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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쇠는 어쩌다가 '대물'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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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쇠는 어쩌다가 '대물'이 됐을까?

[최내현의 '정력'] 정력의 정의 (2)

지난 회 바로 가기☞ '내 정력을 맥박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요?!'

▲ 2008년 영화 <가루지기>(감독 신한솔, 출연 봉태규, 윤여정, 김예원) 중 한 장면.

(은근한 눈빛으로) "존경합니다, 나으리."
(느닷없는 존대에 당황하여) "…네?"
(교태를 떨며) "난생 처음 그런 거물을 보았사옵니다. 히히히."


동네 아낙이 변강쇠를 찬양(?)하는 장면이다. 봉태규가 변강쇠로 나왔던 2008년 영화 <가루지기>의 일부분이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봉태규(변강쇠)는 성기가 형편없이 작아서 윤여정(동네 과부)으로부터 '모기 주둥이'에 비교당하는 수모를 겪는데, 오밤중 숲속에서 음양통달도사(송재호)를 만나 시키는 대로 미션을 수행하고 나서 그야말로 인생 역전, 변신에 성공한다. 천하의 거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소문이 나자 온갖 여인들이 줄을 서게 되고 봉태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다는 게 영화의 설정이다.

변강쇠가 '대물'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변강쇠는 한국인들에게 정력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스포츠신문을 펼치면 변강쇠를 만들어준다는 각종 보조식품류를 쉽게 마주할 수 있고, '강쇠장어'니 하는 살짝 장난스런 식당 이름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검색을 하다 보니 부산엔 심지어 '옹녀조개 강쇠장어'라는 이름의 식당도 있다. 이름과 달리 광어, 우럭회 전문점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식당 이름에 성적인 코드를 넣는 것 역시 일종의 문화적 현상인 듯한데 기회가 있으면 이에 대해 자세히 다뤄보겠다.

말이 나온 김에 역시 여담이지만 필자가 목격했던 가장 느끼한(?) 식당 이름은, 오래전이지만 버스를 타고 가다가 국도변에서 보았던 '숫총각 버섯탕'이었다. 숫총각 요리사가 버섯탕을 만들어준다는 건지 버섯탕을 먹으면 숫총각이 된다는 건지 버섯이 숫총각이라는 건지 간판만 봐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다지 식욕을 자극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영화에서 변강쇠가 도사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여자를 홀리는 애무법도 아니요, 좌삼삼 우삼삼 하는 테크닉도 아니었다. 얼굴을 천하 미남으로 만든 것도 아니었고 돈벼락을 내려준 것도 아니었다. 도사는 바로 성기 자체가 트랜스포메이션의 과정을 거쳐 대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해 준 것이었다. 변강쇠라면 마땅히 물건도 커야 한다는 일종의 '상식'이 적용된 셈이다. (만약 이 영화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면 도사의 전수품은 '비기의 혀 놀림' 같은 게 아니었을까?)

▲ 2008년 영화 <가루지기> 중 한 장면.

영화화된 변강쇠를 이야기하자면 저 유명한 전설의 1986년 작 <변강쇠>를 빼놓을 수 없다. 변강쇠는 이대근이었고, (많은 이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옹녀 역은 원미경이었다. 1980년대의 대 히트작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은 아직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이대근이 소변을 보는 장면(굵은 물줄기가 콸콸콸)이고, 다른 하나는 이대근과 원미경이 만나 천생연분임을 알아보고 처음으로 정사를 벌이는 장면이다. 어두운 밤 산중의 야외 섹스였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가 치며 천지가 요동쳤고 일이 끝난 후엔 그 장소의 땅이 움푹 들어가 있었더랬다.

이 영화의 성공을 등에 업고 1988년에 비슷한 영화 <가루지기>가 만들어졌다. 2년 전 <변강쇠>가 워낙 히트작이었기에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된 영화였다. 변강쇠 역은 역시 정력남의 아이콘 이대근이었고 옹녀는 어우동 역(1986년 작 <요화 어을우동>)으로 주목받았던 신인급 여배우 김문희였다.

당시 모 잡지에 실렸던 영화 관련 취재 사진을 필자는 잊지 못한다. 한복 치마를 입고 모로 누워 있는 옹녀 발쪽에 이대근이 앉아서 옹녀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사진이었다. 자기 어깨 높이 정도까지 여배우의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이대근은 고개를 숙여 치마 안 양다리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은 그다지 선정적이진 않았으나 (여배우는 속바지까지 다 입은 차림이어서 노출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은근히 야했다. 그런데 필자가 이 사진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에로틱해서가 아니라 사진 밑에 적혀 있던 설명 때문이다.

"이대근이 신인 여배우 김문희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남의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며 연기 지도를 한다니, 한편으론 부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편집 기자에게 존경심마저 일었다. 그런 창조적 문구의 사진 설명을 고안해 내다니 말이다.

▲ 1988년 영화 <가루지기>. 만화가 고우영의 유일한 영화 연출작이기도 하다.

조금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어쨌거나 변강쇠 하면 우리는 '대물'을 먼저 떠올리거나, 최소한 변강쇠 정도의 인물이라면 크기에 대한 고민은 없었을 거라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사이즈 때문에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변강쇠, 목욕탕에서 '남의 것'을 보면서 자괴감에 빠지는 변강쇠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변강쇠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가루지기타령>을 직접 읽어보면 크기가 크다거나 테크닉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물건이 컸을 것이고 그래야 더 어울린다고 보는 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물론 오늘날 전해지는 <가루지기타령>은 신재효 선생이 정리한 것이 유일하다. 판소리로서 명맥은 19세기 말 무렵 끊긴 셈인데, 만약 다른 판본이 존재했다면 사정은 좀 달랐을지 모른다.)

성기 크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변강쇠가 체격이 좋고 술과 여자를 밝힌다는 점은 나와 있다. 변강쇠는 오르가즘을 선사하는 능력보다는 본인의 성적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한국 고전판 타이거 우즈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신재효판 <가루지기타령>에서 변강쇠는 뭇 여성들을 아랫도리로 호령하는 능력남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생활 능력도 없고 머리도 나쁜, 그래서 한곳에 정착도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한심한 남자에 불과하다. 그나마 조금 생기는 돈을 전부 유흥에 탕진하자 옹녀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산속 폐가를 하나 찾아내어 살림살이를 시작한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 생활을 시도한 셈이다.

하지만 워낙 생활 능력이 없고 일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강쇠였던지라, 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그만 해가 떨어지도록 낮잠을 자고 만다. 집에 빈손으로 가면 옹녀의 잔소리를 들을까 무서워 그는 나뭇가지 대신 동네 장승을 빼서 등에 지고 온다. 옹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장승에 도끼질을 해서 땔감을 만들었고, 그 덕분에 변강쇠는 귀신의 분노를 사서 하룻밤 사이에 죽게 된다.

▲ 1986년 영화 <변강쇠>(감독 엄종선, 출연 이대근, 원미경) 포스터.
극의 주인공인 변강쇠가 죽어버리는 시점은 전체 분량의 절반이 채 지나지 않은 때다. 영화로 치자면 시작하고 사오십 분 정도 지났는데 주인공이 덜컥 죽어버리는 셈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누비고 다녀도, 하늘에서 떨어지고 물속에 갇혀도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설마 죽지야 않겠지 하면서 읽어 내려가는데 주인공이 진짜로 덜컥 죽어버리니 말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 변강쇠의 시체를 처리하는 이야기다. 요즘으로 치면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막장 코미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가 주고자 하는 교훈은 "여자나 밝히고 다니면 이 꼴이 나니 정신 차리고 성실하게 살아라"이니, 장어 먹고 변강쇠가 되고 싶어 강쇠장어 집을 찾아가는 오늘날의 통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셈이다. 물론 교훈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적당히 좋은 말로 수습하느라 교훈적 메시지가 들어갔을 터이니 변강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쨌거나 <가루지기타령>은 그 '수습' 부분이 절반이 넘으니 특이한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변강쇠와 옹녀의 베드신은 딱 한 번 나오는데 천지가 요동친다거나 극락의 환희를 맛본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고 다만 적나라하면서도 해학 넘치는 남녀의 성기 묘사는 꽤나 독창적이다. 변강쇠 성기에 대한 옹녀의 찬양가를 보아도 크기에 대한 내용은 없다.

이렇듯 변강쇠의 성기 크기는 딱히 그 근거를 찾기 어렵지만, 우리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변강쇠 페니스 사이즈가 클 것이라 생각한다. 정력남이라면 당연히 사이즈도 클 것이라는, 일종의 관념적 친화성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의 라스푸틴 VS. 중국의 노애

변강쇠는 창작된 이야기이니, 이번엔 역사를 살펴보자. 역사에는 섹스로 성공한(그리고 몰락한) 사람들이 많은데, 동양 역사상 거의 최초로 '거시기로 신분 상승한 남자'라고 하면 중국 진시황 때의 노애(嫪毐)가 아닐까 싶다.

이 입지전적인(?) 남자에 대해서는 <열국지>에 잘 소개되어 있다. 필자가 학창 시절 탐독했던 5권짜리 (세로로 인쇄되어 있던) 열국지에 '자지 큰 남자'가 등장한다. 당시엔 일 년 농사가 끝나고 추수를 하고 나면 사람들이 시장에 모여 축제를 벌이며 자발적으로 장기자랑을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동네 건달 출신인 노애라는 이 남자는 성기가 장기였던 모양이다. 장기자랑에 나가서 아랫도리를 과시했으니 말이다.

그의 마케팅 포인트는 단순히 큰 성기가 아니라 "크고 빳빳함"이었다. 발기시킨 후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꽂고 빙글빙글 돌렸다 한다. 그러니까 바퀴 중앙 부분에 성기를 넣고, 그 성기를 축으로 바퀴를 돌렸다는 뜻이다. 요즘 같은 초경량 자전거 바퀴도 아닌 나무로 만든 바퀴니 오죽 무거웠겠는가? (젤 같은 건 바르고 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런 홍보 덕분인지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아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고, 말하자면 <가루지기>에서 도사의 은혜로 사이즈가 커진 봉태규의 처지가 되었다.

장양태후는 진시황의 어머니이자 남편과 사별한 과부였는데, 진시황을 옹립시켜 재상에 오른 여불위(呂不韋)와 연인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진시황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한 여불위는 어떻게든 태후에게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던 차에 노애라는 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태후에게 소개해주기에 이른다.

노애는 환관으로 가장하여 궁 안에 들어가 태후를 모시게 되었고, 둘은 "아교와 옻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다 결국 아이를 둘이나 몰래 낳고 살았다. 그러나 비밀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결국 분노한 진시황이 노애와 두 아이를 죽이는 것으로 사태를 처리한다.

러시아에 라스푸틴이 있었다면 중국엔 노애가 있었던 셈이다. 다만 라스푸틴은 화려한 언변, 놀랍도록 강인한 체력, 미려한 외모, 그리고 해박한 종교적 지식에 거대한 성기까지,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엄친아'였던 반면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그의 우람한 성기가 알코올에 담겨 전시되어 있다. 물론 모형이고 진품은 KGB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거대하기 짝이 없는, '말자지'가 있다면 이런 것이로구나 할 수밖에 없도록 크다.) 반면에 노애는 단순히 거시기 크기로만 유명하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라스푸틴.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

노애 에피소드는 그 모든 '돌쇠와 마님' 이야기의 전형이다. 배운 것 없고 '몸'만 튼튼한, 신분은 낮으나 밤일을 잘하여 총애를 받는 남자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존재다. MBC 라디오 <최양락의 재밌는 라디오>에서 하루도 안 빼고 '마님 시리즈'가 방송되고 있기도 하다. 그 예를 들자면 한이 없겠지만, 크고 실한 아랫도리가 없는 '마님 방 돌쇠'는 상상하기 어렵다.

필자는 지난 연재분부터 3회 정도에 걸쳐 정력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오해를 방지하고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필자가 의미하는 '정력의 정의'라는 것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특질들을 규명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력이라는 건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다. 서양 의학 용어가 아님은 당연하고, 한의학 용어도 아니며, 정력이라는 단어를 쓰는 맥락이나 그 의미도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르다. 필자가 시도하는 '정의'란 일반적으로 무엇을 가리켜 정력이 세다고 하는지에 대한, 즉 사회적 통념을 정리하는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를 먼저 고찰해야 왜 남자들이 그렇게 정력에 목을 매는지 논의를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정력은 남자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때 "이러이러한 점에 비추어보아 여자에게도 같은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라고 반론하는 것은 일리는 있을 수 있어도 적절한 반론은 아니다.

우리가 '체력이 강하다'라고 할 때엔 그 사람의 체격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체조 선수 양학선 같은 단신이라 하더라도 단련을 통해 얼마든지 강한 체력을 만들 수 있다. 손이 작아도 악력이 강할 수 있고, 몸이 가늘어도 장의 소화력이 강할 수 있다. 정신력이 강하다고 할 때에 두개골의 용적이나 뇌의 크기 같은 걸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정력에 있어서만큼은 신체적 크기와 큰 친화성이 있는 듯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정력남은 많은 경우 사이즈가 컸거나, 혹은 컸다고 여겨진다. 변강쇠는 기록된 원문에 성기의 크기나 강직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만들어지는 영화에서 늘 그 크기가 강조된다. 최근 많이 시행되는 남성 확대술의 경우에도 변강쇠 운운하는 광고 문구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확대술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성기의 크기가 작아도 얼마든지 상대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고, 오히려 너무 크면 부담스러워서 별로라고 하는 여자, 혹은 동성애자들도 은근히 많다. 즉 정력이란 섹스 잘하는 능력, 만족감을 주는 능력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개념이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받은 이유가 일단 체격이 크고 건장하다는 것과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몸집이 작아도 야구를 잘할 수 있고 몸집만 크다고 야구를 다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신체 조건을 꼽는 것처럼, 크기가 작다고 섹스를 못하는 것도 아니요 크다고 다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진정한 정력남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크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력의 필수 요소에 크기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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