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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토'에서 이기고 싶어? 한국의 토론이 놓치는 것들!

[프레시안 books] 자오촨둥의 <쟁경-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

동양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

처음 서평을 부탁하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사실 부담스러웠다. 첫 번째 이유는, 한창 철학이란 학문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던 대학 시절에도 나는 논리학이라는 학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대학 내내 거의 피하기를 거듭했던 철학 분야였기 때문이다. 가장 존경하는 은사이자 노 교수의 강의였던 데다 전공 필수였기에 '논리학'이란 과목을 수강하긴 했어도,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과목으로 기억한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학점은 비 마이너스(B-)를 받았던 듯하다.

또한 둘째 이유는, 소개받은 바에 따르면, 책의 분량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책을 받아보니 가장 뒤에 붙은 책의 쪽수는 983쪽이라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고 서평을 써야 한다는 것도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옮긴이가 소개하듯이 이 책은 '동양 논술 대백과사전'이다. 중국의 수많은 논변들을 이렇게 한 권으로 정리해 주었다는 고마움과, 목차를 통해 본 풍성한 내용은 마음을 바꾸도록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 <쟁경-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자오촨둥 지음, 노만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책의 제목이었다. '쟁경(爭經)' 이라니! 말 그대로 풀이하면 '다투는 법에 관한 경전'이란 뜻이다. 게다가 부제는, '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이란다. 이 부제는 더욱 맘에 들지 않았다. 과연 우리는 이기기 위해 토론하고, 이기기 위해 논리를 따져야 하는 것인가? 논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긁게 하면서 서평을 선뜻 쓰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책의 원제는 그런 뜻은 아니었다. '논변의 역사'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논변사화(論辯史話)'가 책의 본래 제목이다. 서문의 제목에 붙은 말처럼, 장강처럼 오래되고 유구한 논변의 역사라는 표현이 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말해준다. '논(論)'이 일정한 주제나 사안에 대해 조리 있게 논하는 것이라면, '변(辯)'이란 구별하고 분변하는 것이다. 책에 붙은 영어식 표현도 'Historiette of Argument'이다. 이렇게 보면 이기는 기술이라는 식의 제목은 무관하다.

그렇다고 이런 식의 제목으로 바꾼 출판사의 의도가 그렇게 불쾌한 것만은 아니다. 아마도 워낙 책이 팔리지 않는 요즘의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독자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거의 일 천여 쪽에 육박하는 책을 낸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내기로 결단한 출판사가 고맙고, 이런 책을 고생고생하며 번역한 역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뿐이다.

중국에 '논리학'은 있는가?

아마도 20세기 중국 고전학의 영역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분야는 논리학 분야일 것이다. 20세기에 쓰인 철학사 저술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서양철학의 논리학에 해당하는 분야가 중국철학에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거의 최초의 중국철학사라 할 수 있는 호적의 <중국철학사대강>의 목적은 공손룡, 혜시 등 중국에도 논리학이 있었다는 것을 고대 문헌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중국의 철학사가로 가장 유명했던 펑유란(馮友蘭)의 경우에도 그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썼던 논문이 '중국에도 과학이 있는가?'였다. 아마도 미국에 유학한 중국의 철학자에게, 너희에게도 과학이 있느냐, 너희에게도 논리학이 있느냐 하는 물음은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었을 터다. 러셀,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 등 뛰어난 논리학자이자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갖던 그 시기에 유학한 것이 어쩌면 그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분석철학이라 부르는 철학사조는 '둥근 사각형'과 같은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언어의 본성은 무엇인지, 개념(언어)과 실재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등을 둘러싸고 일군의 철학자들은 수많은 사색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 상황에서 마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의 역설처럼, 혜시의 "쏜 화살은 가지고 않고 멈추지도 않을 때가 있다"(180쪽)와 같은 언명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 고대의 명가(名家) 철학자 공손룡은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며, 그 까닭에 대해서 "말이란 형체를 가리키는 명칭이고, 하얗다는 것은 빛깔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빛깔을 가리키는 명칭은 형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백마는 말이 아닙니다"(186쪽)라고 말했다.

혜시와 같은 이는 10가지 명제를 제시하면서 뛰어난 논리를 구사한다. 예컨대, "지극히 큰 것은 그 바깥에 아무 것도 없어서 대일이라 부른다. 지극히 작은 것은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어서 소일이라고 부른다."(168쪽) 또 "오늘 월나라로 떠나 어제 다다랐다"(170쪽)와 같은 말은 언어 표현과 현실의 질서 사이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 이런 언명들에 주목하여, 20세기 초기의 중국 학자들은 중국에도 논리학이 있었음을 나름대로 증명할 수 있었다.

'논리학(logic)'에서 '논변(argument)'으로

그러나 1999년에 출간된 자오촨둥의 <논변사화>는 이런 관심과는 다르다. 오히려 저자의 책이 다루는 내용은, 저자가 중국 최초의 직업 변호사라 부르는 등석의 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른바 '말을 잘 한다(大辯)'는 것은 천하의 행동을 구별하고 천하의 만물을 다 구비하여 좋은 것을 선택하고 악한 것은 물리치며, 그 마땅한 때를 잘 조종하여 공을 세우고 덕을 펼치는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하찮게 하는(小辯)'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른 논리를 펴서 말로 이를 구분하여 말로써 서로를 공격하고 행동으로 서로 치고받아 백성들로 하여금 그 요체를 알 수 없도록 흐려놓는다. 이는 다른 까닭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을 천박하게 운용하기 때문이다."(64쪽)

또 등석은 '말하는 기술' 즉 '설득의 기술'을 논술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자와 말을 나눌 때에는 박학다식함에 의지하여 대화를 하고, 박학다식한 자와 말을 나눌 때는 논변에 의지해야 하며, 말재주가 좋은 자와 말을 할 때는 안정된 태도로 요점에 의지해야 한다. 귀한 자와 말을 나눌 때는 권세에 의거하여 대화를 하며, 부자와 말을 하게 되면 호탕함에 의지할 것이요, 빈자와 말을 하게 되면 이익에 의지할 것이요, 용기 있는 자와 말을 나눌 때는 과감함에 의거하여 대화를 하고, 어리석은 자와 말을 나눌 때에는 달램에 의거하여 대화를 해야 한다. 이것이 말하는 기술이다."(65쪽)

하지만 결국 등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아 그 허물을 피해야 하며,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하지 않아 그 위험을 피해야 하며, 마땅히 취해서는 안 될 물건이라면 취하지 않아야 그 죄를 벗어날 수 있으며, 마땅히 다투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다투지 말아야 그 원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65~66쪽) 이렇게 보면, 저자가 말하는 논변은 언어의 규칙으로서 논리학이 아니라 삶의 논리이자 삶의 논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노자의 "완전한 웅변은 눌변처럼 보인다"는 주장을 최고 경지의 변론이라 하면서 논변 최소주의라고 부른다. 어눌해 보이는 말이 오히려 최고의 논변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논변이란 말 그 자체를 규명하거나 언어의 질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이 오가는 관계, 그 말들이 담고 있는 내용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어떤 '논변'을 요구하는가?

<쟁경-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은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춘추전국시대, 양한과 위진남북조 시대, 당송 시대, 원명청 시대로 크게 나누고, 총 82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장은 인물에 따라 역사적 배경과 중요한 논변을 정리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에 얽힌 이야기들은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어, 마치 역사 소설을 읽는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쉽고 재밌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방대한 책을 왜 구상하고 쓴 것일까? 이 책이 인용하는 자료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는 물론 중국 역사 연구의 기본 사료인 25사, 다양한 철학사상서 전반을 거의 포괄할 정도로 막대하다. 공자나 왕양명 같은 사상가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고대 중국의 제나라 관중, 당의 태종, 청의 옹정제와 같은 정치적 거물의 논변에까지 인물이나 내용 또한 대단히 풍부하다. 이런 방대한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도대체 어떤 말을 우리에게 건네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역자는 첫 독자이자 해설자로서 이렇게 설명한다.

"옮긴이는 개인적으로 (…) 동양 고대사회에서 최고의 논리학자로서 평가받는 논객은 바로 묵자라는 대목에서 일종을 깨달음까지 얻었다. 일반적으로 겸애와 반전주의자로만 유명한 묵자는 자신의 논리학 총론서인 <묵자>에서 논리의 형식과 적용, 논리적 판단의 종류, 변론의 목적과 기술 등을 논술했다. 그리고 논리학은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를 진리를 찾아내어 변론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하였다. 묵자는 반박을 위한 반박과 궤변을 위한 고도의 형이상학이 진정한 논리학이 아니라, 겸애와 평화와 같은 진리나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복무하는 논리학이 참된 '쟁경'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982쪽)

어쩌면 우리는 역자가 깨달은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각종 시사 프로그램에서 사회의 주요 현안을 놓고 대담과 토론을 벌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방송 매체가 늘어난 만큼 그 양이나 주제의 다양성은 이루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이다. 게다가 대학가에서는 이런저런 이름의 토론대회까지 수없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러한 토론이나 대화가 과연 '이기고 지는' 것의 문제일까? 과연 우리는 삶의 문제를 소통하며, 삶의 질을 높이거나 평화와 같은 가치를 높이는 논리학을 갖고 있기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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