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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엘리트'인가, 게토에 갇힌 넷난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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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엘리트'인가, 게토에 갇힌 넷난민인가?

[프레시안 books]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

1. 이론 수입의 종언?

여러 평자가 감탄을 아끼지 않고 한목소리로 바우만을 칭송한다.

"바우만에게 감탄하는 이유는 그의 책이 우리 삶을 직접적으로 설명해주는 언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현란하고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쉬운' 언어로 말이다." (☞관련 기사 : 엄기호, "'왕따'는 '쓰레기'다")

그런 바우만의 책을 읽다 보면, 서구의 '선진' 이론의 수입이 그 시효가 다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론의 추상화라는 매개 없이 그리고 그 추상화를 다시금 지역화/장소화(localization)하고 번역하는 수고 없이 그저 우리 눈앞의 현상들에 직접 '바우만'이라는 메스를 대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얘기다. 더불어 이론을 번역하고 전달하는 매개자인 전문가 집단과 일반 독자들 사이의 위계와 경계도 모호해지게 된다. 이런 흐름은 <피로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로 시작된 한병철의 수용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리퀴드 러브>(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형준·권태우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본래 서구 이론의 수용에는 시간적인 간극 외에도 평평하지 않고 기울어진 지리적 공간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예컨대 '세계체제론'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중심과 (반)주변부 사이의 비대칭성이야말로 이 수용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근대화'란, 서구의 이념형(ideal type)을 가져와서 바로 이곳에 신분과 같은 전근대적 요소들을 녹이고(리퀴드liquid), 그 공백을 계급과 같은 근대적 요소들로 고정시키고 안정화시키는(솔리드solid) 정언 명령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수용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전조가 '지금 여기'의 바우만과 바우만적인 현상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대중적인 사회학자이자 구루라는 평가가 단순히 그의 글쓰기 스타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조형준·권태우 옮김, 새물결 펴냄)의 옮긴이 후기에서 "아카데미즘의 언어와 저널리즘의 언어가 노학자가 도달한 경지에서 결국 같은 언어로 수렴"(343쪽, 이른바 최근 유행하는 아카데미즘의 언어에 대한 비난인 '인문병신체'는 역설적으로 저널리즘의 은어이다)되었다거나, 엄기호의 지적처럼 "상대적으로 쉬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그 이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론 수입을 가능케 한 시공간적 비대칭성의 종언 말이다.

바우만의 사상적 계보를 되짚어보면, 20세기 후반부 영국 사회학을 구축했던 일군의 학자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스튜어트 홀, 칼 만하임, 칼 포퍼 등의 뒤를 잇는 젊은 세대에 속하고, 사회 이론의 '대륙적' 스타일이 지배적이 된 1970~80년대부터 명망 있고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로 평가받기 시작했다.(Mark Davis & Keith Tester ed. , Palgrave Macmilan, 2010) 이런 사회학적 맥락이 생략된 채 그가 한국에서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우만에게 어떤 '수용사'나 '수용론'을 꺼내놓기 난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난감함은 바우만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고 있는 '유동적 근대'(액체 근대)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로컬한 공간과 글로벌한 공간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진단과도 상통한다.

그러면,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그래서 "그의 시 자체보다 그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되는") 심보선은 이 노령의 사회학자이자 구루로 칭해지는 바우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는 바우만의 서간 모음집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의 마지막 두 편지에서 현대 사회학의 위기와 그 위기를 타파할 사회학적 상상력을 읽어낸다.

"사실 바우만은 마지막 편지에서 사회학적 규약을 어기고 있다. 그는 카뮈에 기대어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라고'(<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389쪽)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일종의 '인간 본성론'을 역설할 때 바우만이 행하는 사회학에 대한 약속 위반이야말로 현대의 사회학자가 처한 곤경을 넘어서는 하나의 경로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관련 기사 : 심보선, "거대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응답하라, 희망이여!'")

'자본주의 수용소'의 구조와 그곳의 통치성에 대한 분석 대신에, 인간의 본원적인 저항의 본성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사회학적 규약에 대한 위반인 동시에 그 규약이 당면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얘기다. 그는 구조와 통계 분석에 치우친 기존의 사회학을 개조할 수 있는 여지를 바우만의 글에서 찾고 있다. 이른바 '사회(학)을 넘어선 사회학'.

여기서 신간 <리퀴드 러브>의 또 다른 옮긴이의 서문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우만 독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이 서문은 보통의 것과 달리, 이어지는 본론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바우만에 대한 오독의 염려 때문에 독자를 위해 마련한 매뉴얼(사용지침서)에 가깝다.

"본서의 본격적인 주제와는 무관한 이야기를 에둘러온 것은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 올바른 맥락에서 읽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 감히 이 책이 '힐링'과 '관계의 우울'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 시대에 새로운 희망 찾기의 자그마한 반딧불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바우만 독해를 위한 한 가지 방법',<리퀴드 러브>, 13쪽, 16쪽, 강조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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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 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 ⓒ동녘
그 '올바른 맥락'이란 어떤 걸까? 앞서 바우만과 나란히 언급했던 한병철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옮긴이의 걱정이 그리 지나친 것은 아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론'(☞관련 기사 : 문순표, "힐링과 정의를 원해? '이것은 당신들의 피로가 아니다!'")에 대한 비평에서 지적했듯, 그의 책은 회고해보면 그 이론의 본고장(?)인 독일과 달리 여기선 '자기계발'과 '힐링'의 프레임에서 수용된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수용 방식은 저자의 주장과 맞물려 많은 평자들의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전례 탓에, 옮긴이는 최소한 바우만의 이 책은 "힐링과 관계의 우울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 시대에" 힐링 자체를 힐링시킬 수 있는 메타 힐링의 차원에서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고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이론 수용'과 그것의 가능 조건인 '시공간적 비대칭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에 오히려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바우만의 '유동 시리즈'가 다름 아닌 이 사실을 포괄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이어지는 글은, 어떻게 "바우만의 책이 우리 삶을 직접적으로 설명해주는지"에 관해 지금 여기서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유동적 근대에 들어맞는 현상들과 여기에 제출된 (바우만적인) 비평들을 더듬어 가며 분석해 볼 것이다.

마치 최근 번역 출간된 <리퀴드 러브>의 주인공과 화자가 바우만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 없는 인간'이듯이, 그의 이론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대신에 이곳의 로컬하면서 동시에 글로벌하기도 한 현실로 스스로 현시하고 말하게끔 할 것이다. 그의 유명한 정식을 빌려와 표현하자면, 바우만의 '리퀴드 수용소(收容所)' – 받아들이고 가둬놓는 장소이자 유대인 게토와 같은 집단 수용소의 이중의미에서 – 의 조감도를 눈앞에 그려보는 게 이 글의 몫이다.

2. 바우만과 비판이론 - 물화로서 합리화 그리고 물화로부터 해방

사실 '유동적 근대'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래로 '시민사회론'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전가의 보도처럼 통용되던 울리히 벡의 '성찰적 근대화'나 앤소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의 비판 이론적 버전이다. 즉 근대적 가치들, 예컨대 '미'와 '위생'과 '질서'에 비판의 메스를 대고, 그 가치들과 더 나아가 근대화 자체를 곱씹어보려는 시도이다.

한국어로는 미번역된 1997년 작 <탈근대성과 그 불만(Postmodernity and its Discontents)> 서문에서 바우만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준다. 이 책 제목이 차용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주저 <문명 속의 불만>(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 '문명'이란 근대적 문명이나 문화를 가리킨다. 근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현실원칙으로 고정된 위생이나 질서 등의 가치들과 "사회적 지위의 하락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안전'(security)을 얻었지만, 동시에 개인들이 쾌락과 즐거움을 누릴 자유가 억업당해야만 했고, 이 교환과정에서 일어난 상실이 곧 불만으로 표출된다고 해석한다. "억압된 것은 귀환하기" 때문이다.

이 교환 속 상실은 탈근대의 사회에서도 그 상실된 가치들의 자리만 뒤바뀐 채 고스란히 일어난다. 근대 사회와 달리 개인들이 각자의 행복을 맘껏 누릴 자유는 획득했지만, 대신에 안전 보장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열망은 공포를 유발하는 '위험한 개인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상태, 즉 '안전'(safety)을 향하게 된다. 내 자유의 장애물은 바로 옆의 이름 없는 불특정 타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회국가'(social state)에서 '개인 안전 국가'(personal safety state)로.

근대 사회와 탈근대 사회를 매끄럽게 나눌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이 해석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출몰한 '안철수 현상'에 그대로 적용가능하다. 예컨대 박권일은 이 현상을 "압축적 근대화로 인한 피로감에 지친 개인들의 정상근대에 대한 열망"으로 읽어낸 적이 있다.

"정상근대(正常近代)에 대한 이런 열망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열망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든 사회주의이든 공히 현실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이념이다. 그러나 정상근대에 대한 열망은 그런 종류의 변화를 추동하는 정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탈구된 현실을 안정화시키려는 정념에 가깝다."(박권일, '세대와 정당정치 – 정치적 세대동명의 역사와 의미', <황해문화>, 2012년 봄호, 66쪽)

아마 바우만이라면 이 현상을 두고, 탈규제의 시대에서 쾌락원칙에 따라 맘껏 살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짊어져야 할 선택과 리스크의 책임을 현실원칙인 공공성의 영역이 대신 떠맡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고쳐 쓸 것이다. "현실에는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나의 자유를 규제해 달라."

▲ 울리 에델 감독의 <바더 마인호프>

이런 '정상근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유동하는 (탈)근대'는 비판이론 2세대인 하버마스가 1970년대 '물화로서 합리화'를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 대안으로 내놓은 '의사소통적 이성'과 그 비판 대상을 공유한다. 당시 유럽에는 일본의 적군파처럼 '국가 대항 테러'가 빈번했다. 영화 <바더 마인호프>의 주제이기도 한 이 테러의 이론적 원흉으로, 독일에서는 칼 슈미트와 더불어 비판이론이 지목받는다.

그리하여 젊은 하버마스는 이러한 비판의 포화로부터 자신과 비판이론을 구해내기 위해서 앞 세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대한 부친 살해를 감행한다. 베버의 적자였던 루카치가 정식화한 자본주의적 '물화로서 합리화'와 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제시된 '프롤레타리아의 총체적 의식' 그리고 국경 너머 소비에트의 현실사회주의가 구현하고 있는 총체적 합리성 대신에 아도르노가 고안한 합리성 이전의 미학적 차원(미메시스) 모두 그가 결별하려고 했던 '독일적인' 것들이었다.

'의사소통이론'의 맹아가 담겨 있는 하버마스의 편지를 비롯해서 당시 테러로 인한 '공화국의 위기'를 걱정하던 독일 지식인들이 시민들에게 보내는 1977년 서간 모음집의 제목이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편지들(Briefe zur Verteidigung der Republik)>이라는 점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나중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을 보충하기 위해 적극 수용된 푸코의 미시적 권력이론, 더 나아가 통치성 이론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대항 테러'에 대한 비판에서만큼은 하버마스와 견해를 같이 했다.

마치 도버해협 건너 멀리서 프랑스 혁명을 지켜보던 버크처럼, 영국에서 연구하던 바우만은 고전적 비판이론이 위기를 맞게 되는 상황을 한 마디로 "소비자 스타일의 비판이 과거의 생산자 스타일의 비판을 대체했다"(<액체 근대>(이일수 옮김, 강 펴냄, 43쪽))고 회고한다.

"다시금 과거를 돌이켜볼 때 비판이론은, 그 특유의 불멸의 전체주의적 기질을 짊어진 것으로 가정된 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희석시키고 중화하는 것, 가장 좋게는 그런 경향을 완전히 잠재우는 것이 그 의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율성, 선택의 자유와 자기주장을 할 자유, 그리고 남과 다를 권리와 그 다름을 지속할 권리가 비판이론의 주요 목표였다. 마치 연인이 결국에는 서로의 애정을 다시금 확인하고 결혼 선서를 하는 순간 드라마가 끝나면서 '이후 행복하게 살았다'며 축복된 시작을 알리는 할리우드 멜로영화처럼, 초기 비판이론은 강력한 힘으로 옥죄는 일상의 손아귀를 비틀어 개인의 자유를 떼어내는 것을, 만족을 모르는 전체주의적인 획일화와 단일화의 충동으로 고통 받는 사회의 강철같이 단단한 상자에서 개인이 벗어나도록 하는 것을 해방의 궁극적 지점, 불행의 종식, '사명의 완수'의 순간으로 간주했다."(바우만, 앞의 책, 44~45쪽)

바우만이 보기에 고전적 비판이론의 위기는 다른 게 아니라 비판의 대상과 목표가 낡아버린 데 있다. 무겁고 견고한 전체주의적 경향이 다분한 근대성을 녹이는 게 이전 비판이론의 과제였다면, 제도의 유연화라는 표제 아래서 신자유주의가 이 과제를 선취해 버린 것이다. 바우만의 '유동적 근대'란 이 역설과 당혹감에 대한 해명이다.

유럽의 1970년대 이후 역사가 증언하듯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성취해 낸 역설적인 해방, 즉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이것과 긴밀하게 연동하는 '소비자주의'의 등장은 관료주의적 합리성과 총체성에서 개인성을 해방시키는 동시에 무력화시킨다. 마치 '국개론(國犬論)'에 함축된 계몽과 훈계의 역설처럼, 지금의 풍요와 소비에 만족하는 개인들에게 해방의 '역설'은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잃어버린 공공성의 회복'은 바로 이 맥락에 있다. 녹아서 또는 녹여서 흐물흐물해진 근대적 제도와 공공성의 영역들을 다시 고정시키고 안정화시킬 방도를 찾는 것, 이것이 비판이론의 전도된 과제라고 바우만은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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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체근대>(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강 펴냄). ⓒ강
이 얘기가 서구 유럽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한국의 진보와 급진주의의 표어인 '물화로부터의 해방'은 여전히 변종 계몽주의의 형태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예컨대, 1990년대 문화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차원에서 자기계발을 고찰했던 서동진은 자기-계발에서 '자기'만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도대체 상품물신처럼 이데올로기로 물화되어 거기서의 해방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마치 그 안에 묻지도 따질 수도 없는 어떤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것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믿듯이, 우리는 "자기"라는 대상을 믿는다. 자기계발에서 중요한 것은 실은 계발이 아니라 자기라는 것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서동진, '용감한 신세계의 눈부신 알리바이, 자기-계발', <나-들>, 2013년 5월 제7호)

놀랍게도 그는 SF영화에서 거듭 변주되는 '자기 정체성(동일성)에 대한 회의'에서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의 극화'를 발견하고, 이 극화는 "자기의 동일성과 비동일성이라는 자기의 분열을 탐색하면서 자기 삶 밖에 존재하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캐묻는 자기가 아니라 그 어떤 외관으로 변신하고 복제된다 해도 변함없이 자기로 존재하는 멍청한 자기"에 불과하다고 디스토피아적으로 결론짓는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에게 '자기'와 '자기'의 계발은 벗어날 수 없는 트랙이자 무한동력장치다.

이처럼 '물화로부터의 해방'에서 오히려 '물화'를 더 강조하는 경향, 즉 그 다층성으로 인해서 해방이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역설하는 뚜렷한 경향은, 바우만의 말대로 견고한 토대들이 녹아 내린 그 자리에 선뜻 '전위'와 '전위 주체'를 꺼내놓기 망설여지는 상황을 반영한다. 물론 '강남좌파'처럼 '전위와 해방의 역설'에 대한 목록을 무한히 풍성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더 넓게 보아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역동성과 그것으로 성취된 '역전된 반혁명'(파올로 비르노) 내에 자리한다. 정작 바우만은 신자유주의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비와 구별되는 '소비자주의'를 진단할 때, 법적으로 명시된 개인성을 실현할 수 없는 데서 급습하는 '역량 부족에 대한 공포'를 포스트-포드주의적이고 포스트-테일러주의적인 형태라고 말할 때, 그는 정확히 신자유주의의 역설을 우회해서 건드리고 있다.

보통 유럽에서는 "사회 전체가 공장이 되었다"(네그리)처럼 68혁명 이후의 상황을 신자유주의의 '역전된 혁명'이 성취한 것으로 얘기한다. 즉, 공장 내 저항을 승인하거나 부인했던 이원론적 생산공장에서 이제는 '고공투쟁'처럼 공장 내 저항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일원론적 '통합공장'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체제에서는 어떠한 교환가치로도 책정될 수 없는 '잉여'로서의 감성적인 네트워크가 공장과 사회를 일원화하고, 역설적으로 이러한 통합은 노동 자체를 유연화하고 배제시킨다. 누구든지 가치생산의 폭넓은 네트워크에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만 그 가치가 교환의 장 안으로 포함된다는 보장은 불확실하다. 결국 "열정조차 아니, 열정만이 노동화되는 것이다."

68혁명 이후의 추이와 그 몰락에서 볼 때, 한국의 80년대 급진노동운동은 유럽의 것과 어느 정도 포개어진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촉발되어 1987년 체제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최대강령주의'와 '이데올로기의 과잉'(최장집)으로 그리고 '노사관계 무시'(송호근)로 인해 더 많은 민주주의에 장애가 되었다고 비판받는 바로 그 운동 말이다.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 앞에서 좌절했던 운동 주체들 중 누구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고, 누구는 이곳에 남아 '맑스 역시 근대인이었다'는 반성을 거치고서, 이른바 탈근대나 온갖 '포스트 담론'의 고원으로 훌쩍 도약해버린 뒤, 지금은 황무지로 남아있는 그곳 말이다.

"이를 우리는 '근대인'이라고 흔히 부른다. 지배자 없는 지배를 위해, 명시적인 지배 없이도 주어진 규범과 규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근대적 주체. (…) 반면 맑스주의자로서 내가 알고 있는 사회주의적 인민 내지 사회주의적 주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 결코 그런 것이어선 안 되었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 내지 전체 사회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가족을 넘어서 전 사회적인 범위로 코뮨적 관계를 확장해가며, 그 관계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새로운 유형의 주체가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전하는 기사들 탓인지 몰라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주의 사회에 사회주의적 인민이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오히려 자본주의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근대인의 모습이 훨씬 더 극적으로 과장된 양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적 사회주의' – 근대인들로 가득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부를 것이다." (<맑스주의와 근대성>(이진경 지음, 문화과학사 펴냄, 1997년, 18쪽))

3. 급진노동운동의 대중화 – '공주 인문학'과 '진주녀'

얼마 전 <한겨레>는 창간 25주년 기획으로 새로운 주체를 명명/발명했다. '진주녀'(進主女). <한겨레>가 정의하는 그 뜻은 다음과 같다.

"[명사]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20대 여성. 기존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좇아 자신의 삶을 개척." (☞관련 기사 : '20대 '진주녀', 발랄한 상상력으로 대안적 삶을 개척한다' )

이에 대해 여러 평자들이 진보적 꼰대들의 '훈계성 명명'이나 '대학 내 진보성향의 문화연구'의 산물 등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이 글의 논의에서 흥미를 끄는 부분은 이러한 진보적 주체에 대한 '젠더적 명명'이 대중운동으로부터 고립되었던 1980년대 급진노동운동의 대중적 우회로 중 하나가 날 것으로 드러난 게 아닐까 하는 점이다.

'진주녀' 이전에도 진보적 주체의 젠더화, 즉 '공부에 관심 없고 술자리를 좋아하는 남성들'과 차별화되고 세대 간 격차를 뛰어넘는 '순수하게 공부하는 여성들'에 주목한 <경향신문>의 특집 기사가 있었다. 바로 발명된 '공주 인문학'이다.

"'공주인문학' 참가자들은 자기 삶의 역량을 강화하는 걸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가장 순수한 학문하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부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선다. 공부에 관심없는 중년 남성들, 이력서를 위해 억지로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에 비해 빠른 속도의 발전을 보여준다."(☞관련 기사 : '앎을 실천하는 공주인문학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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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가 되는 삶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일련의 명명이나 발명은 바우만이 얘기했던 '유대 없는 인간'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만들고 흩어진 개인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와는 정반대편에 페미니스트 학자 정희진이 있다. 최근 그녀의 글에서 줄기차게 그런 보편적인 유대가 낡았음을 적극 인정하는 제스처를 엿볼 수 있다.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 속 '유대 없는 인간'의 상태를 "친화성에서 친족관계로의 안전한 항구로 가는 다리"가 부서진 것으로 설명하고 그러한 유대가 불가능함을 글로벌한 공간에까지 확장시키는 지점에서, 정희진은 역으로 "'님의 침묵'에서 님은 곧 자아"(☞관련 기사 : '정희진의 어떤 메모 : 님의 침묵')이고, "내가 변혁시키고자 하는 사회는 내 몸과 혼재된 나 자신이다"(☞관련 기사 : '정희진의 어떤 메모 : 혁명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한다. 바우만의 진단대로 위기에 빠진 친족관계망이 '상속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의 장소가 되어버린 상황(한국형 '가족주의')에서, 그녀는 이 현실을 타개하는 보편적인 유대 대신 산발적으로 '지금 일어나는 눈앞의 혁명'(저출산, 동성애자의 결혼권 주장, 병역 거부, 높은 이혼율 등)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자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나 자신'이나 '자아'가 전면에 등장한다.

바우만이 신작의 전반부에서 리퀴드한 관계와 사랑에 대해 논하다가 후반부에서는 돌연 공간과 장소에 대한 메타포를 사용하면서 글로벌화된 도시와 그 안의 게토들을 논하는 '전회'는 이 지점에서 사뭇 흥미롭다. 이 전회는, 앞서 인용한 서동진의 '자기'의 물화된 상태에 대한 역설이나, 정희진의 '보편적 유대'에서 '자기'와 '자아'로의 몰입에 대한 역진(逆進)의 제스처처럼, 하나의 엇비슷한 흐름으로 목격되는 진보적 급진주의의 패퇴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더 나아가 이런 제스처들은 수많은 해방과 변혁 기획들의 실패에 대한 자기 합리화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방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 만족하는 개인들'을 하나씩 호명하면서 말이다.

4. 담장 안팎 '게토'와 '가장자리'

마뉴엘 카스텔의 '흐름들의 공간',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흐르고 이동하는 공간들'을 도입해서 바우만은 글로벌화된 도시가 사로잡힌 '이중구속'에 주목한다. 즉 이제는 특권화된 노마드적 삶을 영위하며 전 지구를 맘껏 이동하는 특정 인구와 금융 자본을 통해서 "배제의 위협을 통한 새로운 글로벌 위계질서"(<리퀴드 러브>, 230쪽)가 도입된다. 이 위계질서는 국경이라는 담장 안팎의 영토를 새로운 계급적 질서에 의해 재편하고 재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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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하는 공포>(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 ⓒ산책자
우선, 담장 너머의 상황. 초국적 자본을 등에 업고서 맘껏 월담하는 글로벌 엘리트와 상대적으로 선별 가능한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흐름들을 선택적으로 막아내고, 여러 근대적 주권의 형태를 수호하는 행위를 낳는다. 그리고 담장 안에는 압도적인 글로벌한 흐름들을 중심으로 스스로 울타리치고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안전한 게토와 이것에 덩달아 가둬져서 배제된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게토"(앞의 책, 244쪽)로 게토의 차별화와 분리가 일어난다. 요컨대 '자발적 게토'와 '수용소로서 게토'. 이러한 담장 안팎의 이중적 위계화를 바우만은 다음처럼 설명한다.

"하지만 그것들[도시 장벽들]은 이제 도시 바깥의 적들로부터 도시와 도시의 모든 주민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도시 거주자들을 나누어 분리시킨 다음 이제 적의 입장이 된 서로가 각자를 방어하도록 하기 위해 세워졌다."(246쪽)

흥미롭게도 도심의 '거리 철학자'에서 제주도 '골방 철학자'로 또는 근대의 '가장자리'(홍세화)로 자발적으로 내려간 철학자 김상봉은 그 외진 곳에서조차 중국 부자들의 부동산 투기와 투자를 비롯하여 월담하는 글로벌 엘리트들의 쇄도를 목격한다. 심지어 제도적으로 장려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오랫동안 천착해 온 그만의 '경제민주화'를 로컬한 근대 네이션-국가 틀 너머 글로벌한 차원에까지 발전시킨다. 바우만이 "오늘날의 글로벌화하는 세계에서 정치는 점점 더, 열렬히, 자기의식적으로 지역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고 그 로컬한 수준의 정치의 무력함을 언급할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변(餘邊)', 즉 가장자리에 처해 있는 반도의 경제 철학자는 두 영역이 긴밀하게 구속되어 있음을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경제민주화를 재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제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란 이런 역사적 문맥 속에서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나라 안의 불평등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경제 주권의 관점에서도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제이다. 경제학자들은 국제 기준에 맞게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자거나 정반대로 재벌의 기득권을 보장해주자고 제안하지만, 이는 구한말 외세에 기대어 나라를 개혁하려 하거나 반대로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의 주권을 지키려 했던 시도와 똑같이 불가능한 망상일 뿐이다." (☞관련 기사 : '창간 릴레이 기고 생각하는 나라 6 : 노동자에게 기업 사외이사 선출권을')

그리고 경제주권수호를 위한 하나의 모범적인 대안으로 '이건희 이후'의 글로벌하고 로컬한 주식회사 삼성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 왔던 '삼성공화국'에 대한 비판과 '주식회사의 민주적 정치체화', 즉 종업원들의 의사결정권과 경영참여권 보장을 결합하여 이건희 이후의 새로운 삼성을 그려낸다.

5. 일베와 큐브 탈출

이 맥락에서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은 글로벌화된 근대국가 안팎에서 게토화된 공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포에 대한 하나의 인류학적 보고서로 읽을 수 있다.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를 '사냥꾼'의 시대라고 묘사할 때, 이 애니메이션 주제가의 한 구절, "성벽 저편 먹잇감을 도륙하는 사냥꾼"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사냥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사냥감이 될 것인가?"의 강제된 선택.

▲ 아라키 테츠로 감독의 <진격의 거인>. ⓒ諫山創・講談社/「進撃の巨人」製作委員会

예전에 한 잡지에 실린 에세이에서 '박근혜의 공화주의' 더 정확히는 '공포와 안전의 변증법'을 논한 적이 있다.('토포스의 귀환: '운동 이후'의 게토화와 애도', <인문예술잡지 F>, 2013년 8호, 41~56쪽, 바로 가기) 박근혜 체제에서 '행정자치부'가 행정'안전'부로 바뀌고, '4대악 척결'과 '안전한 연애'를 위한 스토킹 규제 등이 주요 의제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이 변증법은 더 강화되고, '공포관리'가 중요한 통치기술로 대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박근혜식 복지국가란, 이러한 '일신의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견고하고', '수직적인' 공포관리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바우만이 근대적 공포와 구별시켰던, 여기에서 빠져 나가는 공포 즉 '보호의 범위가 불명확한 상황'에 대한 공포나 '역량 부족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이다. 한마디로 빈민구제처럼 이전의 '공동체 게토'에서나 가능했던 방식이 아니라, '하이퍼 게토'처럼 글로벌 엘리트들이 '합법적'으로 강탈한 뒤 썰물처럼 빠져 나간 자리에서 국가의 개입이 충분치 않다고 느낄 때, 또는 그 자리에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는 공위시대(interregnum)"가 찾아올 때,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공포에 대한 질문이다.

바우만의 진단과 달리 이곳에서는 사이버공간이 순수한 프라이버시를 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인 성격이 극대화되는 공간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와 그 전신으로 볼 수 있는 '디시'(디시 인사이드)에서, 특히 두 공간의 차이에 '권력과 분리된 정치'의 성격이 극대화된다.

먼저 디시. '유대 없는 인간' 또는 이 현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들이 무기력해지고, 오히려 긍정되는 현상을 네트에서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디씨>(이매진 펴냄)의 저자인 이길호는 디시라는 네트종족이 추구하는 평등주의의 성격을 다음처럼 규정한다. 유저들 간의 결속과 유대가 평등주의에 장애가 되고, 즉 다른 사이트로부터 '뉴비들'을 유입해서 새로운 글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하기 때문에, 게시판 유저들 간의 친목이나 유대는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관련 기사 : '사이버 언어의 위계화 거부는 존재의 함성')

즉 "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까이고 까여서" 사회적 유대나 결속이 해체된 평등주의를 실현시키고자 했다는 얘기다. 이 디시적 평등주의는 바우만이 와캉의 논의를 빌어와 '하이퍼 게토'와 세심하게 구별했던 '공동체 게토', 즉 "상대적으로 자족적이고 자기-생산적인" 의식적 준거틀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굳이 실제 사회의 준거틀을 차용하고 모방하거나, 반대로 그 틀을 비판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여느 네트공간처럼 쾌락원칙을 충실히 따르는 '열린 축제'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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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디씨>(이길호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그러나 디시의 한 게시판에서 출발해 급성장한 일베의 경우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력에 의해 우파의 '전위'로 치켜세워지고 정치적으로 동원된 이 게시판은 지금은 좌우의 피안에 완전히 버려진 도시, 즉 게토로 전락해 있다. 더구나 여러 비판들과 비평들 너머 법적 판단과 분쟁의 도마 위에까지 올라와 있다.

바우만이 구별했던 두 게토의 형태, 즉 '공동체 게토'와 '하이퍼 게토'를 빌려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디시가 호혜적인 쾌락원칙 – "내가 향유하는 만큼 너도 향유해라" - 에 충실한 '공동체 게토'에 국한된다면, 일베는 두 게토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내부의 준거틀인 자신들만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게시물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네트 너머 외부의 준거틀인 사회적 합의를 위협하고 부정한다.

예컨대 '민주화'와 '산업화'를 선택적으로 전도시키거나, 80년대 급진노동운동의 기원이기도 한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시키고 그것을 관철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진보세력은 이 뒤집힌 판단을 교정하고 원위치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고, 반대로 보수세력은 일베를 빌미로 '표현의 자유'의 전면적이거나 제한적인 보장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일베는 이런 보수·진보 또는 좌·우의 피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우만이 지적한 것처럼 유동적 근대의 역설이 견고함과 유동성 사이의 비가역성에 있다면, 즉 유토피아적 충동으로 이전의 낡은 가치들을 용해시킨 자리에 아직 새로운 가치들이 착근되지 않았고, 이제 이러한 유동성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되어 그 자리가 텅 비어 있다면, 한국 근대화의 산물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터전에서 자란 일베에서 어떤 고리가 녹아 흘러내렸고, 그 탈구된 자리가 새로 견고한 고리로 채워졌는지의 여부에 주목해야만 한다.

여기에 박해천이 정식화한 '큐브'가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는 도시 거주 대학생들의 폐쇄계에 해당하는 정육면체 '방'인 '큐브'와 이 큐브들의 폐쇄계를 통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인구 유입으로 인한 도시 빈민가의 부분 고급화)이 도시의 게토화를 막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 주장에 수긍한다면, 일베를 두고 비슷한 유의 얘기를 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사이버 큐브이자 동시에 게토인 일베는 그러한 도시 게토화의 저지선이 언제든 뚫릴지 모른다는 공포, '실시간(real-time)'으로 가장 먼저 도착한 이 공포에 대한 전조가 아닐까? 더 나아가 일베 자체에 '큐브의 게토화'가 직접 구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교육을 통해서든 부모로부터 집을 증여받거나 대출을 받아서든, 어떤 식으로도 '큐브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 탈출이 완전히 차단되었을 때의 공포 말이다.

이 지점에서 <진격의 거인>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일단 인류의 공공의 적인 거인을 괄호치고서, 성 안의 두 부류, 즉 왕이 있는 내성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헌병들과 성 밖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전위부대인 사냥꾼들 사이의 위계와 차이에 주목한다면, 아마도 일베는 맘껏 월담하는 상층부 엘리트들과, 그들의 '인증'을 평등주의의 구현으로 여기고 마지막 버팀목으로 그들과 이 엘리트 평등주의에 기대고 있는 넷난민, 둘로 나뉠 것이다. 그들을 '전위 주체'로 호명하거나 '불쌍하거나 위험한 개인들'로 여기는 엘리트들과 거기에 동원되는 넷난민들.

그러면 바우만은 이들에 대해 뭐라고 얘기할까? 여느 지식인들처럼 '전위'와 '해방'의 주체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게 될까(물론, 전도된 형태로)? 아니면 근대법이 성문화하고 해방시킨 개인성을 도저히 현실화시킬 수 없음에 대한 '역량 부족의 공포'에 떨고 있는 개인들을 목격하게 될까? 이도저도 아니면, 일본의 넷우익이나 유럽의 네오나치들처럼 민족주의의 보편화된 형태로서 인종주의의 새로운 판본을 읽어낼까? 이제 판단은 우리의 몫이다. 이론 수입이 종언된 지금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마 오늘날의 난민들이 전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날이 올 것이다 – 역외지대의 삶의 맛 그리고 이미 글로벌화되고 만원이 된 이 지구의 거주민들의 공통의 주거지가 될 임시성의 완고한 영속성을 탐구하는 전위 말이다."(<리퀴드 러브>, 319쪽)

"인종주의는 '재탄생된 초기 근대 민족주의'가 아니다. 사실,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의 정반대이다. 정치적 통합의 힘이었던 민족주의의 실현가능성이 몰락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거울상 반영'이다. (…) 미요시의 표현에 따르면, '파편화하고 파편화된' 인종주의 운동들은 자율적인 민족들의 구축이 아니라, 정치경제적인 민족적 기획들에 대한 기대와 책임을 포기하기 위해 새롭게 각성된 주체들이다."(지그문트 바우만, 'Utopia with No Topos', , Vol. 16 No.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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