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읽기 시작한 책이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권남희 옮김, 은행나무 펴냄)였다. 이 소설은 나올 때부터 꼭 찍어서 마음속에 담아둔 책이었다. 심지어 몇몇 지인에게는 '읽지도 않고서' 추천도 했다. (나는 종종 이런 짓을 하곤 하는데, 특별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가끔은 "재밌게 읽었다"는 반응도 즐긴다.)
10여 년에 걸쳐서 국어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소재 자체부터 얼마나 흥미로운가? 전작을 신통치 않게 읽었던 미우라 시온이었지만, 이번만은 재미는 보장하리라는 생각에 설렜다. 출판사 사재기에 시치미 뚝 떼며 '절판' 운운하는 한국의 그렇고 그런 작가들이 그렇고 그런 소재의 이야기를 우려먹는 것에 지쳤던 터라 더욱더 그랬다.
(<배를 엮다>는 영국의 <옥스퍼드 영어 대사전>을 만드는 과정을 다룬 사이먼 윈체스터의 <교수와 광인>(공경희 옮김, 세종서적 펴냄, 2000년)과 <영어의 탄생>(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 이후에 오랜만에 나온 사전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끌렸다. 물론 고지식한 윈체스터의 책은 이 책의 재미에 비할 바가 아니다.)
▲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흥미로운 사실도 알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과 같은 국가가 편찬한 국어사전이 일본에는 없단다. 국가가 후원하거나 아예 발 벗고 나선 영국의 <옥스퍼드 영어 대사전>이나 청나라의 <강희자전>까지 염두에 두면, 이런 사실은 이채롭다. 특히 아주 강력한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일본에서 도대체 왜? 소설 속 마쓰모토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서는 근대적 사전의 효시가 된 오쓰키 후미히코의 <언해>, 이것조차도 결국 정부에서 공금을 지급하지 않아 오쓰키가 평생에 걸쳐 개인적으로 편찬하여 사비로 출간했습니다. 현재도 국어사전은 공공 단체가 아니라 출판사가 제각각 편찬하고 있죠."
(…) "공금이 투입되면 내용에 간섭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요. 또 국가의 위신을 걸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각을 전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권위와 지배의 도구로서 말을 이용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국어사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하루에도 수차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는, 말글로 밥벌이를 하는 나로서는 정말로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이란, 말을 다루는 사전이란, 개인과 권력, 내적 자유와 공적 지배의 틈새라는 항상 위험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죠."
이렇게 <배를 엮다>는 기분 전환은 물론이고 몇 가지 생각할 거리까지 던져주는 유쾌한 소설이다. 사실 그 후에도 여럿에게 이 소설 읽기를 강권했다. 다만 서평은 내 몫이 아니었다. 이 소설은 정말로 글 잘 쓰는 서평자의 힘을 빌려서 여러 사람에게 읽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평을 자청한 까닭은 우연히 드라마 <직장의 신>을 보면서였다.
내가 보기에 <배를 엮다>는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얘기 속에 (너무 구닥다리 얘기여서 이렇게 대놓고 말하기도 좀 쑥스러운) '노동의 가치'를 녹여낸 소설이다. 비정규직의 애환을 유머러스하게 고발한 <직장의 신>도 따지고 보면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이 소설과 드라마가 공장 상황과 맞물려서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런 식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10년째 일하는 공장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내 노동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만든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큰 힘이 되고, 심지어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데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는 게 흥분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공장 사람이 좋아졌다. 산전수전 다 겪은 심하게는 20년 이상의 나이 터울이 나는 선배로부터 이것저것 배우는 것도 재밌었고('쏙 빨아먹어야지!'),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기발랄한 행동으로 자극을 주는 후배와 일하는 것도 유쾌했다('더 분발해야지!'). 심지어 하는 일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동료조차도 배울 구석이 있었다('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런 남우세스러운 공장 자랑에 "일 중독자"를 연상하며 비웃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하루 여덟 시간씩 혹은 그 이상을 일터에서 보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일터는 마지못해 시간을 보내는 "지겨운" 하지만 생사가 달린 경쟁을 수행해야 하는 "전쟁터"가 되었다.
진보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부터 공장(회사) 안은 희망이 없으니, 공장 밖에서 희망을 찾자는 목소리에 부쩍 힘이 들어갔다. 존 로크에서 애덤 스미스를 거쳐 카를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동 가치론'은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케케묵은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가?
혹시 지금 진보의 지리멸렬함은, 더 나아가 민주주의가 질식당한 듯한 상황은 진보가 공장을 포기한(?) 후과가 아닐까. 따지고 보면 노동자와 노동자가 물고 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야기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지루한 갈등도 바로 그 일터를 노동 운동이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 아닌가.
직장을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직장의 신> '미스 김'(김혜수)은 이렇게 일터를 포기한 극단적인 인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노동하는 인간'인 우리는 일터에서의 인간관계를 포기하고서는 또 공장에서의 삶을 괄호 안에 집어넣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결국 드라마 속 '미스 김'을 미소 짓게 한 것도 일터의 그 지긋지긋한 동료들 아니던가.
<배를 엮다>는 바로 이런 '노동하는 인간'들이 '사전'을 통해서 부대끼며 성숙해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느 새 이런 이야기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 늘어났다. 일본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을 모델로 했다는 소설 속 '겐부쇼부'의 사전 편집부가 마치 유토피아 같은 공간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내가 지금 우리 공장에서 벌어지는 실험에 목매는 이유도 또 여러분에게 기꺼이 프레시안 협동조합의 조합원 가입을 권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배를 엮다>의 사전 편집부를 단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공간으로 두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그리고 적어도 나는 내 공장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우리도 이런 배를 만들 수 있다. 우리 다시, 배를 엮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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