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인류의 역사는 너무나 길고, 인류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인 책도 그만큼 많다. 게다가 '오직 한 장르'의 책만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몇 가지의 특정 관심사에 따라 책들을 하나씩 모으다보면, 정신차려보니 내 옆에는 쓰러지기 직전의 책 더미가 위태롭게 겹겹이 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수명이 짧은 한국에선 나오자마자 당장 사야 하는 책의 종류가 하염없이 늘어난다. 당장 한국에 큰 일이 생긴다면 어디로 피신해야 할까, 에 앞서 내 책들을 어떡하지, 라는 근심은 언제나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업보다.(이사라도 갈라치면 이삿짐센터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내내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고민을 혼자서만 뒤집어 쓴 채 집 안에서 끙끙거려도 소용없다. 극도로 비사교적인 덕후들조차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고 싶어한다. 이사나 결혼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닥쳤을 때 다들 어떻게 책 문제를 해결하는지, 서가에 꽂힌 책들의 배열은 어떻게 하는게 가장 효과적인지, 어떤 책 보관 방식이 가장 이상적인지 등의 시시콜콜한 현실적 문제부터 시작하여, 혹은 어쨌든 나의 희귀한 사랑의 가치를 이해해주는 이들 앞에서 나만 알고 있던 귀한 책에 대해 뽐내고 싶고, 상대방만 알고 있던 책의 정체도 캐묻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책, 아까운 책, 기다리는 책에 대한 주문을 그렇게 외우고 다니다보면, 어느 샌가 가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책이 재발간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시공간에서 그 책을 발견하는 행운도 때때로 거머쥔다. 외로운 덕후들이 힘을 합치면 아주 가끔씩, 그렇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때도 있다.
그리하여 '프레시안 books'는 '책덕후'들을 모았다. 각자 헌책방을 운영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하며, 인터넷 서점 MD로 일한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지 말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 옆에서,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던 이 눈물겨운 책벌레들이 풀어놓는 내 인생의 (아까운) 책들에 대한 수다는 더없이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시간 남짓,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정동섭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등장하는 바로 그 도서관 '잊혀진 책들의 무덤'은 잠깐이나마, '잊혀질 뻔했던 책들의 무덤'으로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편집자>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성근, 유진, 최원호. ⓒ프레시안(손문상) |
프레시안 : 이번에 '아까운 책' 특집을 진행하면서 각 분야 필자 분들과 수십 곳 출판사에 지난 2012년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치에 비해 주목을 덜 받은 '아까운 책'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독서 인생으로 놓고 보면 아까운 책은 작년에 나온 책으로 한정시키기엔 한없이 많잖아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살아온 '책벌레' 분들을 모셔서 그 이야기를 수다 식으로 풀어나가고 싶었습니다. 책벌레들이 말해주는 숨어있는 아까운 책들이라고 할까요.
세 분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부터 책에 빠져서 산 경험이 지금 하시는 일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른바 '덕업일치'죠. (웃음) 헌책방 운영자, 인터넷 서점 MD, 편집자이신 세 분 각각, 간단한 자기소개와 지금의 자기 모습을 만든 어린 시절 독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다면요.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윤성근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네에 국민대학교 다니는 형들이 있었어요. 데모도 하고 잡다한 모의도 하는 형들이었고 당연히 책도 많이 가지고 있었지요. 초등학생한테 맞는 책은 아니었지만 놀러가서 구경하는 것만으로 좋았고 덕분에 헌책방의 존재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열심히 청계천 주변 헌책방에 드나들었고, 헌책 판 돈으로 다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사들이곤 했죠.
그런데 사실 고등학교 이전까지의 독서는 좋은 추억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중학교 때까지는 좀 허세로 책을 읽었거든요. 흔히 말하는 '중2병'을 중 2때 실제로 겪은 거죠. (웃음) 교실에서 책 좋아하는 애들끼리 모여 놀았는데, 대부분 "너 그건 읽어 봤냐"며 중학생이 범접하기 어려운 책들을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저 역시 허세를 부리고 싶어서 이해도 안 가는 책을 많이도 읽었죠.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됐어요.
최원호 : 저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5년째 MD로 일하고 있습니다. 담당 분야는 지금까지 10여 가지를 거쳤네요. 주로 인력이 빈 분야를 메우곤 하다가 지금은 외국소설과 예술 분야를 맡고 있어요.
고향이 경상남도 진해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외곽에 있는 어촌 마을이었어요. 윤성근 대표님이 그랬듯이 저도 뭘 갖다 팔아서 용돈을 벌었는데요. 그게 물고기였어요. (일동 웃음) 네… 실제로 고기를 낚아서 한 마리에 500원씩 받고 팔았습니다. 주변에 책 읽는 친구들은 없었죠.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아들이 똑똑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가진 분이셔서, 방문 판매 하시는 분한테 금성사 전집을 구입하셨어요. 그 중에 어린이용 SF 시리즈가 있었는데, 거기 판권 계약 없이 각색된 걸작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어떤 작간지도 모르고 열심히 읽었죠. 존 윈덤의 <괴기식물 트리피드>처럼 수십 번 읽은 책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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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기식물 트리피드>(존 윈덤 지음, 이태영 그림, 신영희 옮김, 옹기장이 펴냄). ⓒ옹기장이 |
유진 : 저는 2010년부터 웅진지식하우스 3팀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한길사와 민음사에 있었고요.
아주 어린 시절에는 집에 있는 계몽사, 금성출판사, 웅진의 전집을 많이 봤었고, 그것보다 좀 시간이 지나서는 독서량은 느는데 집에 돈은 많지 않으니까 어머니가 헌책방에 데려다 주셨어요. 선택권은 제게 주시긴 했는데 '고전만, 그리고 비싸지 않은 것만'이라는 제한을 두셨어요. 그래서 권당 500원짜리 삼중당문고만 엄청나게 봤죠. 그리고 학원출판사에서 나온 거랑,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 하드커버 전집류도 있었고요. 덕분에 중학교 시절 초기까지는 거의 고전만 본 것 같아요. 아참, 어머니가 바쁠 때 절 도서관에 던져놓으셨거든요. 그때 소년소녀 미스터리 전집 시리즈를 독파했죠. 홈즈 한 번 보고 루팡 한 번 보고, 앨러리 퀸이랑 윌리엄 아이리시까지….
그런데 사실 중·고등학교 때는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보느라 그 기간의 독서 체험은 제게 있어 약간 공백이에요. (웃음) 그래도 시공사에서 그리폰북스 나올 때 SF도 한참 열심히 봤었고, 무라카미 하루키에 빠져서 일본 소설도 많이 찾아보게 되었고요. 대학 전공은 정치학과였는데 생각보다 공부가 재미없어서 학점은 포기하고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어요. 그 당시엔 약간 '진중권 빠'가 되어서 한국 논객의 책들도 열심히 찾아보았죠. 현대 유럽 문학 작품이나 인문서, 철학서를 읽게 된 것도 그즈음인데 한국 소설은 그다지 많이 읽진 않았어요. 이것저것 잡다한데, 출판사에 들어온 뒤에도 다양하게 읽어야 하다 보니 특정한 한 분야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애매하군요.
충격! 이 책을 만나고 그들은…
프레시안 : 어린 시절엔 손에 잡히는 대로 독서를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어느 순간 나만의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나요? 책 한 권이든 작가 한 사람이든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를 깨닫게 했거나 '이게 결정적이었다' 싶은 만남의 순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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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웃사이더>(콜린 윌슨 지음, 이성규 옮김, 범우사 펴냄). ⓒ범우사 |
윤성근 : 전 아까도 말했지만 카프카의 <변신>이요. 누가, 언제 묻더라도 이거 외엔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이 작품을 발견하고 앞부분을 조금 읽었는데 너무 충격적이라 '이건 집에 가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마치 카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을 보고 집에 뛰어가서 읽었다는 일화처럼, 저도 날다시피 집으로 달려와 금방 다 읽어버렸어요.
그리고 1~2주 지나니 이걸 원서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문제는 제가 다니던 학교에선 선택 가능한 제2외국어가 일본어밖에 없었어요. 전에 없던 강렬한 욕망에, 결국 충정로에 있는 소피아 서점에 가서 <변신> 원서랑 독일어 사전을 사버렸어요. 독일어 원서만 파는 서점인데 지금도 있어요. 50년 넘게 하셨으니 주인장이 이제 아흔을 넘기셨을 거예요.
그리고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우는 친구한테 기초를 가르쳐달라고 졸라서 정말 대강 배웠어요. 이후에는 '독일어 첫걸음' 유의 책을 통독하고 <변신>을 조금씩 읽어나가게 됐죠. 그래도 졸업할 때까지 다 읽지 못했지만요. 어쨌든 외국어 작품을 읽다가 좀 더 이해하고 싶은 부분이 생기면,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원서를 독해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편집자 유진. ⓒ프레시안(손문상) |
유진 : 관심 분야가 워낙 많이 바뀌어서 잡다하긴 한데,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삼중당문고에 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었어요. 삼중당문고는 아동용 축약본도 아니어서 초등학생이 읽기엔 좀 어렵고 따분했거든요. 그런데 <설국>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거예요. 내용은 잘 모르겠는데 엄청나게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보고 난 뒤 닳도록 또 읽었고, 나이 들어서까지 되풀이해 읽은 유일한 책입니다. 이 판본을 아직도 갖고 있는데 지금까지 하도 여러 번 봐서 책이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어요. 이 책의 무엇이 절 사로잡았고 어째서 압도적으로 아름다운지 지금도 명확히 알 수 없는데, 볼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바뀌더라고요.
저도 일본어로 쓰인 것을 읽겠다고 <설국> 원서를 사긴 샀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됐고요. 일본어를 떼게 된 건 고등학교 때 <뉴타입>을 보면서… (일동 웃음) 그래서 대학 가서는 하루키를 원서로 읽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전 3권, 휴머니스트 펴냄)는 '이렇게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우리나라에!'라는 충격을 받은 책이었고, 그러면서 '글을 둘러싼 세계'에 눈뜨게 됐죠. 아, 대학교 3학년 때 본 <전쟁과 평화>도 충격이었는데, 블로그에 팬아트를 올리는 등 '팬질'을 추동한 책이었죠. (웃음) <설국>, <미학 오디세이>, <전쟁과 평화> 여기에 <고리오 영감>을 추가하면 제 인생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만의 책'을 찾아서
프레시안 : 이제 구하고 싶어서 안달했던 책들과 그걸 찾아간 모험에 관해 이야기해봅시다. 전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 하면 처음으로 떠오르는 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정성스레 제본을 떴던 기억이에요. 그런데 그러고 나면 1~2년 뒤에 꼭 재출간되더라고요. 그러면 오히려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어요. 아 이거 나만 봐야 하는데…그런 심정 있잖아요.(웃음)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나만의 책을 가져 본 경험이나 그 소장으로 인한 모종의 자부심을 느껴본 경험, 혹시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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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윤성근 :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몰래 가져가고 싶다거나 제본을 떠서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이해는 하는데, 저는 도서관 직인이 찍혀있거나 사인이 남아있다거나 제본된 책은 별로 갖고 싶지 않더라고요. 헌책방에서 일하다보면 심지어 귀퉁이가 접힌 데 민감한 손님도 엄청 많아요. 만화책 수집가 중에는 읽기 위해 한 권, 보관용으로 한 권 따로 사는 분도 많지요. 수집에 대한 기준이 각자 정말 다른 것 같네요.
최원호 : 장르 쪽 팬들 사이에는 그게 확실히 공유되고 있어요. '이걸 갖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 거요. 아예 판매용으로 만들지 않은 책들도 있죠. 이를테면 <3001 : 최후의 오디세이>.
프레시안 : 네? 3001이요?
최원호 : 네. 아서 클라크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김승욱 옮김, 황금가지 펴냄) 다음으로 낸 건데, 국내에 정식 번역된 적이 없어서 팬들끼리 돈을 모아 비매용 한국어판을 만들었어요. 한 200부쯤 찍었을 거예요. 사전에 소장 희망자들이 돈을 모아 제작한 거라 출판사도 없고 판매한 적도 없죠.
헌책방 횡재기
프레시안 : 절판된 책을 찾기 위해 헌책방으로 발품을 판 경험이 있죠? 그때 가끔 찾아오는 환희의 순간을 나누어보고 싶어요. 제 경우 전주로 출장갔을 때 잠시 짬이 나서 헌책방 거리에 갔는데, 금성출판사 '칼라텔레비전 세계교육동화' 전집 중 일부를 발견하고 광분한 적이 있었어요. 그 책 더미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열다섯 권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냐고 여쭸더니 귀찮다는 듯이 싼 값을 부르시더군요. 당시 인터넷 헌책 커뮤니티에서는 비싸게 팔리고 있던 거라 두말 않고 지불하면서, 완벽하게 횡재한 기분이었죠.
유진 : 이문동에 유명한 헌책방 '신고서점'이 있어요. 다닌 대학이 그 근처였기에 엄청 드나들었죠. 아시다시피 1990년대에 SF, 추리소설 명작 앤솔로지가 많이 나왔어요. 그게 2000년대 들어서는 서점에서 구할 수 없었는데, 저는 거기서 굉장히 많이 모았습니다. '심봤다'고 느낀 건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까치글방 펴냄, 1994, 절판)였는데, 남들은 힘들게 구한다고들 하는데 전 의외로 두세 권씩 발견해서 주변에 뿌리고 다녔어요. (웃음) 그리고 운 좋으면 '아름다운가게'에서도 메르헨 전집 같은 걸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어요.
최원호 : 저도 헌책방을 자주 이용했지만 말씀하신 횡재의 경험은 대학교 도서관 서고 개방 때였어요. 제가 다닌 과가 본 캠퍼스가 아니라 지방 캠퍼스에 있었는데, 도서관이 작다보니 새 책을 놓을 자리가 없어서 언제부턴가 1년에 한 번씩 서고에 처박혀 있거나 두 권씩 있는 책을 '떨이'로 팔더라고요. 그런데 그 캠퍼스에 문예창작과도 있었거든요. 아마 그 과 선배들이 옛날에 신청해 놓았던 모양이에요. 1990년대에 나온 좋은 소설이 무지 많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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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도살장>(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아이필드 펴냄). ⓒ아이필드 |
유진 : 아, 그러고 보니 전 토머스 핀천의 <브이>(<브이를 찾아서>)가 너무도 갖고 싶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결국 민음사에 취직해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뒤진 끝에 "이건 내거야!"하며 찾아냈던 기억이 있어요. (일동 웃음) 마찬가지로 찾아 헤맸던 <캐치-22>(전 2권,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민음사 펴냄)는 아예 제가 편집을 담당해서, 행복에 눈물겨워하면서 작업했어요.
최원호 : 전 핀천의 <브이>를 학원사 판으로 갖고 있어요. 옥션에서 어떤 분이 '집에서 이런 게 나왔다. 책이 너무 오래된 것 같다'고 학원사 세계문학전집 전권을 권당 300원에 내놓은 거예요. 얼른 다 구입했지요.
진짜 희귀본은 따로 있다?
프레시안 : 윤성근 대표님은 그런 절판된 책들을 구해서 판매를 해야 하는 입장이신데, 매입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윤성근 :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정말 여러 방법이 있어요. 일단 '나까마(헌책 중간상)' 분들이 계시죠. <비브리아 고서당의 사건 수첩>이라는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정말 중절모 쓰고 전문적으로 책을 찾으러 다니는 분들이 있어요. 또 이런 방법도 있죠. 가령 <브이를 찾아서>를 구해야겠다 싶으면 그 책을 펴낸 당시 민음사 영업사원을 추적해서 연락하는 거예요. 사장이나 편집장에겐 없어도 영업사원에겐 그 책이 있는 경우가 정말 많거든요. 생각해 보면 책 찾는 것도 정말 탐정 같은 일이에요.
프레시안 : 많은 사람들이 구하고자 하는 희귀본에도 트렌드가 있나요? 옛날엔 이걸 많이 찾았는데 요즘은 저걸 많이 찾는다든가요.
윤성근 :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그런 변동은 별로 없어요. 가령 예나 지금이나 많이들 찾는 건 여러 버전의 동화 전집류, 금성 '칼라텔레비전 세계교육동화' 전집, 에이브 문고고요. 심지어 에이브 문고의 '짭퉁'이라고 알려진 에이스 문고까지 인기가 좋아요. 또 디즈니 그림으로 되어 있는 디즈니 동화집도 있고요. 장르 쪽에서는 120권쯤 되는 까만색 동서추리문고. 전집류는 짝 맞추는 재미가 있잖아요. 게다가 수집가로서 모으는 분들은 판수까지 똑같아야 해요. 1판 1쇄만 모은다든지, 그런 거죠.
프레시안 : 가끔 외국 책에서 중고책 시장에 대한 언급을 보면, 전문적인 책 사냥꾼들이 있더라고요. 일반 독자들이 모르는 그런 시장이 있나요?
윤성근 : 방금 말씀드린 유의 책들을 전문적으로 구하러 다니는 사람은 없고요. 1950년대 이전에 출간된 책들을 모으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고 계신 분들은 있지요. 물론 조선 말기에 나온 책처럼 완전히 범접할 수 없는 차원의 고서는 아니고요. 요즘은 책 한 종을 수천 권씩 찍어내지만, 과거에는 손으로 작업해서 소규모로 냈잖아요. 그래서 원체 숫자도 적으니 그 희소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죠. 예를 들어 서정주의 <화사집>이 그래요. 원래도 고가고, 그중에서도 처음에 나온 30권 정도가 지인들에게 줄 목적으로 장정을 다르게 했거든요. 비단으로 장정되어 있는데, 그걸 위해 서정주 부인이 가지고 있던 치마를 찢어 비단 천을 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어요. 백석이 자비를 들여 300부만 찍었다는 <사슴>도 한 권의 값어치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프레시안 : 그런 책을 사는 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윤성근 : 글쎄요. 그냥 책 좋아하는 거랑은 차원이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중에 그렇게 될지도 모르죠. (웃음)
올디스 벗 구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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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치-22>(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유진 : 사실 <캐치-22>의 출간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있기에 가능했지, 전집 소속이 아닌 낱권으로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건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김성곤 옮김, 민음사 펴냄)도 마찬가지고요. 이른바 세계문학의 경우 컬렉션을 갖춘 문학동네나 민음사 같은 출판사가 있으니까 다시 나올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그 밖의 책들은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죠.
윤성근 : 이런 경우도 있어요. 사드의 <소돔의 120일>은 몇 개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다가 절판되곤 했는데 최근에 동서문화사에서 재출간되어서 현재 서점에서 팔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전에 나온 버전들의 값이 여전히 잘 안 떨어져요.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예전엔 정말 비쌌거든요. 한 권에 10만 원 이상을 호가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 중에서도 고도판이 비쌌어요. 일단 한 권으로 되어있고 손에 잡히는 작은 사이즈였기도 하지만, 그런 쪽에 관심이 깊은 분이 번역했는지 번역이 되게 세거든요. (일동 웃음) 안 그래도 그렇고 그런 내용인데,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웃음)
최원호 : 새로 찍어낸다는 소식이 나오면 반가워하는 반응이 많지만 한편으론 절판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동요하죠. (웃음) 더 늦기 전에 비싸게 팔고 싶다는 일말의 기대를 갖는 분도 있고요. 그런데 보통 번역자가 바뀌잖아요. 새 번역이 구판 번역보다 안 좋은 경우가 30~50퍼센트는 있는 것 같아요. 혹은 번역자가 같아도 표지가 더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구판이 여전히 가치를 유지하기도 하고요.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가 지금도 정가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죠.
유진 : 저는 <솔라리스>(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오멜라스 판보다 옛날 시공사 판 표지가 더 마음에 들어서, 두 개 다 갖고 있긴 하지만 구판을 포기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윤성근 :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도 그렇죠. 열린책들의 홍지웅 사장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해서 그런지 그동안 야심차게 몇 가지의 판본을 냈어요. 그런데 헌책방에선 2판의 인기가 월등히 좋아요. 빨간 색에 뭉크 그림이 그려진 열여덟 권짜리인데, 장정도 좋고 맨 마지막에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사전'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이후에 3판, 4판도 나오고 보급판에 200질 한정판까지 나왔지만 2판만큼 인기가 없었어요.
이 한정판은 한정판임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떨어졌던 재미있는 사례입니다. 일단 만듦새에 좀 문제가 있었어요. 좋은 종이를 썼는데 책이 두껍다보니 쪼개지는 경우도 있어서 반품 사태가 일어났죠. 그리고 200질 한정판인데 그것보다 많이 찍었어요. 200질 한정판인데 속표지에 '200질 한정판 중 207번'이 찍혀 있는 게 있는 거예요. (일동 웃음) 출판사에서 열 질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나중에 깨닫고 부랴부랴 열 질을 더 찍어서 풀었나 봐요. 반품 요구한 분들한테는 일괄적으로 받아서 새로운 책으로 줬다는데, 그러면 이미 '한정'의 의미가 아니잖아요. (웃음)
프레시안 : 만듦새 하니까 추가로 궁금해지는 게 있어요. 가끔 헌책방에서 옛날에 나온 세계명작 시리즈를 보면 시간이 상당히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종이에 황화 현상이 없고 깨끗하더라고요. 기술이 발달하니 책 만듦새도 더 좋아질 수밖에 없을 텐데, 왜 오히려 최근 책의 황화 현상이 더 빠른 듯한 느낌이 들까요?
유진 : 저도 들은 얘기인데요. 옛날 종이엔 돌가루를 많이 썼고 요즘엔 펄프를 많이 쓴대요. 펄프를 쓰면 벌레가 많이 먹는 대신 책이 가벼워진다고 하더라고요. 과거엔 소장을 염두에 둔 묵직한 책을 선호했다면, 요즘엔 들고 다닐 수 있는 걸 선호하니까요.
열성 독자와 출판, 그 복잡한 관계
프레시안 : 다들 그러시겠지만 저 역시 집에 있는 책들이 처치 곤란 수준임에도, 실제로 읽는 속도는 아득히 느림에도 책을 닥치는 대로 사게 됩니다. 나오고 3년쯤 지나면 절판되어 있는 안타까운 경험이 워낙 많아서요. 그만큼 책의 생명력이 짧다는 얘기인데요. '더 찍어봤자 안 팔리니까'라는 자명하고도 슬픈 이유야 알고 있지만, 각자 종사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어요.
최원호 : 저는 활동은 안했지만 오랫동안 SF 팬덤 쪽을 지켜봤거든요. 거기에 국한해서 말씀드리자면, 사실 화제가 되는 책들은 이미 절판된 책들이에요. 구할 수 없는 책들이기에 화제가 된다고 할까요? 물론 신간이 나오면 다 사긴 사죠. 그런데 그분들을 다 합쳐도 시장으로 보면 턱없이 작은 규모고, 팬덤 바깥으로 나가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거죠.
책 파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그 전엔 몰랐던 팬덤의 규모가 보이더군요. 우리나라 SF의 방어선, 그러니까 SF 책이 나오면 거의 무조건 구입해주고 시장에서 최저 이익을 보장해주는 방어선이 정말 얇아요. 갈수록 얇아지고 있고요. 상업 출판사로서는 이것만 믿고 책을 낼 수는 없는 거겠죠. 기획자 분들도 한 출판사에 오래 있지 못하니 몇 곳을 옮겨 다니면서 작업할 수밖에 없고요.
이걸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가, 갈수록 심화되는 숙제예요. 일단 팬덤 풀에 새로운 독자들이 유입되어야 하는데 독서량의 저하와 맞물려서 유입률도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한창 취향을 형성해 가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젊은 독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거든요. 요즘은 비교적 접하기 쉬운 일본 미스터리 쪽에 많이 가 있다고 합니다.
출판사에 따라서는 북 펀드를 타개책으로 삼기도 해요. 보통은 책의 출간 계획을 밝히고 거기에 대한 투자를 받는 건데 어느 출판사에서는 '우리가 망하지 않게 해달라'라는 펀드를 내걸기도 했어요. 그다지 건강한 경우는 아니었죠.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말 없었던 건 그곳이 문을 닫으면 큰일 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어요. 때로는 프로젝트가 엎어지고, 때로는 이익금 환급이 늦어져도 대부분이 아무 말 않고 기다려요. 워낙에 인고의 세월을 보내왔기 때문에, '여기는 원래 고난의 땅이다'라는 의식이 확고하죠. (웃음)
어쨌든 소수의 팬덤은 강하지만 시장은 그 사람들을 위해 움직일 수 없지요. 그래서 아까 <3001 : 최후의 오디세이> 이야기도 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시장 바깥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요. 텀블벅 같은 소셜 펀딩 있잖아요. 주류 상업출판 시장이 아닌 또 하나의 시장, 복수의 시장을 만드는 거죠. 저작권 문제도 있지만 옛날 책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재고 부담 때문에 절대 종이책으로는 낼 수 없는 것을 전자책으로 소화하는 경우도 있어요. 페가나북스에서 로드 던세이니 작품을 전자책으로 냈는데, 그런 건 아무리 해도 천 부 이상 못 팔거든요. 그래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지요.
프레시안 : 유진 편집장님은 책 마니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편집자로서 예상 반응을 따져봐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잖아요. 두 가지가 충돌하는 경우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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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의 계절>(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한편으로는 많은 분들이 재출간을 외쳐서 내긴 했는데 이상하게 관심이 식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가령 <비밀의 계절>(도나 타트 지음)은 까치판이 절판되고 난 뒤 정말 많은 분들이 열심히 찾았는데, 문학동네에서 다시 나오니 나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어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페터 회 지음, 구판 까치, 신판 마음산책)도 마찬가지고요. 좋아할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갖고 있었던 거죠. 거기다 '후훗, 나는 이미 갖고 있지. 내 것이 더 귀해!' 같은 프라이드까지 있으면, 마니아도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일동 웃음) 부끄러운 얘기지만요.
최원회 : 절판과 재출간에 얽힌 비슷한 이야기가 인문서 쪽에도 좀 있어요. 번역 취향을 강하게 타는 분야이니까요. ㄷ 출판사가 유명하지요. (웃음) 번역이 좋지 않은데 판권이 그쪽에 묶여 있으니까 다른 데서 내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같은 책의 구판을 찾는 분들이 훨씬 많아요. 출판사에서 작업을 다 해놓고도 낼 엄두를 못 내는 경우도 있어요. 레이먼드 카버 전집, 커트 보네거트 단편집 작업이 그래요. 개인적으로 출판사에 '어떻게 좀 안 되겠냐'라고 물어봤는데 최소 판매부수를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2000명을 못 넘기는 거죠.
잉여와 허세의 선순환, 가능할까?
프레시안 : 독서 생태계가 전체적으로 침체된 상황, 헌책방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가요?
윤성근 : 구체적인 통계를 들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독서 인구가 점점 줄고 있는 건 사실이죠. 피부로 느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출판사나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헌책을 온라인에선 팔지 않고 오프라인으로만 파는데, 그러다보니 책에 대한 의지가 있는 손님들을 직접 만나게 돼요. 이야기를 나눠 보면… 다들 일을 너무 많이 하더라고요. '딴짓 할 시간'이 없는 게 문제 같아요. 일을 줄여야 여유가 있고 그래야 다른 생각도 좀 하고 '덕질'도 하고 '잉여질'도 하는 건데 그게 없잖아요. 그러니 SF나 장르문학, 좀 이상한 책을 탐독할 토양이 확 줄어버리는 거죠. 대신에 유명한 책, 안 읽으면 트렌드에서 도태되는 책, 생활에 바로 도움을 줄 것 같은 실용서에만 쏠림 현상이 일어나잖아요.
저도 예전에 10년쯤 회사 생활을 했는데요. 하루 중에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 딱 네 시간이에요. 졸거나 웹 서핑하고, 그러잖아요. (일동 동의) 지금은 요원한 바람이지만 하루 네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뭐가 됐든 자기 생활을 하면 독서 문화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유진 : 독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책 자체에 관심이 사라진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선택할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대요. 그래서 광고를 많이 하는 유명 작가 책만 사게 된다고요.
윤성근 : 시간이 남아돌면 책 읽지 말라고 해도 읽거든요. 제가 중학교 때 그러기도 했지만, 독자가 되어감에 있어 허세가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해요. 가령 요즘 이는 고전문학 붐도 <레 미제라블>이나 <안나 카레니나>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그걸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여한 부분도 있잖아요. 어쨌든 그게 물꼬를 틔울 수 있는 거지요.
프레시안 : 저희 집에선 저 빼고 아무도 책을 안 읽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영심 때문에 서재에 한자가 가득한 세로쓰기 세계문학 전집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그게 어린 저한테는 뜻도 몰랐지만 독서 욕구를 자극하는 역할을 했거든요. 그래서 최근의 문학전집 붐을 보면서 지금은 몰라도 10년쯤 뒤에 어떤 토양이 되어있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습니다. 사는 분들의 자식들이 읽는 걸 생각해 볼 수 있겠죠.
▲ 알라딘 MD 최원호. ⓒ프레시안(손문상) |
최원호 : 고전문학전집이 홈쇼핑에서 많이 팔리거든요. 만약 그걸 정가로 팔았으면 큰 반응은 없었을 거예요. 권당으로 계산해 보니 싸다, 한 방에 장만하고 싶다, 나중에 회사 그만두고 할 일 없을 때 본인이 읽든 아이들이 읽든 누가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놓자, 이런 생각으로 사두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자식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도박에 가까운 거죠. 저희 아버지도 제가 크면 읽으라고 사둔 게 있었는데 세로쓰기 판 <대망>(야마오카 소하치 지음)이었어요. (일동 웃음) 나중에 보는데 세로쓰기라 눈에도 안 들어오고 버리지도 못한 경험이 있는데요.
여하튼 사는 사람의 만족인 것 같아요. 그걸 평소보다 싸게 판다고 하니, 염가로 희망을 충족한다고 할까요? 당장 읽어나가겠다는 마음이 강하다기보다는 세계문학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거죠. 거꾸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교양이라는 것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다만 당장은 너무 여유가 없고, 그걸 자각하고는 있는데 해결할 방법은 뚜렷하지 않고, 그래서 소비의 형태로 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성근 : 진짜 멋진 허세는 대학교 4학년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도서관에 마이너한 책들을 신청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자기도 잘 이해 안 되지만 약간 너스레를 섞어서 '이거 꼭 필요한 책이야' 하면서 신청해 두면 늦어도 1,2학년 후배가 졸업할 때쯤엔 볼 수 있겠죠. 아까 이야기한 경우처럼 서고를 개방할 때 구입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어찌됐든 허세가 필요하네요. (웃음)
이 책, 출간 안 될까요?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각자의 '아까운 책'을 이야기해 주세요. 현재 절판 상태인데 다시 나왔으면 하는 책, 1~2년 사이에 나온 건데 주목을 덜 받아서 좀 알렸으면 하는 책, 번역되었으면 하는 외서나 작가, 어느 것이라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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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비>(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포레 펴냄). ⓒ포레 |
그리고 늘 이야기하는 책은 SF소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월터 M. 밀러 지음, 박태섭 옮김, 시공사 펴냄)입니다. 지금은 절판 상태인데 번역에 대한 불만들이 꽤 많았어요. 내가 번역하면 훨씬 좋아질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불만을 토로했던 다른 번역자도 계셨고요. 어쨌든 오래전부터 재출간을 바랐고, 그래서 장르문학 출판사에 요청도 많이 했는데요. 아직 긍정적인 소식은 없네요. 참고로 두 권짜리인 이 책의 절판본은 여전히 권당 4만 원을 호가하더라고요.
최근 책들 가운데 아까운 책은, 너무 많아서 슬픔의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달 'MD가 추천하는 책' 이벤트에도 수많은 책들이 오르고 있어요. 눈여겨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번역이 됐으면 하는 외서는 주로 예술 책들, 특히 사진 책들입니다. 사진 책의 번역 출간이 어려운 건 도판 때문이에요. 책의 저작권과 별개로 각각의 도판 저작권을 따로 계약해야 하거든요. 일도 일이지만 돈도 몇 배가 드는 거지요. 이런 책들은 도저히 '견적이 안 나와서' 출간하기 힘든 건 알지만, 그래도 희망을 담아 하나를 고르자면 <시징 더 라이트(Seizing the Light)>(Robert Hirsch, McGraw-Hill Humanities/Social Sciences)예요. 이 책은 정말 좋아서 나중에 돈을 벌면 자비로라도 일을 벌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윤성근 : 전 일단 이반 일리치 책들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미토출판사라는 데서 전집으로 몇 권 나온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절판됐거든요. 지난번에 '프레시안 books'에 장석준 씨의 서평이 실려서 반가웠는데, 관심이 좀처럼 모아지지 않는 듯해요. (☞바로 가기 : 자동차를 탄 당신, 노예! 벗어나려면?)
사실 좀 이상해요. 요즘같이 대안교육에 열을 올리는 때가 없는데 이반 일리치에 이토록 냉담한 게 말이죠. 가만히 보면 한쪽 이론, 학자에만 확 쏠리고 나머지 한쪽은 죽어버리는 현상이 있는 것 같아요. 대안교육 분야에서 두 거목으로 여겨지는 이들이 파울루 프레이리와 일리치인데, 프레이리 책은 정말 많이 나오는데 일리치는 그렇지 못하죠. 아무래도 386 세대 운동권들의 취향이 반영되다보니 좀 더 투쟁적인 프레이리 쪽으로 쏠린 게 아닐까 해요.
열린책들의 '러시아 문학 시리즈'도 다시 나왔으면 좋겠고, 예전에 장석주 시인이 일했던 청하출판사에서 장 그르니에 전집을 열심히 냈던 것도 생각나네요. 많은 사람들이 장 그르니에를 민음사에서 나온 네 권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청하에서 스물 몇 권을 냈었거든요. 지금은 다 절판됐는데 민음사에서 작업 계획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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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야책방>(윤성근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
마지막으로 하일지 작가의 '경마장' 시리즈가 다시 나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영화 때문인지 <경마장 가는 길>만 살아있고 <경마장은 네거리에서> <경마장을 위하여> <경마장의 오리나무> <경마장에서 생긴 일> 등 다른 작품들은 다 절판된 상태예요. 그런데 정말 전체를 읽어봐야 경마장 시절의 느낌을 알 수 있겠더라고요. 전 국내 작가 중에서 하일지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마장 시절 박스 세트', 이렇게 나오면 괜찮지 않을까요? (웃음)
유진 : 재출간되길 바라는 작품은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곽한주 옮김, 한나래 펴냄)하고 <우디가 말하는 앨런>(스티그 비에르크만 지음, 이남 옮김, 한나래 펴냄)이 먼저 떠오르네요. 저는 도서관에서 읽었는데 구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정말 재미있는데.
또 1980년대 초반에 한길사에도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거기에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어둠속의 작업>이 있었어요. 이 작품은 같은 작가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전 2권, 곽광수 옮김, 민음사 펴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품인데, 아쉽게도 이것만 민음사에서 다시 나왔어요.
그리고 팀 오브라이언의 <뉴클리어 에이지>요. 90년대 초반에 문학사상사에서 <그래도 살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요. 하루키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이라 혹시 띠지에 하루키 이름 넣어서라도 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웃음) 안 되더라고요. 팀 오브라이언은 베트남전 참전이란 배경을 가진 작가라 미국에선 널리 읽히는데 한국에서는 어려운가 봐요.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숲속의 호수> 같은 작품도 다시 나오면 참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세계문학전집이든 꼭 넣어줬으면 하는 작품이 하나 있어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레 망다랭>이에요. 보부아르만 알고 있는 사르트르-카뮈 결별의 속사정을 각색해서 자신도 등장하는 소설로 쓴 겁니다. 예전에 어떤 전집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저도 읽게 됐는데,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사르트르는 세계문학전집에 꼬박꼬박 들어가는데 보부아르는 <제2의 성>으로만 알려져 있는 게 아쉽더라고요.
프레시안 : 와, 오늘 처음 들은 얘기도 많고 찾아보고 싶은 책도 많아졌네요. 몇 년 뒤 이 대화를 읽는 독자들이 '이건 지난주에 나왔잖아' 할 수도 있겠어요. 오늘 말한 아까운 책들이 모두 빛을 보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동 : 이제 시작인 것 같은데 끝이라니, 한 다섯 시간은 더 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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