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낸시 뉴턴 베리어는 1969년에 태어난 지 3일밖에 안 되는 딸아이를 입양해서 키운 입양 부모이자 심리치료사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수많은 입양인을 만나 인터뷰하며 그들의 생생한 경험과 느낌을 듣고, 다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참조하며 쓴 책이 바로 <원초적 상처(The Primal Wound)>(뿌리의집 옮김, 뿌리의집 펴냄)다. 이 책은 저자가 이야기한대로, "입양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쓰인 책이다.
▲ <원초적 상처>(낸시 뉴턴 베리어 지음, 뿌리의집 옮김, 뿌리의집 펴냄). ⓒ뿌리의집 |
서구 사회의 경우 자본주의 중산층 핵가족 신화가 극에 달하던 1950년에서 1970년 사이에 수많은 미혼모, 특히 백인 미혼모들이 낳은 아이들이 다른 중산층 백인 가정으로 대거 입양되었다. 당시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성관계를 갖고 아이를 임신한 것은 일종의 정신과적 치료를 요하는 일로 여겨졌다. 엄마는 미혼모 시설에 수용해서 정신교정을 받았고, 아이는 입양 가정으로 보내졌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구 역사에선 아기를 국자로 퍼내듯 친생모로부터 분리하였다 하여 '베이비 스쿱 시대(Baby Scoop Era)'라고 기록한다.
바로 이 시대에 다른 백인 중산층 가정으로 입양되었던 아이들이 성장하여, 80년대 중·후반부터는 자신의 출생 기록 공개를 요구하는 일종의 사회운동이 일어났다. '입양'이 입양 부모, 입양인, 친생부모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수 있음을 감지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낸시 뉴턴 베리어는 자신이 입양한 딸아이를 키우며 맞닥뜨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입양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저자가 들은 것은 바로 '행복'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그때부터 누구나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던 입양에 문제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양된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훨씬 더 정신과 치료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행동장애로 고통 받을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낸시 뉴턴 베리어는 입양된 아이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행동장애의 요인과 '슬픔'의 관계성을 파헤친다. 그리고 아이는 태어난 후 입양 부모를 만나 사랑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배 속에서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와 유전적 정보를 나누고 정서적 교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이가 잉태되고 태어나는 과정은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다. 아이와 친생모에게는 유전적 정보를 공유하고, 호르몬을 주고받고, 심리적·정서적·영적으로 연결되었던 역사적 시간인 것이다.
입양은 아이와 엄마와의 이 역사적 과정의 단절을 의미한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걸 환영해야 할 엄마의 부재는 아이에게 상실의 경험으로 남아 상처가 된다. 그 상처는 세포 속에 기억되고 무의식에 남는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원초적 상처'다.
아이가 이 원초적 상처를 받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친생모가 얼마나 훌륭한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입양 부모가 얼마나 사랑을 주었는지 아니었는지의 문제와도 관계가 없다. 자신이 10달 동안 역사를 공유했던 엄마와의 근원적 박탈로 인한 상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되지 않는다.
저자는 아이와 엄마의 관계를 하나의 접시로 비유하고 있다. 입양은 접시를 두 쪽으로 내는 일과 같은데, 다시 붙인다 해도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입양을 통해 가정을 찾아주는 일은 이질적인 것과의 관계 복원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입양 부모는 바로 이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입양한 아이와의 관계 맺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즉 모든 사랑을 다 주려는 입양 부모로서는 고통스럽겠지만 그 누구도 친생엄마를 대신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해야 비로소 입양한 아이와의 올바른 관계 맺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초적 상처>는 '모성' 신화를 조장하지 않는다. 또한 '혈연' 가족 신화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단지 아이는 다리 밑에서 주워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잉태되고 만들어지던 그 순간부터 존재하고 있다는 철학적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저자도 이야기하듯, "아이와 엄마가 꼭 함께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엄마에게서 아이를 데려올 때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입양을 통해 불쌍한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양된 아이들은 자신의 유전적 유산과 연결되지 못한 것, 타인에 의해 무작위로 다른 환경에 놓인 상황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무력함을 느끼고 자책한다. 나는 괴로운데 상대는 사랑한다고 하면 미칠 노릇이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내 사랑이 무슨 결과를 가져오는지 들여다보는 일이, 어떻게 입양을 통해 더 많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보다 앞서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입양은 "친생모는 자식을 포기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근원적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입양한 아이들을 키우며 입양모는 친생모를 적절히 대신하는데 실패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아이들은 태어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모두가 지는 게임이었다. 이러한 게임의 규칙을 바꾸기 위해 저자는 '전인적 사회복지'를 요구했다. 즉 더 이상 아기를 '탄생 이후 육화된 몸'으로만 보지 말고, 그 아이가 원래 연결되어 있던 상태가 깨어지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그 아이를 진정 사랑으로 보호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다행히 자신이 입양한 딸은 "어려움을 표현하는 아이"였기에 "수많은 입양가족들이 겪는 비극상황, 미성숙한 상태에서 집을 떠나거나 가정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국 내 입양 가정에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많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초적 상처>는 입양인이 겪는 어려움뿐 아니라 입양 부모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입양에 대해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연령별로 차별화된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아이들의 저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떻게 훈육할지 등 입양 부모로서 알아야 할 여러 매뉴얼을 제시한다. 현재 입양한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입양 부모에게도 매우 유용한 책이다.
하지만 애초에 접시를 깨지 않았다면 접시를 잘 붙이기 위한 노력은 필요 없지 않을까. 우리 사회도 한국전쟁 이후 해외로 입양 보냈던 수많은 아이들이 돌아와 아픔과 슬픔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더 이상 불행한 환경에서 자라난 특별한 아이들의 경험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의 슬픔과 아픔은 우리의 역사와 관계가 있고, 앞으로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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