몇 페이지가 도배되는 일도 없으며 모호한 논리를 들이대면서 이론의 '미묘함(subtlety)'이라고 우겨대는 일도 없다. 새로 등장하는 개념과 이론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쉬운 설명이 항상 따라붙으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인지 그게 무슨 큰 목적에 연결되는 것인지는 항상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서두에 이야기한대로 미시경제학을 대충 재탕하여 대중용으로 나온 무수한 '경제경영서'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이유에서 이 책은 아주 새로운 방향으로 경제학의 방향을 틀고자 하는 대단히 중요한 시도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인간들에게 당신들은 사실상 악마이니 악마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고 악마답게 살아가는 게 '선한' 일이라고 가르치는 주류 경제학과 전혀 다른 체계의 경제학을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시장 자본주의 질서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결함으로 가득한 것인지를 끝도 없이 반복하는 '비판적' 정치경제학을 넘어서서, 비록 소박하지만 작은 영역 가까운 문제부터 '사회의 (재)구성'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경제 활동 조직의 원리는 무엇인가를 묻는 '대안적' 정치경제학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정치경제학으로 조직할 수 있는 '네 박자 경제'의 틀을 개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주류 경제학과 '비판적' 정치경제학 두 가지의 전통에서 지금까지 방황해왔던 이들은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과 머리가 편해지고 맑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재)구성'을 중심으로 삼는 '대안적'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방향으로의 길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도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협동의 경제학>은 아직 그렇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내용은 담고 있지 못하다. 그 내용을 채우는 일은 기왕 이 길로 나선 정태인 선생이 계속 해야 할 일이기도 하겠지만, 젊은 연구자인 공저자 이수연 씨와 같은 많은 젊은이들이 함께 나서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성과가 축적되면, 많은 이들이 <협동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다시 기억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협동의 경제학>이 출판된 시점에서 이미 그 미래의 의미를 뚫어본 이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싶다. 이 서평은 그래서 증거물로 작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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