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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무한'한데 꽉 찬 호텔, 투숙객은 묵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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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무한'한데 꽉 찬 호텔, 투숙객은 묵을 수 있다?

[철학자의 서재] 존 배로의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

거기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바닷가에 서 있지만, 수평선을 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칠흑 같은 어둠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의 무수한(numberless) 별과 끊임없는(ceaseless) 파도소리만이 그가 바닷가에 있음을 증명해줄 뿐이었다. 그는 아무런 경계가 없는(boundless) 그곳에서 무한(infinity)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이 무한에 대해 어떤 것을 생각하였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는 영원히(eternity)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때때로 무한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아마 대부분은 무한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우리를 대신하여 종교, 철학, 수학, 물리학 등이 무한을 어떻게 다루고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존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해나무 펴냄)이다. 이 책에 담긴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유한한 우리가 무한과 친숙해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1. 무한호텔의 역설

▲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존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해나무 펴냄). ⓒ해나무
이 책의 두 번째 장에서는 재미있는 논리퀴즈를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무한호텔의 역설'이다. 위대한 독일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가 지어냈다고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우리의 직관과 논리가 무한의 문제에 관해 처리할 때 매우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무한은 그 자체로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먼 미래에 어느 별에 객실 수가 무한 개인 호텔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호텔의 모든 객실에 손님이 투숙하고 있어 빈 방이 없는 상태이다. 즉, 기존의 손님을 쫒아내지 않고서는 새로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새로운 손님이 한 분 와서 빈 방을 요청하고 있었다. 베테랑 지배인은 빈 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기존의 손님을 쫒아내지도 않고 새로운 손님에게 빈 방을 내주었다. 그 지배인은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그로부터 며칠 후 여전히 빈 방 없이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는 이 무한 호텔에 이번에는 무한 명의 손님이 찾아와서 빈 방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한 사람 당 방 하나를 배정해 달라는 것이다. 정말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베테랑 지배인은 기존의 손님을 쫒아내지도 않고, 새로운 손님들 모두에게 빈 방을 각각 하나씩을 배정하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였다. 어떻게? 해답은 아래의 힌트와 책을 통해 확인하도록 하자.

2. 그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머리가 나빴다.

우리는 통상 무한을 엄청나게 큰 것과 유사하게 생각한다.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을 무한하다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하지만 무한이 꼭 큰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책은 예의 '제논의 역설'에 대한 언급한다. 거북이와 아킬레스가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하되,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10미터 앞에서 출발한다면, 아킬레스가 아무리 빨라도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그 역설 말이다. 이 역설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지만, 무한의 문제에 관한 한 무한 분할과 무한 분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한소를 생각하게 만든다.

무한소가 아닌, 일정한 크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것은 불가능할까? 예를 들어 정다각형과 원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 순차적으로 변의 개수를 늘려 가면, 그 다각형은 원과 매우 유사해진다. 하지만, 무한각형일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각형일 뿐 원은 아니다. 그리고 그 무한한 변을 가진 다각형은 아무리 커져도 항상 그 다각형에 외접하는 원보다는 작을 수밖에 없다. 무한이 항상 큰 것은 아니다. 유한한 크기를 가진 무한에는 패턴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 로저 펜로즈가 발견한 '촉과 연을 이용한 비주기적이고 무한한 타일 붙이기'가 하나의 예이다. 또 하나는 프랙털(fractal)이라고 부르는 패턴이다. 이는 자연계에서 많이 발견되는 패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나무 잎새의 모양은 나무 전체의 모양과 유사하고, 산의 일부의 모양은 전체 산의 모양과 유사하고, 자식은 부모와 유사하다.

이런 프랙털 패턴은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보다 작을 수 있다는 기묘한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무한은 언제나 유한보다 크다는 우리의 상식이 전혀 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고 있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 무수히 많은 생각을 담아내기에는 머리가 나빴다고(유한하다고) 포기한 그 사람은 사실은 포기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3. 만약 우주의 끝에 가서 팔을 바깥으로 내밀면 어떻게 될까?

이 물음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였던 당대의 어떤 한 철학자가 제기한 것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둥글며 유한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는 우리가 우주를 천구(天球)라고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만약 우주가 천구라면, 분명히 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위와 같은 매우 난감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무한은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 현실적 무한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 답했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가령 음의 정수와 양의 정수를 나열해보자. 그렇다면, 음의 정수의 가장 첫 번째 숫자와 양의 정수의 마지막 숫자는 무엇일까? 그 어떤 숫자를 후보로 내세워도 언제나 그것보다 작은 수와 그것보다 큰 수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음수의 첫 번째 수와 양수의 마지막 수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첫 번째 수와 마지막 수를 생각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무한을 생각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하는 것이다. 즉, 그 수들은 존재하지 않되, 존재하는 수들은 유한한 수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수와 마지막 수는 유한한 수들을 유한한 수로 만들기 위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수일뿐이다. 요약하자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한은 잠재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고 따라서 애초의 질문은 사실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4. 1+1=1, 이를 증명하다!

어린 시절에 일종의 궤변으로 많이 듣던 말이다. 1+1=2지만, 물방울 하나에 또 한 방울을 더하면, 하나의 물방울이 되지 않느냐? 우리는 이것이 틀렸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부피 혹은 질량이 2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의 영역에서는 이를 궤변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제 아래의 조화급수를 생각해보자.

S=1-1+1-1+1 .......
이제 이 무한한 급수의 합을 구하면 답은 무엇일까?
S=(1-1)+(1-1)+...... 그렇다면 S=0+0+0+.... 이므로 답은 0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항을 아래와 같이 다른 방식으로 묶을 수 있다.
S=1+(-1+1)+(-1+1)+(-1+1)+....
그러면, S=1+0+0+0+.... 이므로 답은 1이 된다.
따라서 S=0 이고 또 S=1이다. 그러므로 0=1임을 증명되었다.
이제 원래 식으로 돌아와 1+1은 1=0이므로 1+0과 동일하다. 1+0=1이므로 1+1=1이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런 결과를 수학은 증명해 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많은 수학자들이 무한의 문제를 수학에 들여놓기를 거부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유명한 피타고라스 역시 무한은 악마의 영역으로 간주하여 수학에서 배척하였고, 근대의 많은 수학자들은 무한을 '논리세계의 흑사병'으로 간주하여 수학에서 추방하고자 하였다.

5. 악마는 무한이 아니라 그들이다.

무한의 문제를 수학적으로 단숨에 해결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게오르크 칸토어(1845~1918)다. 그는 무한을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일반적으로 무한은 1을 더해도 동일한 무한(∞+1=∞)이고, 무한을 더해도 동일한 무한(∞+∞=∞)이 된다. 또 자연수는 짝수와 홀수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자연수의 집합은 짝수의 집합이나 홀수의 집합보다 커야 한다. 하지만 집합의 크기를 확인하기 위해 각각의 원소를 일대일 대응시켜보면, 자연수 집합의 모든 원소는 짝수의 집합이나 홀수의 집합 각각의 원소들과 일대일 대응된다. 따라서 자연수의 집합은 짝수의 집합(또는 홀수의 집합)과 그 크기가 동일하다. 정말 기묘하여, 논리를 중시하는 수학자에게 무한은 악마 같은 존재일 것 같다.

칸토어는 무한에도 위계가 있고(자연수의 집합이 짝수 혹은 홀수의 집합보다 크다는 식으로), 셀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몇 가지 증명이 있으나 여기에서 멱집합을 통한 증명 하나만 확인해 보자. 일반적으로 원소가 3개인 집합 S가 있다면, 그 부분집합의 개수는 2의 3승이다. 예를 들어 집합 {A, B, C}가 있다면, 이 집합은 부분집합은 {φ}, {A}, {B}, {C}, {A, B}, {A, C}, {B, C}, {A, B, C}의 8개 있게 된다. 이제 이 부분집합들을 원소로 가지는 집합인 멱집합(power set)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이 멱집합은 애초의 집합보다 언제나 클 뿐더러 일대일 대응을 시키고도 항상 남는 원소가 존재하게 된다.

이제 만약 무한집합 X1이 있고, 이 무한집합의 멱집합 P[X1]을 만든다면, 이 멱집합은 애초의 무한집합보다 무한히 크면서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 않는 집합이 된다. 이 최초의 멱집합을 X2라고 한다면, 다시 X2의 멱집합을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을 X3라고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한집합은 X1
무한의 크기와 위계를 증명함으로써 수학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칸토어였지만, 당대에 그는 같은 수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당대 수학계의 거장 크로네커는 심지어 비열하기 짝이 없는 방법까지 동원하여 칸토어를 매장시키려고 하였다. 이런 박해 아닌 박해에 시달린 칸토어는 편집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단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안 그래도 무한의 문제에 매달리느라고 미칠 지경이었던 칸토어에게 동료 수학자들의 몰인정한 대접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악마는 무한이 아니라 너희들이다!'

6. 만약 우주가 무한하다면, 중심이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를 인정해 준 신학자들이 없었다면, 아마 칸토어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좀 더 일찍 사망하였을지도 모른다. 칸토어는 무한을 절대적 무한, 수학적 무한, 물리적 무한으로 구분하였다고 한다. 절대적 무한은 오직 신의 정신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무한이며, 수학적 무한은 그가 초한수(transfinite number)라고 부르는 것으로 멱집합 증명에서 보듯이 크기와 증감을 논할 수 있는 무한을 말한다. 물리적 무한이란 말하자면 우주 전체의 크기가 무한한가 유한한가를 따질 때 생각할 수 있는 무한이다.

당대 신학자들은 무한에 대한 이러한 칸토어의 생각이 신적 완전성을 증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칸토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분명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신적 완전성을 무한성에 기초하여 증명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적 세계관과 모순을 일으키는 면이 있음을 당대 신학자들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조르다노 브르노(1548~1600)는 일찍이 '만약 우주가 무한하다면, 우주에는 중심이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만약 어떤 것에 중심이 있다면, 그 중심이 수학적 중심이든 역학적 중심이든, 가장자리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무한은 가장자리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중심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브르노의 생각이다.

중세에서 근대까지 기독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고 또 동시에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무한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이 무한하다면, 지구는 중심이 될 수 없고, 지구가 중심이라면 신은 무한할 수 없다. 비록 후대에 칸토어를 감싸않은 신학자들이었지만, 당대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그를 화형에 처했고, 브르노는 "선고를 받는 나보다 선고를 내리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더 클 것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재로 화했다. 역시 무한의 문제는 악마를 부르는 문제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7. 우주는 경계는 없지만(boundless) 유한(finite)하다.

우리에게 여전히 남는 의문은 이 우주공간은 무한할까 유한할까 하는 문제이다. 책에는 근대에서 현대 물리학에 이르는 우주공간의 무한성 여부에 대한 과학자들의 여정을 간결하게 담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아인슈타인의 우주론에 대해서만 언급하도록 하자. 아인슈타인은 저 유명한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질량에 영향을 받아 휘어질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실제로 우주공간에는 수많은 질량체들(별 등등)이 존재하므로 우주는 일정한 곡률을 가진 채 존재하게 된다.

만약 질량체가 없거나 너무 적다면(임계밀도 이하라면) 우주는 곧게 펼쳐져 있을 것인데, 과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적어도 관측범위 내의 우주에는 임계밀도 이상의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는 일정한 곡률을 가진 유한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은 클라인 씨의 병(Klein's Bottle)과 유사하다고 한다. 2차원으로 비유하자면 안팎이 구분되지 않는 뫼비우스띠처럼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경계가 없는 그렇지만 유한한 3차원이라는 것이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주에 임계밀도만큼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우주는 무한할까? 이 책은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떨까?

확실히 유한한 우리에게 무한은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고, 한 가지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철학, 종교, 수학, 물리학 등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한의 비밀을 엿보려고 시도하였지만 아직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속 시원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다. 바닷가에 서 있던 그 사람은 무한에 대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였을까? 분명히 그는 그가 '무한을 그리고 있었던 것'(반 고흐)도 아니고, 불멸(immortality)을 염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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