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편집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민간인 출신의 최고의 군사안보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국회 국방위원회 비서관으로 들어가 국방문제에 투신했다. 10년 간의 국회 생활을 거쳐 노무현 정부 때 국방보좌관실에서 유일한 민간인 행정관으로 일했고, 그 뒤에는 국무총리 산하 비상기획위원회 혁신기획관, 국방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냈다.
김 편집장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NLL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는 NLL은 '북방한계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이는 일정 선 이상으로 올라가면 남북한이 서로 충돌할 우려가 크니 이 선을 넘어 북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즉, 남북 간 분쟁과 교전을 막기 위해 설정된 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데 이것이 지금은 분쟁을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안보나 영토, NLL과 같은 문제들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는 구성된 산물, 인식의 문제"라고 규정한 뒤 "다음 세대에 더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면, 그리고 그런 비전을 갖고 있다면 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의 방안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시도조차 해보지 말자는 것은 너무 비관적인 사고방식"이라며 전쟁 상태를 끝내는 평화협정에 비전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평화네트워크 김병우, 이진현, 조은지 인턴이 지난 6월 26일 평화네트워크 인근에서 김종대 편집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했다. 이후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가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보충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편집자>
▲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평화네트워크 |
평화네트워크 : NLL 논란이 뜨겁다. 우선 이 논란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김종대 : 우선 NLL 혹은 어떤 해상 경계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서북 5도라 불리는 우리의 5개 섬에 관한 안전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발명된 '안보신상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의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정치인이나 언론인조차 NLL이란 용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군인들도 해군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NLL이란 용어를 몰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96년 이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나라 서북 5도는 북쪽으로 백령도부터 남쪽으로 연평도에 이르는 5개를 말한다. 한반도가 한국전쟁 참화를 겪고 있을 때 전 국토가 전쟁터였지만 이 5개 섬에서만큼은 총 한 방 쏴본 일이 없다. 심지어 제주도까지 전쟁터였는데 유독 서북 5개 도서에서는 어떠한 전쟁의 흔적도 느낄 수 없는 '전쟁의 청정지역'이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이후로는 다른 한반도 전역이 조용해진 반면 이곳에서만 교전이 발생하는 '안보의 화약고'가 됐다. 이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는 하나의 큰 변곡점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판문점에 북한군이 난입해서 박격포 진지를 설치하는 무력시위를 한 적이 있다. 이로 인해 당시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총선에서 여론조사대비 30% 이상의 의석을 잃는 대패를 하게 됐다. 선거가 끝나고 선거 패인이 총선 직전에 있었던 판문점 사태가 정치적으로 악용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야당은 96년 7월 이 문제를 국회에서 들고 나왔다. 당시 야당은 "서해의 서북 5도에 가면 NLL이라는 것이 있는데 연간 수백 대의 북한 어선들이 NLL을 넘어 월선을 한다. 그건 위기라고 하지 않으면서 판문점 사태는 왜 위기라고 부풀려서 선거 때 써먹었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정작 NLL 문제를 점화한 당사자는 당시의 새정치국민회의, 즉 지금의 민주당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이양호 장관은 "NLL을 넘어와도 정전협정이 위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NLL을 넘어와도 안보위기가 아니라고 답변을 한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삼 정부의 국방장관이 말이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그 다음 날 이양호 장관의 말이 맞다고 기사를 썼다. NLL은 정전협정에도 없고 정식 경계선도 아닌데 야당이 공연한 트집을 잡는다고 얘기했다. 이것이 바로 NLL 문제가 처음 논란이 되어 수면위로 드러난 96년도 일이다. 그런데 17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 문제 제기를 한 측과 해명자의 입장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96년부터 NLL이 정치적으로 쟁점화되면서 남북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99년 6월 제1차 연평해전이 발생하면서 NLL은 남북한 정권의 자존심과 의지가 실린 본격적인 안보선으로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96년에서 99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이 '생명의 바다'가 '죽음의 바다'로 바뀌고, '평화의 바다'가 '전쟁의 바다'로 변하게 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NLL 문제의 본질이다.
평화네트워크 : NLL이 서해 5도와 서해바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김종대 : NLL에 대해 정전협정 때는 우리가 협정체결의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이후에 박정희 정부가 영해법을 제정한 것이 1977년 말이다. 이때 박정희 정부는 영해법을 긴급하게 제정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선포에 따르면 인천 앞바다까지 다 북한의 경제수역이 될 판이었다. 이에 따라 국제법적 절차를 밟아서 우리도 영해법을 제정하게 되었는데 인천 앞바다부터 서북 5도까지 모두 영해에서 제외해버렸다. 영해법을 제정한 취지가 이곳이 우리의 영해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것인데 막상 제정할 때 서해 5도를 다 제외해버렸다. 결국 이렇게 서북 5도 지역을 영해에서 다 제외해버림으로써 법적인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든 장본인은 엉뚱하게도 보수정권, 다시 말해 박정희 정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처럼 이 지역을 영해라고 주장하겠다면 그 전에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무덤을 찾아가 서북 5도 지역을 영해에서 제외한 이유를 물어보길 권하고 싶다. 이것은 여당이 야당에 물어볼 문제가 아니다.
왜 서해 5도를 영해에서 빼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로 인해 서해 5도 해상의 법적인 지위가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과거에는 관심밖에 있던 서해가 지금처럼 관심 영역 안으로 들어오니 이 불안정한 지위가 불씨가 됐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법적으로 불안정한 부분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관리할 것인가를 고심한 사람이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은 분쟁예방에 초점을 맞췄다. 서해평화협력지대라는 것의 핵심은 바로 분쟁예방이다. 어떻게 이곳을 평화적으로 관리해 분쟁을 예방할 것인가를 정상회담에서 풀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NLL 포기냐 아니냐'라는 논란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고 하는데 NLL이 경계선이 아니라고 말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보수정권이다. 현재 상황은 문제의 불씨를 던져놓은 보수정권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선 노무현 정권을 비난하고 있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적반하장이다.
평화네트워크 : 그렇다면 서북 5도의 인근 수역은 지금도 법적으로 우리의 영해가 아닌 것인가?
김종대 : 우리가 서북해역을 우리나라의 영해로 표기하려면 세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영해법(현재 영해 및 접수역법으로 명칭 변경)에 명시해야 되고, 두 번째는 국제사회에 이를 공표해야 하며, 세 번째는 유엔사무총장에게 그 사실을 기탁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지난 2008년, 유엔사무총장에게 기탁한 우리나라 영해직선기선도 역시 기존 영해법과 동일하게 서북 5도가 빠져있다. 지금도 우리나라 영해 직선기선도를 보면 경기도에는 영해가 없다. 태안반도 앞 소령도에서 직선기선이 끝난다. 새누리당이 자꾸 영해라는 개념을 노무현 대통령이 포기했다고 얘기하는데 그렇게 영해 주장을 하려거든 지금이라도 세 가지 절차를 밟으면 될 것 아닌가? 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국제사회가 아닌 야당을 향해서만 영해 논란을 부추기나? 자신 있으면 지금이라도 해보라.
그렇다면 여기에서 '영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개념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서해의 영해에 중국 어선들은 이곳을 공해라며 들어오고 있고 우리 정부도 이를 알고 있다. 오로지 북한에 대해서만 영해라고 얘기한다. 국제법적으로 영해라는 뜻은 배타적 주권을 행사하는 바다라는 의미인데, 그 배타성이란 우리나라 이외에 누구에 대해서든지 배타성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 대해서는 공해이고 북한에 대해서는 영해라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개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묻고 싶다.
한중어업협정에 서해 5도 바깥 수역이 공해로 설정되어있기 때문에 중국 어선들이 와서 고기를 다 잡아가고 있다. 반면 남북한의 어선은 그놈의 영해 논쟁 때문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논란은 사실 실체가 없는 논란이다. 정쟁이고 하나의 싸움에 불과하다. 영해 논란은 원래 국제법 논란이고 국제법에 기초한 분쟁해결 절차를 준용하거나 유엔 해양협약에 따르면 된다. 그렇게 영해 논란을 부추기려면 소모적인 정쟁을 하지 말고 국제사법재판소로 이 문제를 제소라도 하라. 그런데 그런 절차와 전혀 무관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유령 논쟁'이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있다. 국제법적으로는 분명 실체없는 논란을 하고 있지만 국제정치적인 접근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는 '영해' 대신에 '우리가 관할해온 수역'이라는 정의가 있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에 나와 있다. '서로가 각자 관할해온'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남북 간의 합의에 최대치이다. 그리고 그 개념이 훌륭하다. 이런 기존의 정의로도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데, 왜 여기에 국제법 용어인 영해라는 용어를 써서 실체 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평화네트워크 : 그렇다면 북방한계선(NLL)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김종대 : NLL이 무엇이냐. 정전협정 직후에 유엔사령관이 분쟁을 막기 위해 일방적으로 선포한 선이다. 사실 선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북한에는 비밀로 하고 우리 내부적으로 극소수만 이 선의 존재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 선 이상으로 올라가면 남북한이 서로 충돌할 우려가 크니 이 선을 넘어 북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분쟁과 교전을 막자는 취지로 만든 선이 바로 NLL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은 분쟁을 유발하고 있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NLL은 우리가 정전 이후에 관리해온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세계적으로 유사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도 마땅치 않다. 서해의 5개 섬과 섬을 직선기선으로 연결하고 그 기선과 북한 영토의 중간선으로 설정한 것이 NLL이다. 그런데 이를 영해선이라고 하면서 그 안쪽을 영해로 선포하는 사례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영해 선포를 한다면 세계는 난리가 날 것이다. 가령 미국이 하와이와 괌을 직선기선으로 연결한 다음 그 기선 안쪽에 있는 태평양은 모두 미국의 영해가 된다. 태평양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바다가 미국의 영해가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다시 말해 NLL 남쪽의 바다는 우리가 점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 보수적인 학자들은 점령해서 오랫동안 실효적 지배를 하면 영해 개념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이른바 '응고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스라엘이 중동전쟁을 통해서 점령한 유대인 정착촌은 1967년부터 구성되어 사실상 이스라엘의 땅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결국 '중동평화로드맵'에서는 90년대 말부터 2000년까지 점령지를 모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에 반환하겠다고 규정했다. '응고의 법칙'에 따른다면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을 근 40년 동안 실효지배 했으니 국제법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라고 해야한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면 유엔은 웃는다. '그것은 불법점령이지 어떻게 영토가 될 수 있는가'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유엔의 권고가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중동평화로드맵'이다.
새누리당도 대선 막바지에 NLL을 '영해에 준하는 선'이라고 슬쩍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무식한 의원들은 계속 영해선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외교안보 쪽에 몸담은 사람들은 말을 슬쩍 바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박 대통령이 후보시절에는 TV토론에서 '해상경계분계선'이라고 했다. 영토선, 영해에 준하는 선, 해상분계선 등등... 새누리당도 계속 헤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 북한으로부터 NLL을 지켰다
평화네트워크 :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에서는 대화록 내용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은 바꿔야 한다"는 발언을 'NLL 포기 발언'이라고 주장한다. 이게 아니라면 이 발언의 의미는 무엇인가?
김종대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 대해서는 텍스트가 아니라 맥락(context)가 중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 대화에서 서로 긍정하고 부정하는 게 어떤 대화고 어떤 맥락이냐 이렇게 논리구조를 그려봐야 한다.
"NLL을 바꿔야 한다"는 그 말은 지금처럼 군대가 서로 대치하는 하나의 선이 아니라 공동 어로구역을 하는 기준선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대가 아닌 경찰이 이를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군대와 경찰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경찰은 평시의 법을 적용받고 군대는 전시법을 적용받는다. 그런데 거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찰은 적을 상정하지 않고 군대는 적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같은 총을 가지고 같은 배를 타더라도 경찰과 군대는 굉장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경찰이 이곳을 관리한다는 것은 평화시에 분쟁을 통제하는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서해 평화협력지대 구상으로 가려면 개념의 전환이 필요한데 이런 모든 것을 바꾸자는 뜻으로 한 말인 것이다. NLL이라는 선 자체를 밑으로 내리거나 올리거나 하는 식으로 바꾸자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 지난 2007년 10월 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회담하고 있는 모습 ⓒ청와대 사진기자단 |
우리의 정치적인 현실이 NLL에서 교전이 벌어지면서 남북한 간에 갈등이 조성되고 그것이 국내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국제법적인 접근보다는 국내 여론을 인식하여 국제정치적인 접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이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통일되면 없어질 선이므로 그 이전까지는 국제정치적으로 실효적 지배를 해온 사실을 정치적으로 서로 인정하자. 그런 의미에서 NLL의 변경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오히려 북한으로부터 NLL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또 "남측에서는 NLL을 영토선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국제법적인 근거는 없지만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발언도 했다. 이 말은 국제법적인 접근이 아니라 국제정치적인 접근을 하자는 취지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 현실에서 출발하자는 발상이다. 북한은 NLL에 대해서 법적인 접근을 하자고 했지만 우리는 정치적인 접근을 하자고 한 것이다. 법적으로 해결하려면 협상을 해서 경계선을 확정해야 하는데 당시에 이건 불가능하다고 봤던 것이다.
평화네트워크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제안한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안은 무엇인가? 이게 NLL의 해법이 될 수 있는가?
김종대 : 새누리당은 서해평화협럭지대 구상안을 NLL을 포기하는 것, 바꾸는 것이라고 계속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도 나와 있듯이 근거가 전혀 없다.
나는 참여정부에서 처음부터 명확히 NLL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실수라고 본다. 정부 내에서도 NLL이 안보선인가 영토선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건 참여정부에서 관리를 잘못한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중동평화로드맵의 기본정신은 '땅과 평화를 맞바꾼다'이다. 점령한 땅을 돌려주고 절박한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반면 서해평화협력지대구상은 '경제와 평화를 맞바꾼다'이다. 다시 말해 경계선은 그대로 둔 채 군대가 있던 자리를 경제활동으로 대체해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동어로를 하고 경찰이 조업을 보호해준다거나 아니면 해주 일대에 제2의 개성공단을 만들어서 특구화한다든지 이렇게 군대는 뒤로 물러나고 경제활동으로 대체하면 평화로운 관리가 가능할 것이라는 구상이다. 그러면서 주권과 이익은 그대로 지키자는 것이다. 땅과 평화를 맞바꾸는 식으로 'NLL과 평화를 맞바꾸자'는 논의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평화구상은 기능주의적 접근이다. '중동평화로드맵'이 땅과 평화를 맞바꾸는 정치적 접근이었다면, 서해평화협력 구상은 유럽통합의 경험에서 나온 경제 사회분야의 교류를 앞세워서 평화를 달성하는 기능주의적 접근이라고 봐야 한다. 때문에 바다와 주권을 북한에 내주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NLL 인근 교전, 햇볕 정책 때문에 벌어진 참사?
평화네트워크 : 우리 해군이 NLL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와 닿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NLL을 해군이 지킨다는 것은 군사전략적으로 어떤 것인가?
김종대 : 많은 사람들이 NLL을 지킨다고 하면 바다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따라 함정들이 쭉 늘어서서 계속 지키는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방어는 철조망을 치고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육지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바다에서의 방어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해군의 전력운영방식은 육지와 달라서 어디를 지키든 함선이 출동하는 항구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해군 전력의 특성은 공격성, 융통성, 기동성이라고 요약된다. 함대는 평소엔 항구에 있는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바다로 출동하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출동할 수 있도록 해군은 후방에서 대기한다. 이것이 육군과 해군의 차이점이다.
함정이 바다에 쭉 늘어서 있는 식의 방어는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효율적인 방어이다. 해군은 또 이런 방어를 수용하지도 못한다. 보이지도 않는 경계선에 어떻게 함정이 늘어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북한 해안포 밀집지역 가까이에 늘어서서 선(線) 방어를 하게 되면 우리는 북한 해안포의 집중 타격 표적이 된다. 이처럼 우매하기 짝이 없는 전략이 어디 있겠는가.
작은 고속정이 인근의 항구에 대기하고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 나가서 해결을 하도록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북한의 배는 성능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NLL에 접근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나가도 우리가 NLL 부근에 먼저 도착한다. 그 정도로 함정에 있어서는 우리가 북한보다 성능이 뛰어나다. 그래서 해군 전력운용의 특징은 공격성과 융통성이다. 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면을 통제하는 개념이다. 설령 NLL에 북한 경비정이 넘어왔다 치더라도 기관 성능도 떨어지고 엔진도 구형이기 때문에 가만히 두더라도 얼마 오래 견디지 못하고 NLL 북쪽으로 다시 올라간다. 속도도 매우 느리다. 우리가 충분히 면을 통제하고 방어할 수 있는 압도적인 해군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개념대로 가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때 제1차 연평해전 때부터 기존의 면 방어를 선방어로 변경해버리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려간 지시사항을 보면 큰 함정들을 모두 일렬로 세우게 했다. 그런데 NLL인근 해상에서는 작은 함정으로 방어를 해야 한다. 작은 함정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참수리 고속정이 돌격기동을 하면 선수 부분은 수면 위로 들리고 선미 부분만 수면 아래로 잠긴다. 이 잠긴 부분을 수면 아래 2미터 깊이로 전진하는 직주어뢰가 정확히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참수리 고속정은 매우 빠르기 때문에 해안포로 맞추지도 못한다. 그런데 속도도 느리고 이렇다 할 전투능력도 없는 수송함, 구조함같은 큰 함정들을 가지고 NLL에 놓아두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 제1연평해전 당시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런 식으로 대형함정에 의한 NLL 도열, 마치 관함식에서나 보는 이상한 전술로 NLL을 방어한다고 하니까 북한도 어뢰정을 3척이나 출동시켰다. 그 어뢰정이 우리 대형함을 쏘지 못하도록 우리 고속정이 전속력으로 들이받고, 이에 북한이 응사하다가 제1연평해전이 터졌다. 보라. 제1연평해전은 남북 해군 모두가 발포하지 말라는 지시를 똑같이 받은 상태에서 일어난 교전이다. 양측 모두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는데도 교전이 일어났다. 이게 미스터리이다. 남북 모두 발포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교전이 일어났을까? 바로 해양에서의 작전환경의 복잡성, 특수성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제대로 이를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이렇게 잘못된 지시를 한 당사자는 합동참모본부다.
▲ 1차 연평해전 당시 남측 고속정(오른쪽)과 북측 함정이 충돌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제2연평해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함대사령부가 우리 함정과 적과의 3km 거리를 유지하도록 했는데, 합참이 중간에 개입해서 "근접 차단기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 당시 합참 작전본부장이 바로 이명박 정부 초대 국방장관인 이상희 중장이다. 2함대사령관이 지상 2층의 사령관실로 잠깐 올라간 사이에 합참이 지하 1층의 2함대 상황실로 전화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아무런 전투대형도 유지하고 않고 최저 속도로 북한 함정과 150미터 거리까지 접근한 우리 참수리 고속정이 이미 조준하고 있던 북한 함정의 지상포에 당했다. 비극적인 교전이 종료되고 청와대가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러자 당시 합참 작전본부장은 "2함대사령관을 징계해야 한다"며 명백한 해군의 잘못이라고 했고, 연합사부사령관인 남재준 대장도 당시 국정상황실 요원을 만나 "해군이 잘못 기동했다가 다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인물이 바로 현재 국정원장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에 봉착한다. 첫째, 북한은 성능이 낮은 수상함에 의한 도발이 자신들에게 절대 불리한 줄 알면서도 왜 자꾸 경비정으로 NLL을 침범하는 무모한 도발을 한 것인가? 정말 NLL을 무력화하려면 지상의 해안포나 지대함 미사일을 동원했으면 훨씬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우리 함정을 위협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둘째, 남한은 왜 NLL 선상에 대형 함정을 죽 늘어서게 만드는 이상한 전술을 고집했을까? 우리 함정의 전투원들의 생명이 위험해지는데 말이다. 이 두 가지 의문을 놓고 보면 NLL에서 남북 대치는 군사적 원칙에 충실한 합리적 행동들이 아니었다. 이러한 비합리성은 실제로 교전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무력시위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을 웅변해 준다. 더군다나 우리의 경우 합참이 해양의 특성에 대해 모르는 육군 출신들이라는 점에서 비극의 강도는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작전의 책임자들이 지금 햇볕정책을 비난하고 있다. 자신들의 작전 지휘 내지 해군과의 갈등을 겪은 일은 다 은폐하고 오로지 정권 탓만 하고 있는 것이다. 발포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그런 비극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데 북한 군대도 제1연평해전 때는 똑같은 명령을 받고 있었다.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이 때문만이 아니라 함정의 잘못된 기동이 화근이었다. 말하려거든 이걸 말해야 한다.
평화체제와 전시작전권, 정상적인 국가로 가기 위한 첫 걸음
평화네트워크 : 평화체제 문제로 넘어가보자. 남한 군부는 평화체제 구축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김종대 :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현실주의가 있고 자유주의가 있다. 이 두 가지 사고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 관점에서는 국가 간에 자신의 주권과 이익을 양보해서 상대방과 협조할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반해 현실주의는 국가의 이익이나 안보는 국가가 존재하는 본성이라고 본다. 국제사회는 협조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무정부 상태라는 것이다.
군의 사고방식은 전통적인 현실주의에 입각해있다. 과거의 많은 전쟁들이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믿을 것은 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군은 이런 맥락에서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북한의 기만전술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연합사 해체를 통해서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는 것이 북한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이 적대 관계이기 때문에 평화협정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는 하나의 제도나 협상이 국제정치에서 의미가 있다. 국제기구의 역할과 국제협력, 상호의존이 점차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북한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협력을 통해 남북한이 상생하는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쟁 상태를 끝내는 평화협정에 비전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안보나 영토, NLL과 같은 문제들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는 구성된 산물, 인식의 문제라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 것인가. 그것은 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북한에 어떻게 다가가느냐의 문제이지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내가 보기에는 다음 세대에 더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면, 그리고 그런 비전을 갖고 있다면 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의 방안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시도조차 해보지 말자는 것은 너무 비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평화네트워크 : 이명박 정부 때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시작전권) 전환이 연기되었다. 그런데 또다시 전시작전권 전환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종대 : 전시작전권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군사주권이다. 우리 군대를 우리가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권한, 다시 말해 작전을 통제하는 권한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가 존립하는 이상 국가주권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미국에 의존하면서 수동적으로 주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국군을 주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군사주권이 확립되는 것이다. 우리가 한반도 안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정전협정 당사자도 되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전시작전권까지 없다면 다른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겠는가. 이정도의 중견국가 중에 이렇게 자국의 정당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국에만 의존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외국에서는 이런 논쟁조차 없다. 다 자기 나라 군대에 대한 군사주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작전권이 주권이 아니라면 무엇이 주권이라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전시작전권 전환은 지극히 주권을 정상화하는 차원의 전환이다. 오히려 너무 늦었다.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의 당사자가 되고 북한과 안보의 당사자가 되어 협상을 하기 위한 정상적인 지위를 확보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국가로서 정상적인 주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이건 보수/진보를 떠나서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전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시작전권 연기를 미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래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전환을 하기는 하되 한미연합사는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런 대안이 최근에 나왔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미국과 협의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앞으로 한미연합사의 유지와 전시작전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한미간의 활발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의미 있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국방부의 입장은 전시작전권을 예정대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한미연합사 체제 유지라는 새로운 형태로 대안을 내서 진행하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나오고 있는 얘기가 대단히 혼란스럽다. 한미연합사가 없어지는 것인지 유지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태를 조금 더 살펴보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연합사의 존치 문제뿐만 아니라 전시작전권 전환 시기가 문제인데 지금은 2015년 12월로 되어 있다. 시기 자체는 한국과 미국 간에 공히 준수하겠다고 공식화되어있다. 단지 국내의 일부 보수 인사들, 특히 군 출신 인사들이 이걸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정책화된 것은 전혀 아니다.
평화네트워크 :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을 맞아 논의되고 있는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과 전시작전권 전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김종대 : 전시작전권 전환과 함께 또 하나의 쌍을 이루는 것이 바로 비정상적인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이다. 정전협정이 실효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전 세계 23개의 정전협정 중에서 성공한 정전협정, 다시 말해 대규모 전쟁을 예방한 정전협정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남북한만이 당사자라기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국제적인 세력이 다 같이 참여하는 어떤 세력 균형선으로서 휴전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드물게 성공한 것이 우리나라의 정전협정이다.
그런데 6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도 국력이 발전해서 이제는 우리가 정전체제 관리의 당사자로서 조금 더 평화로운 상태로 전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되 그 전제는 우리가 군사주권을 갖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발언권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시작전권을 전환하고 평화체제를 설립시키는 것은 현상타파 논리이다. 반면에 계속 전시작전권을 연기하고 정전협정 속에서 살겠다는 건 현상유지 논리이다. 현상유지가 좋다면 전시작전권을 다시 연기하고 지금처럼 지내면 된다. 가끔 서해에서 교전이 발생하고 남북한 간에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면 현상유지 정책을 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바꾸고 싶다면 현상타파 정책을 써야 한다. 평화상태 구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전시작전권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전시작전권 전환 반대 논리가 있다. 바로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논리이다.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인데, 그러나 어차피 지금 북한은 전면전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 이젠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군이나 미국이나 공히 인정하는 것이다. 북한은 도발할 능력은 있을지 모르나 전쟁을 지속할 능력은 없다.
그렇다면 국지전의 경우에는 어떤가. 지금까지 미국은 국지전에 개입하지 않았다. 서해교전 때도 그랬고 연평해전 때도 그랬다. 정전협정이든 한미연합방어체계이든 한국군이 전부 알아서 했다. 물론 우리는 매번 미국에 도와달라고 말은 했다. 그러나 미국은 교전이 터지고 한참 뒤에야 항공모함 하나 보내주는 식의 행동만 취해왔다. 한미연합방위체제에서도 평시에 국지전 같은 경우는 전부 우리군 위주로 전투를 수행해왔다.
그렇다면 전시작전권을 전환하더라도 안보 상황이 더 위험하고 나빠질 이유가 없다. 미국이 배후에 있어도 국지전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연합방위체제가 국지전을 예방한 효과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시작전권을 가져오더라도 똑같은 것이다. 단지 우리의 국제정치적 지위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나중에 현상을 타파할 때 하나의 기반이 된다. 이런 점이지 전시작전권을 전환한다고 해서 안보가 더 나빠질 이유도 없고 더 좋아질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전시작전권 전환 반대진영의 논리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군국주의의 중간 쯤 되는 나라
평화네트워크 : 남북관계 최후의 보루이던 개성공단이 중대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경제적 차원이나 정치적 차원에서의 손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개성공단이 폐쇄될 경우 안보적 차원의 문제도 있을 것으로 본다.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가?
김종대 : 개성공단에서 철수한 것일 뿐 아직 개성공단은 남아있다. 아직 개성공단이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은 안보적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개성공단을 완전히 폐쇄하고 공단을 다 철거한다면, 다시 말해 개성공단 조성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개성지역은 한국전쟁 때도 남침의 주요 통로이자 축선이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면 지뢰가 그 지역에 새로 설치되고 군부대가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말 그대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핵심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안보부담이 가중된다. 아마 그 지역을 수비하고 있는 우리 군의 9사단의 임무가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군사대비태세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네트워크 :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은 정전 60주년인 올해에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양측 모두 물러서지 않는 군비 경쟁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현재 남북 간의 객관적인 군사전력을 비교해보면?
김종대 : 지금까지 군사력 균형이라고 하면, 남북 간의 군사적 대등함을 의미하는 '균형'을 통해 서로 간의 도발을 억제하는 군사력 균형을 얘기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북한에 비해 수적인 열세를 따라잡기 위해 국방비를 투입하는 이런 양상에서 남북한 군사력 비교에 대한 논의가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패러다임이 적용되지 않는다. 첫째, 국지전에서는 군사적 우열에 큰 의미가 없다.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전쟁(small war)에서는 전투가 현장에서 발생하고 현장에서 종결된다. 따라서 남북한 군대의 군사적 총량을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한 이제는 과거와 달리 비대칭 전력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군사력 비교의 의미가 많이 줄어들었다. 사제폭탄밖에 없는 아프가니스탄 주민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미군을 골탕 먹이고 있다. 이것을 군사력 비교로 설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얘기다. 이것은 전쟁의 문화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비대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도 군사적 비교는 무의미해진다.
세 번째로, 옛날에는 군사기술이 민간으로 파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터넷이 미국 국방부 인트라넷에서 발명되었고, 알파넷이라는 것이 민간으로 파급되었다. 이처럼 옛날에는 군대만이 갖고 있는 탁월한 기술적 우위가 있었고 민간이 그 기술을 따라가기 바빴다. 그러나 지금은 민간이 군사기술을 주도한다. 상용기술이 군사기술을 주도하다 보니 군사기술의 압도적 우위라는 것들이 사라져서 전 세계의 전쟁기술이 평등해졌다. 2006년에 헤즈볼라가 중동 최대의 군대인 이스라엘 공군을 괴멸시켰다. 해킹을 통한 사이버전 하나만으로 말이다. 헤즈볼라는 심지어 국가도 아니다. 비(非)국가 조직으로 정식 군대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컴퓨터를 통해 사이버 전사들이 이스라엘 공군을 괴멸시켜버린 것이다. 그러자 이듬해에 이스라엘의 지상군이 레바논에 투입됐는데 그 역시 사이버전으로 괴멸시켰다. 이를 지켜본 미국의 전쟁 학자 피터 싱어는 "전쟁기술이 평등화되었다"고 선언했다. 현대 전쟁의 양상은 군사력 비교가 별 의미가 없는 방식으로 변화해버린 것이다.
평화네트워크 : 그럼 군사력 비교 자체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인가?
김종대 : 꼭 그런 뜻은 아니다. 언제 군사력 비교가 의미 있는가? 국제정치에서 패권국과 도전국 같이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한 요소로서 핵무기의 보유개수라든지 항공모함의 보유대수와 같은 것들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그런 개념이 적용되는 곳이 아니다. 이제는 작은 전쟁(Small War)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군사력 균형이라는 것은 전면전을 대상으로 한 개념이기 때문에 이런 개념은 지금의 한반도의 안보현실과 맞지 않는다.
북한은 90년대 이후로 신형 전투기 도입 실적이 전무하다. 그러다보니 우리에 비해 열세일 수밖에 없는 재래식 전력 대신 비대칭 전력을 증가시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야포전력과 사이버전력, 그리고 핵이다. 우리는 이 무기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군사력 비교가 의미가 없다. 각자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도 똑같이 핵을 갖자는 주장이 있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 남북한은 비대칭전력을 갖고있기 때문에 군사력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 우열을 평가할 것이냐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 면에서 이제 남북 간 안보상황은 탈근대(post-modern)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자꾸 사람들이 남북 간 군사력 비교에 관심을 갖느냐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다. 특히 진보 진영도 80년대 후반에 남북군사력 비교 연구를 했던 리영희 교수의 논문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것이 우리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은 굉장히 크다. 그러다 보니 자꾸 우리도 그런 패러다임 속에서 군사력 균형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군 안에는 기존의 조직 하에서 유지되고 있는 어떤 정체성이나 문화가 있다. 그것을 전략문화(strategic culture)라고 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 양적으로 서로 보여주기 위한 무기도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실제 국지전에서 의미 있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F-15 전투기를 갖고 있어봤자 연평도 포격사건 때 쓰지 못했다. 가지고 있어봤자 쓰지 못하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한반도 안보의 독특한 속성과 날로 현대화 되어가는 전쟁의 양상 하에서 우리가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화되어 간다는 것은 첨단 무기가 동원된다는 뜻이 아니다. 더 원시적인 수단이나 비군사적인 수단도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제폭탄은 휴대폰으로 작동한다. 아프가니스탄에 휴대폰이 보급될 때 이것이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평화네트워크 :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군 인사들이 정부 요직에 대거 진출하면서 논란이 됐다. 군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필수조건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나라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김종대 : 문민통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군국주의의 중간 정도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민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가의 여부는 군대가 어떤 핵심적인 정책과 그 운영에 있어 정부의 통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냐 군국주의냐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군대가 정부 위에 있으면 군국주의이다. 예를 들어서 일본 제국주의 같은 경우는 왕(천황)이 있고 그 밑에 군대가 있고 그 밑에 내각이 있었다. 히틀러 파시스트 체제에서는 히틀러 총통 밑에 독일총참모부가 있고 그 밑에 정부가 있었다. 이런 국가를 군국주의 국가라고 부른다. 반면 민주주의는 그 순서가 뒤바뀌는 것이다. 왕이나 총리, 또는 총통 밑에 군대가 아니라 정부가 있고, 그 밑에 군대가 있는 것이다. 이런 나라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한다.
▲ 남재준 국정원장. 그는 2003년 4월부터 2005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연합뉴스 |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대가 정부의 통제를 받는 주요한 수단이 '국방문민화'이다. 다시 말해 국방부는 군을 대표해서 군의 이익을 확장하는 조직이 아니라 국민과 정부를 대리해서 군을 통제하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복을 입은 민간인이 국방장관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잠시 양복으로 갈아입은 군인들이 국방장관을 맡고 있다. 국방부가 국민과 정부를 대리해서 군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군의 이익을 외부로 확산시키고 표출시키고 있다. 그 핵심에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선후배들 관계로 촘촘히 계단식으로 이어져 있는 직급체제 문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이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인가? 상당부분 받지 않고 있다. 우선 장교의 정원은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아무 양식도 없이 A4용지 한 장에 사인만 받으면 끝난다. 그럼 바로 장교의 정원을 몇만 명, 몇천 명까지 늘릴 수 있다. 중기 국방계획인 주요 군사계획 같은 경우에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왜 MB정부 때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서북 해역에서 그렇게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우리의 주요한 군사정책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라든가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 논의하지 않고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정책을 결정해버렸다. 외교부나 통일부가 모르게 실행해버리니 외교부와 통일부는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 통일부가 뭘 해보려고 해도 남북관계를 어느새 군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북한은 남한의 통일부를 보려고 하지 않고 우리 군의 메시지만 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엄연히 문민통제의 원칙에 위배된다. 정부의 통제라는 원칙에 위배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군이 어디까지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냐. 군은 아무런 권한도 없다는 얘기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군이 정부의 통제를 받는 절차와 방법과 규범을 다 법으로 정해놔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어떻게 하지 못하게 엄격히 법으로 정해 놓고 국방부는 철저히 문민화를 하는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1986년에 제정된 '골드워터-니콜슨 법(Goldwater-Nichols defense reorganization act)'이 바로 이런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국방기본법을 만들어서 이를 통해 군을 통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국방의 어떤 기본적 규범을 천명하는 포괄적인 국방기본법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에 대통령이 국군을 통수하고, 국군에 관한 통수는 문서로서 행한다는 두세 가지 조항이 전부이다. 그 다음에 국군조직법이라든지 각종 군수품에 관한 법과 같은 하위 법령들만 너절너절하게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되니 어떤 방법으로 문민통제가 된다는 것인가. 제도화 수준이 이 정도 수준이면 이름도 모르는 아프리카 어느 국가보다 적어도 법체계는 나을 것이 없다.
이런 부분의 발전이 잘 되어있지 않다 보니 민주정치와 국방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각기 따로 지내다 보니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서로 소통하고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게 하는 법제도적 규범을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더 스마트하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적 가치와 안보적 가치가 충돌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정부의 군에 대한 통제는 대단히 무능하고 취약하다. 이는 문민통제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다.
평화네트워크 : 대체로 보수는 안보를, 진보는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둘은 다른 것인가?
김종대 : 안보라는 말과 평화라는 말은 원래 같은 뜻이다. 이것이 하나의 구호가 되고 이념이 되었기 때문에 평화를 얘기하면 평화주의자가 되고 안보를 얘기하면 안보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는데, 이것은 강요된 인식체계이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안보가 중요하다. 바로 외부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이런 위협을 관리하는 안보의 결과가 바로 평화이다. 안보가 잘 지켜지는 상태는 소극적 평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항구적으로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 즉 갈등을 창조적으로 해결해서 얻어지는 평화는 적극적 평화다.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하다.
안보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위협에 대한 우리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주로 군사력 증강의 형태로 나타난다. 또 하나는 위협 그 자체를 제거해버리는 방법이다. 그런데 취약성을 완벽히 보완하고자 하면 전 국민에 경호원을 한 명씩 다 딸려줘야 할지도 모른다. 위협이란 불특정한 형태로 어떻게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완벽히 다 보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위협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 방식에 첫째는 외교가 있는 것이고 둘째는 선제적인 행동으로 위협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 한 쪽에만 편향될 경우 대단히 위험한 사고방식이 나온다고 본다. 안보라는 것은 현존하는 위협이든 잠재적으로 있을 위협이든 간에 국가가 어떤 부분에서 취약성을 보인다면 지금부터 대비하는 것이 맞다. 예를 들어 앞으로 사회안전망이 어느 순간 붕괴되기 시작하면 아마 사회가 한순간에 주저앉을 것이다. 이런 취약점이 예상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견고하게 만들어 충격이 있어도 유지하게 만들 것이냐는 안보를 고민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평화시대가 도래해서 한반도에서 전쟁위협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군사안보 기술 중에서 인공위성과 같이 정찰 무기 같은 경우는 오히려 증강해야 할 것이다. 평화시기일수록 상대방과의 투명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군사적 투명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켰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과 귀가 밝아야 한다. 이런 무기는 전시에도 중요하지만 평화 시에 더 증강해야 한다. 그것이 평화상태를 지속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개념상으로는 사태를 악화시키기 전에 외교로서 객관적인 위험을 제거해버릴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관계의 문제이다. 그럼으로써 위협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안보와 평화는 동반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조금 더 균형적으로, 유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것이다. 지금 안보에 관한 사회적 비판론들은 모두 위협을 제거할 필요 없이 취약성만 보완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취약성을 보완하려면 끝이 없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안보의 지도 위에 평화와 번영의 지도를 덮자고 말하지 않았나? 바로 항구적인 안보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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