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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소음 고통으로 '전쟁'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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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소음 고통으로 '전쟁'을 생각하다!

[마녀의 '도서관 편지'] 위층의 1209호에게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
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유인선의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최병욱의 <베트남 근현대사>


아침상을 치우는데 위에서 우당탕탕 달리는 소리가 납니다. 드디어 아이가 일어났구나, 설거지하는 손이 빨라집니다. 건강한 아이는 달리고 저는 정신없이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섭니다. 봄꽃 흐드러진 공원을 지나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집값 오를 리 없는 변두리 동네지만 집 옆에 공원과 산이 있고 가까운 데 도서관이 두 개나 있는 이 좋은 동네를 떠나야 하다니, 한숨이 나옵니다. 당신집의 소음을 피해 이사를 결심하고 두어 군데 복덕방에 말을 해두긴 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한심하고… 복잡한 심사로 서가를 어슬렁거리는데 문득 책 한 권이 눈에 띕니다.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하재홍 옮김, 아시아 펴냄). 당신 나라에서 지난 2011년에 '가장 좋은 책 상'을 받은 작품이지요. 망설이다 책을 집어 듭니다. 책 한 권으로 지난 3년간 소음과 함께 쌓여온 불신과 불만의 더께를 날려버릴 순 없겠지만 그대로 포기하긴 싫은 오기 같은 것에 떠밀려 책을 펼칩니다. 책머리에 실린 작가의 말, 말이 통하지 않는 한국 작가들과, 한때 서로에게 총을 쏘던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이해하고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대목에서 눈길이 머뭅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당신 집 문을 두드리며, 말만 통했어도 이보단 나았을 텐데,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 <전쟁의 슬픔>(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아시아 펴냄). ⓒ아시아
3년 전 처음 쿵쾅 소리에 이끌려 위층 벨을 누를 때만 해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리라곤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사 온 이들이 베트남 외교관 가족이란 말을 듣곤 평소 베트남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갖고 있던 저는 기뻐했지요. 하지만 쉬지 않고 뛰는 아이에 가구 끄는 소리, 틈만 나면 모이는 손님들까지 소음은 갈수록 심해지는데 말은 통하지 않으니 미치겠더군요. 더구나 처음에 미모로 저를 사로잡았던 아이 엄마는 항의를 해도 무뚝뚝한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하니 나중엔 우릴 괴롭히려고 일부러 시끄럽게 구는 밉상으로만 보였습니다. 아마 그 무렵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베트남 여자는 무섭다는 말을 하고 다닌 듯합니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의 갈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고요.

다행히 그들에 이어 들어온 후임자 가족은 아이가 없어 조용했고 저도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남매를 둔 당신 가족이 들어오면서 집은 다시 지옥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달리고 머리는 울리고, 그나마 당신 부부가 예전 사람들보다 우리의 항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지만 그것도 소음이 계속되면 별 위로가 안 되었습니다. 한국인들끼리도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는 걸 알면서도 화가 치밀면 자꾸 베트남 사람이라 그런가 싶고 베트남은 후진국이라고 욕하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알았습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말해왔지만 저 역시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편견 많은 인간임을, 저 역시 말 따로 행동 따로인 한심한 인간임을.

책장을 넘깁니다. 바오 닌이 그리는 희뿌연 '고이 혼'의 정경에 얼마 전 본 영화 <지슬>의 화면이 겹칩니다. "수많은 혼령과 귀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거부하고 배회"하는 곳, 그래서 이름마저 '혼을 부른다'는 뜻의 고이 혼이 되었다는 그곳을 생각하니 절로 한마을 사람 백 수십 명이 숨어 있다가 다 원혼이 되고 만 제주 큰넓궤가 떠오릅니다. 이념이 다르단 이유로 한 나라 사람끼리 싸우고 죽은 닮은꼴의 처참한 역사가 새삼 가슴을 칩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이념을 넘어 슬픔으로 기억하는 바오 닌의 베트남, 바로 당신의 나라가 부러웠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 역사를 모두의 슬픔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 <호치민 평전>(윌리엄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부러움은 이윽고 궁금증이 되었습니다. 같은 비극을 겪었으나 우리와는 다른 모습의 당신 나라에 대해 알고 싶어졌지요. 그래서 <전쟁의 슬픔>을 읽으면서 동시에 윌리엄 J. 듀이커가 20여년에 걸쳐 쓴 노작 <호치민 평전>(정영목 옮김, 푸른숲 펴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970쪽에 달하는 방대한 평전을 읽는 동안에도 당신의 어린 아들은 종횡무진 집안을 뛰어다녔고, 저는 그때마다 책을 덮고 중개인을 따라 층간소음 없는 맨 꼭대기층 집들을 보러 다녔습니다. 뒤얽힌 현실 앞에서 책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생각하며, 그러나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 채 책과 현실 사이를 오갔지요. 그러니 스물아홉의 응우옌 아이 꾸옥이, 훗날 호찌민이란 이름으로 베트남 독립을 이끈 그가 파리의 아파트에서 새벽까지 논쟁을 벌였다는 일화를 읽자마자 대뜸 그 아래층 사람들의 괴로움부터 떠올릴 수밖에요.

하지만 담백한 듀이커의 펜 끝에서 살아난 호찌민의 모습은 온종일 천장으로만 향하던 제 정신의 촉수를 건드렸고, 제 머리는 이제 다른 이유로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혁명을 성공시킨 공산주의자로만 여겼던 호찌민이 누구보다 타협과 협상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외교의 달인이란 사실에 저는 놀랐습니다. 또한 1945년 독립선언식에서 그가, 제 나라를 지배한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물론이요 자신과 이념이 다른 미국 독립선언문을 빌려 '평등과 자유, 생존과 행복의 권리'를 표방했다는 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생각이 달라도 좌우를 나누고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 세력을 키우려는 정치(의 역사)에 익숙한 제게는, 그런 포용의 수사가 설령 정치적 술수요 전술이라 해도 놀랍기만 하더군요. 더욱 놀라운 것은 호찌민만이 아니라 그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민족주의자 판 쭈 찐 역시 다름보다 같음에 주목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판 쭈 찐은 소련행을 택한 호찌민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응우옌 아이 꾸옥의 행동에 지혜로운 숙고가 부족하다 하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소. 그에게는 애국자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오. 꾸옥은 동포를 해방하기 위해 외롭고 어려운 길을 택했소."라고 옹호했지요.

그걸 보면서 이념과 방법, 노선과 전술을 놓고 사분오열되어 끝내 분단의 빌미를 제공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를 떠올렸습니다. 안타깝고 부럽더군요. 독립과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선 크고 작은 차이에 연연하지 않는 정치, 그것이 당신의 나라가 우리보다 늦게 통일왕국(*)을 세우고 우리보다 오래 식민 지배를 받고도 우리보다 일찍 통일 독립국을 세울 수 있었던 동력이 아닐까 싶었지요.

(*필자 주 : 1802년 수립된 응우옌 왕조는 현재와 비슷한 모습의 베트남 북중·남부를 포괄한 최초의 통일왕조이자 최후의 전통왕조였습니다. 왕조는 1850년대부터 스페인과 프랑스 군대의 침입에 시달렸고 결국 베트남은 1883년 아르망 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뒤, 1885년 청불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공식화되었습니다.)

허나 어쩌면 제가 두 나라의 차이를 과장하는지도 모릅니다. <호치민 평전>에 이어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 지음, 이산 펴냄)와 <베트남 근현대사>(최병욱 지음, 창비 펴냄) 같은 역사책을 찾아 읽으며, 고대에는 중국의 지배를 받고, 독립을 하자마자 분단이 되고, 외세가 개입한 길고 처참한 내전을 겪었다는 점에서 두 나라 사이엔 공통점이 더 크다는 걸 알았습니다. 일테면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되기 3년 전(B. C. 111) 베트남에도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고, 1945년 9월 강대국들의 협상에 따라 한반도 북쪽엔 소련, 남쪽엔 미국의 군정이 들어선 바로 그때 베트남에서도 포츠담 회담의 결정에 따라 북부엔 중국 국민당군, 남부엔 영국군이 진주했지요. 그뿐인가요? 한반도가 3년간 이백 수십만 명이 죽은 끔찍한 내전을 겪은 것처럼 베트남도 15년 간 110만 명이 죽고 수백만 명이 부상당하는 내전에 시달렸습니다. 두 나라가 똑같이 겪지 않았으면 좋을 역사를 겪은 것이지요.

그걸 알고부터 베트남 이웃과는 도무지 통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던 제 마음이 조금씩 바뀌었나 봅니다. 위에서 쿵쾅거리면 불끈 화부터 치밀던 전과 달리 소리를 피해 자리를 옮기거나 책을 덮고 청소를 하는 등, 소음을 피하는 요령을 찾게 된 것이지요. 신기한 것은 그러면서부터 소음 자체가 약간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혹시 저의 긍정 텔레파시가 당신에게 통한 걸까요? 아, 그렇지 않다고, 당신의 아이가 씩씩한 달음박질로 알려주네요. 역시 마음을 바꾼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군요.

그래도 한 가지 변한 것은 있습니다. 현실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베트남 역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베트남을 은근히 무시하던 제 시각이 무지의 소치임을 깨달았고, 전과 다른 눈으로 당신과 당신 나라를 보게 되었지요. 조선의 임금들이 중국 황제를 섬기며 스스로 왕이라 낮춘 것과 달리 베트남의 역대 군주들이 중국과 대등하게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사용한 것이나, 똑같이 유학을 숭상했음에도 조선과 달리 1820년대부터 대규모 선단을 해외에 파견하여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하주공무(下洲公務)의 역사를 통해, '오랜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은 불쌍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았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베트남 여성의 활약상입니다. 중국의 지배에 대항해 최초로 저항운동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을 칭한 쯩씨 자매, 18세기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시로 문학 발전을 이끈 여성 시인들, 수백 년간 상업에 종사하며 원양어선을 타고 동남아시아 각지로 진출한 여상(女商)들, 그리고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한 독립전쟁 때부터 줄곧 총을 들고 전선을 누빈 여군까지, 베트남 여성들은 역사의 고비마다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었지요. 최근 인터넷에서 춤 잘 추는 한 어린이를 두고 엄마가 베트남인이라 하여 "열등 인종 잡종"이니 뭐니 하는 악성댓글을 단 이들 때문에 시끄러운데, 베트남 여성들의 빛나는 역사를 알면 뭐라 할까 싶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요. 저도 그렇지만, 상대를 모르면서 섣불리 판단하고 자신의 편견으로 세상을 비틀어 보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작게는 층간소음부터 크게는 민족·인종 갈등까지 모두가 서로를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상대를 오해하고 원망하는 데서 불거지는 경우가 많지요. 아마 그 동안 당신도 귀 밝은 이웃 때문에 피곤했을 겁니다. 그래서 부탁하건대, 저도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 당신도 피곤한 이웃을 이해하려 노력해주었으면 합니다.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르지만 서로의 사정을 알고 헤아리려 애쓴다면 닮은 역사처럼 친근한 이웃사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의 한국 생활이 좋은 기억으로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까칠한 아래층 이웃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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