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소녀경>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소녀경 책이 잇따라 출간되고 판매도 활발했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신혼부부들에게 <소녀경>을 선물하는 붐이 일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소녀경>에 대해서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황제와 소녀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진 성생활 지침서라는 것도 웬만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새로이 성생활을 시작하는 신혼부부들에게 동양 전래의 성생활 지침서 <소녀경>을 선물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 수 있었다.
출판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선물로 주고 받을 기회가 많다. 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가져오니 서점에서 사는 것보다 우선 비용이 싸고, 책을 선물로 주면 상대방과 무언가 지적인 교류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편집자나 저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보다는 본인의 생각과 노고가 담긴 책을 주는 것이 더 정성스럽다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 <황제 소녀경>(최창록 옮김, 선 펴냄). ⓒ선 |
필자 또한 출판계에 발을 걸치고 있으니, <소녀경>이라는 제목이 좀 그렇긴 하지만 어쨌거나 책을 선물로 주고받는 풍토가 생겼다는 점에서는 개인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그 붐은 얼마 가지 못해 사그라지고 말았다.
우선 신혼부부라고 해서 이제 성생활을 시작하는 커플이라는 가정부터가 잘못되었다. "자 이제 결혼하니 본격적으로 성을 탐구해보기 시작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요즘 과연 얼마나 될까? 결혼이란 활발한 성생활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결실이라고 해야 마땅할 판에 '섹스 잘하는 법'을 이제야 선물한다니, 뒷북도 한참 뒷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소녀경>의 내용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성생활 지침서'라고 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내용은 '어디를 어떻게 애무하면 상대방이 흥분한다' '오럴 섹스 시 손은 어떻게 사용한다' '여자 다리를 어디에 올려놓고 어떤 체위를 취하면 삽입의 느낌이 강해진다' '오르가즘을 쉽게 느끼게 하려면 피스톤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한다' 같은 항목일 터이고, 조금 더 하드코어적으로 간다면 '애널 섹스는 이렇게 하라' 혹은 '상대를 묶어놓고 애무할 때엔 어떤 점을 주의하라' 같은 내용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글을 읽어 보자. 황홀경에 이르는 섹스 비법을 기대하며 책을 펼쳐본 사람이 보게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녀가 황제에게 설명했다. "여성에게 베개를 높게 베도록 하고, 두 다리를 벌리게 합니다. 남성은 그 가랑이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27회를 운동한 다음 중단합니다. 이 체위를 사용하면 남성의 기를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여성의 냉증을 고치려면 이 체위로 하루에 세 번씩 행하여 20일이 되면 완치됩니다."
<소녀경> 등의 방중술 책에서 마주하게 되는 내용은 쾌락을 찾아 장도를 떠나는 남녀에게 전해주는 탐험 안내가 아니다.
왕복 피스톤 운동을 27회 한 이후에 중단하라는 것이 위의 지침이다. 각자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으나, 1초에 1회 왕복 피스톤 운동을 한다고 하면 딱 27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건 너무 허탈하니 조금 느긋하게 2초에 한번이면 54초이고, 3초에 한번이라도 1분 11초에 끊을 수 있다. 이 감질나는 짓을 하루에 무려 세 번을 하란다. '워밍업'에 드는 시간을 고려하면 이 배꼽은 배보다 열 배는 더 클 것이다.
이 책에서 설파하는 또다른 가르침은 되도록 사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27회 왕복하기를 하루 세 번씩, 20일간, 사정하지 않고….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매뉴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쪽 다리를 비틀어 반대쪽 무릎 위에 올리고 양 손으로 세운 다리의 허벅지 뒤쪽을 잡아 호흡을 내쉬면서 지긋이 당겨준다. 호흡을 들이마시며 풀었다가 다시 내쉬며 당겨주기를 반복한다. 10회를 한 세트로 하여, 오전 오후 각 3세트씩 시행한다.
이것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 <소녀경> 및 그 속편에 해당하는 <현녀경> <옥방비결> 등 전래의 서적들은 섹스 가이드가 아닌 바로 건강체조 안내서인 것이다. 다만 운동의 도구가 러닝머신이나 벤치프레스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 신윤복의 춘화 |
이 점은 '정력'의 개념을 논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력'에는 직접적인 성기능도 있지만 전신의 건강을 아우르는 더 큰 개념이 포함되어 있음은 필자의 지난 연재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고, 그 근원이 바로 위와 같은 문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녀경>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방중술'이라는 단어부터 시작하자. 뭔가 신비롭고 아스라한 이 단어의 느낌과는 달리 방중술의 한자는 房中術이다. 방에서 구사하는 테크닉이라는 뜻이다. 방에서 섹스만 하는 것은 아닐 터이고, 굳이 따지자면 뜨개질을 하거나 십자수를 하는 것도 방중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필자도 이 글을 방중에서 쓰고 있다) '교접술'이라고 하자니 민망해서 이렇게 애둘러 표현했을 것이다. 침대에서 쿨쿨 자는 장면을 '베드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저 사람은 방사에 능하다"라고 할 때의 방사(房事)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여서,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사정(射精)할 때의 '사'자와는 관계가 없다. 방에서 글 쓰는 행위도 방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면 필자도 누구 못지않게 방사에 능하다 자부하겠으나, 애석하게도 그런 뜻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소녀경>에 나오는 소녀는 누구인가? 필자는 처음엔 어린 여자, 한때 속된 말로 '영계'라 불리는 소녀(少女)인 줄 알고 '어린 것이 뭘 그리 잘 안다고 황제한테 이래라 저래라 한단 말이냐'라고 생각하였으나, 소녀경의 소녀는 少女가 아닌 素女이다. 素女는 도교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의 성 이론가로, 채녀(采女), 현녀(玄女) 등과 함께 섹스에 통달한 후 그 비기를 전수해주는 여성 중 한 명이다. 그러니 소녀는 어린 여자가 아니라 사실은 할머니일지도 모른다. 소녀가 몇 살이라는 이야기는 없다.
▲ 신윤복의 춘화. |
<소녀경>은 소녀와 황제 사이의 대화록이다. 황제가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고 소녀가 직접 답하거나, 아니면 팽조(彭祖)라는 사람에게 찾아가 물은 후 황제에게 전해주는 형식이다. 그 과정에서 소녀가 팽조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애꿎은 채녀를 시켜 팽조를 인터뷰하게 하기도 한다. 황제가 직접 팽조한테 물어보면 될 것을 왜 굳이 여자를 중간에 끼워서 이야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야한 이야기를 여자랑 하고 싶어서였을까? 팽조 또한 도교에서 내려오는 신선 중 한명이기에 산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게 필자의 추측이다.
<소녀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첫 시작이다. 첫 문장에서 황제가 소녀를 불러 묻는다.
"내 요즘 기운도 없고 건강 걱정 때문에 불안하고, 여러 모로 심신이 불편하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요즘 세상이라면 '폐하, 잠은 잘 주무십니까? 운동은 규칙적으로 하십니까? 혈압은 정상입니까? 혈당 체크는 하십니까? 따로 드시는 약이 있습니까?' 등의 대답이 나왔겠지만, <소녀경>에서 소녀는 첫 마디부터 대뜸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이 쇠약해지는 것은 모름지기 남녀간 음양교접의 원리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문장 또한 의미심장하다.
"불이 물을 이길 수 없는 것과 같이, 남자는 여자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夫女之勝男,猶水之滅火)."
최근 출간된 책들 중에는 "남자의 정력은 여자를 이기지 못하는 법입니다"라고 번역된 경우도 있으나, '정력'이라는 단어는 중국에 없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원문에는 여자가 남자를 이긴다고만 되어 있다.
어쨌거나, 이후 소녀는 남녀 교접의 원리와 법도에 대해 길게 설명한다. 황제는 원래 소녀를 불러서 야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의도가 아니었으나 대답이 그쪽으로 흘러가니 자연스레 이런저런 성적 질문을 쏟아놓게 된다. 사실 여자가 야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즉 <소녀경>은 첫 설정 자체가 건강 상담인 셈이다. 젊은 신혼 남편이 볼 책이 애초부터 아닌 것이다. 1984년에 문교부에서 발간하여 전국 학교에 하달한 '학생도서지도 도서목록'에 <소녀경>이 포함되어 당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는데, 사실 그 내용이 건강 지도 도서인 셈이니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반면에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4년에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소녀경>을 '청소년 유해도서'로 선정하는 정반대의 결정을 하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시끌시끌했었다.)
▲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는 <소녀경>이나 <카마수트라>에서 '그 장면'을 가져온 것이 아니냐는 허황된 추측을 양산했다. |
<소녀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고, 다만 마치기 전에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한 부분만 소개하고자 한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오상(五常)'이라고 하여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에 대해 외운 기억이 있다. 그 유명한 공자님 말씀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이 바로 이것이다. 인은 측은지심이요, 의는 수오지심이요, 예는 사양지심 운운하는 대목이다. (그렇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다.) 심성이 어질고, 정의감이 있어야 하고, 예의를 지키며, 옳고 그름을 잘 따져야 하고, 믿음을 줄 수 있어야 군자가 된다는 것이 유교의 가르침이다.
<소녀경>의 소녀 또한 이 대목을 차용한다. 남성의 성기가 갖추고(?) 있는 다섯 가지 덕목이 있으니 바로 인의예지신 이라는 것이다. 무릇 음경이란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기관이니 이것이 바로 어짊(仁)이요,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은 의로움(義)이고, 마디가 있어 기둥과 귀두로 나누어진 것은 예의(禮)이고, 발기 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형상이 되는 것은 곧 지혜로움(知)이고, 성욕이 생길 때 일어나고 사라지면 사그라드는 것은 믿음(信)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기를 가지고 있는 남성이라면 이 다섯 가지 덕목을 실천해야 한다고 소녀는 설명한다. 베풀고자 하는 마음가짐(仁), 어느 정도의 절제(義), 반면 일단 섹스할 때엔 법도(禮)를 지킨다는 지혜(智)를 행하면 믿음(信)을 얻는다는 것이다.
같은 문화권에서 융합과 반목을 거듭했던 도교와 유교가 남성의 성기를 무대로 멋지게 만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또한 이 대화의 주체가 천하의 난봉꾼이나 플레이보이가 아닌 황제라는 점에서, 필자가 지난 연재(바로가기☞ 한국 남성들은 왜 '김정일 정력제'에 열광했던가?)에서 언급한바 정력과 권력 사이의 친화성에 대한 단초도 또한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문화에 깊은 영향을 남기고 있는 <소녀경> 및 그 유사 문헌들의 가르침을 다음 회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