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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원치 않는 청년들? 과학 대신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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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원치 않는 청년들? 과학 대신 마술!

[프레시안 books] 앤디 메리필드의 <마술적 마르크스주의>

얼마 전, 한국여성학회 2013년 연속세미나에서 청년유니온의 대표 한지혜 씨의 강연 '청년 프레카리아트 운동'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듣고 보니 알바나 비정규직 노동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19세에서 39세까지의 청년유니온 회원들은 정규직화나 자본주의의 비판을 운동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 뜻밖에도 그들의 목표는 매우 소박했다. 최저임금이라도 제대로 받는 것, 갑을 관계도 되지 않는 고용관계에서 적어도 제대로 '을'이 되는 것 등등.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이에 대한 반응이었다. 체계적 이론을 말하는 진지한 학자들은 그것이 다시금 신자유주의에 매몰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일상의 작은 변화를 원하는 발랄한 청년 운동가들은 또 다시 거대하고 근본적인 이야기로 자신들의 운동을 지루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청년 회원들은 지나치게 경제적이고 체계적인 사회 이론으로 변화무쌍한 이 사회를 설명하는 게 덧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 <마술적 마르크스주의>(앤디 메리필드 지음, 김채원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책읽는수요일
이러한 청년들의 다른 감성에 주목하는 데서 출발하는 책이 바로 앤디 메리필드의 <마술적 마르크스주의>(김채원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이다. 메리필드는 꿈과 환상이 현실원칙에 의해 포기되는 시대, 모든 것이 사영화되는 도시에서 무감각에 빠져든 채 살아가는 스펙터클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엄중한 이론이 아니라고 꼬집는다. 그에 따르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일깨우는 정치, 꿈꾸게 하는 정치, 실천을 불러내는 마술적 정치다. 그가 주장하는 마술적 마르크스주의는 이성적 비판의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대로 그것은 창조적 시인 되기(become-poets)이자 강렬하게 되기(become-intense)를 필요로 한다.

꿈을 꾼다거나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실재보다 이미지를, 진실보다 허구를, 객관적 기술보다 상상적 창조를, 이성보다 감정을, 과학보다 마술을, 물질보다 비물질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출발점에 설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출발점은 마르크스주의를 마르크스주의답지 못하지 만든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는 객관적 실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이자 유물론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필드는 매우 과감하게 상상, 즉 마술에서 시작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그는 진실을 포기할 때 비로소 진실을 구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진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상상) 때문에 진실이 된다. 가령 부르주아들은 자본이 자기회복의 능력을 갖는다고 믿는데(상상하는데) 이 환상이 지배적인 것이 되는 순간 진실, 실재, 현실이 된다. 즉 상상이 곧 진실을 만드는 마술을 부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물론은 마술을 들여올 때 완성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메리필드는 물질적 토대의 변혁 역시 비물질성에서 출발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분노나 희망과 같은 감정, 그리고 상상은 현실을 변혁하는 운동에 영감을 주게 되며 나아가 현실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을 느끼는 능력, 상상력을 계발하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변혁운동의 핵심적인 사안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가 삶의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긍정적 정동(Affect)을 최대화하는 것이 가장 윤리적인 태도라고 했듯 마술적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감정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은 사회운동의 핵심이 된다.

상상하라! 그러면 상상이 진실이 될 것이다. 분노하고 사랑하라! 그러면 감정이 물질적 토대를 창출해 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술적 마르크스주의의 역설적 모토이다.

메리필드의 마술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시인 되기'와 함께 중요한 것은 "비계급"이라는 개념이다. 그는 신공산주의를 꿈꾸지만 이를 위한 반자본주의 운동의 주체를 노동계급이 아니라 비계급으로 놓는다. 노동 활동의 여부는 운동의 주체를 설정하는 데 더 이상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메리필드는 앙드레 고르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에서 언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계급을 반자본주의 운동의 주체로 상정한다. 두 사람에 따르면 비계급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권력을 잡는 게 아니라 생산력주의라는 시장 합리성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들의 삶에 대한 권력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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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 ⓒ생각의나무
여기서 그가 왜 노동계급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가는 자명하다. 오늘날 전통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매우 제한적이며, 설혹 그러한 노동계급이 있더라도 그들은 계급의식을 갖지 않는 혹은 계급의 이름으로 행동을 할 동기가 없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동시장 유연화의 이름으로 비정규직 노동, 시간제 노동 혹은 기간제 근무와 같은 노동형식들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적 노동계급을 반복적으로 들먹거리는 것만큼이나 지루한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을 예비 노동계급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전통적 노동계급의 목표를 공유한다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이들은 노동 자체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이들은 노동의 본질, 내용, 의미를 거부한다.

이러한 주체관을 토대로 메리필드는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주 역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노동계급과 같은 대표 집단이 자본주의 내부로 들어가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반자본주의적 집단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언더그라운드를 파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작은 산골마을에 은둔하거나, 도시의 소규모 공동체에서 자신의 전초기지를 구축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탈주로를 만들고 있으며 때로는 서로 만나기도 한다. 이들은 제각기 조금 다른 방식으로 투쟁하지만 결국 이들의 활동은 스펙터클 사회와 이 사회의 소비문화에 맞서고 있다는 데서 수렴된다.

이러한 메리필드의 주장에 대해 우리 사회에 몇 안 되는 자칭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상된다. 그들은 과학을 운운하면서 메리필드가 객관적인 현실로서의 강력한 자본주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계급의 탈주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운동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청년유니온의 운동방향에 주목해 보자.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자기 노동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들 중 몇몇은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짬짬이 알바로 연명한다. 청년들에게 불고 있는 귀농의 바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노동의 시간 내내 자신을 소외시켜야 하는 기업 노동자로서의 삶이 저항의 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러한 운동은 비장함이나 엄격함 속에 진행되지도 않는다. 청년들은 같이 모여서 즐겁고, 같이 배워서 뿌듯하고, 같이 울어서 정들고…이런 식으로 운동을 다져간다. 이것은 분명 메리필드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비계급, 비물질성, 탈주와 닮은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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