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통일·외교·안보 분야 업무보고를 받고 2일 취임 이후 첫 외교안보장관회의를 주재한 박근혜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대 6자 외교에 대해 어떤 그림이 들어 있을까. 그 역시 북한에 "우리 국민에 대한 도발이 발생한다면 다른 정치적 고려를 일절 하지 않고 초전에 강력 대응할 것"이라는 발언을 내뱉었지만 이런 설전에서 향후 펼쳐질 박근혜 외교 로드맵을 적극적으로 읽어선 안 될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위협에도 청와대는 비교적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고, 얼마 전 윤곽이 드러난 새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를 살펴봐도 북의 자연사를 희망하고 예상했던 이명박 정부의 대북관에 비해서는 대화의 의지가 있어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은 북의 선 비핵화 없이는 남북협력도 없다는 MB의 '연계론'과 달리 북핵 문제와 경제 지원을 분리해 추진하겠다는 '병행론'적인 성격을 일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하여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인도적 지원과 낮은 단계의 경제 협력까지는 북핵 문제와 무관하게 가동될 예정이라 한다.
또한 노골적으로 한미동맹 의존적이었던 노선에서 벗어나 중국을 의식하는 듯한 제스처가 눈에 띈다는 점도 변화의 조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중대사 자리에 대통령의 최측근이 내정되고, 새 외교부 장관은 미·중·일·러 외교장관과의 통화에서 특히 중국과의 통화가 길었다고 자랑스레 얘기했다. 보수 정권이 민감하게 의식하는 <조선일보>에는 대통령의 첫 정상 외교 행선지로 워싱턴이 아닌 베이징을 택했어야 했다는 유력 주필의 칼럼이 실렸다. 한중관계를 보다 중시하라느니 '양다리 외교'를 하라는 언론의 압박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뜻 비치는 희망적 조짐은 대북 외교 파탄, 대중 외교 실패라는 지난 정권의 절망적인 성적표가 초래한 그들의 교정 효과 혹은 우리의 착시 현상일 지도 모른다. 신뢰 프로세스든 대화든 시작하려면 현재 고조된 긴장이 해소되어야 할 테고 그렇다면 북한이 날뛰는 계기인 한-미 독수리 연합훈련이 끝나야 이 거대 규모의 '떠보기'도 막을 내리겠지만, 바로 그 훈련이 상징하는 한·미의 노선이 끊긴 대화를 어떻게 이을지 모르는 상황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전 보장'의 혜택처럼 보이는 그런 행위가, 미국의 대(對) 중국 견제 시대에 어떤 청구서가 되어 돌아올지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이야 "한미동맹도 잘 지키고 한중관계도 업그레이드해라"라는 말이 무슨 덕담처럼 들리겠지만, 두 강국의 사정에 따라 우리는 차악을 고르다 결국 미국의 요구에 응하게 되리라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인 전망이다.
실재하는 핵의 위협, 정권의 지지 기반이 떠받드는 한미동맹과 실리적 측면에서 강조되고 있는 대 중국 외교 사이에서의 줄타기, 대화는 사라지고 대결만 남은 남북관계, 영토 분쟁과 헌법 개정이라는 뇌관을 안고 보수화하는 일본, 거기에 러시아까지 포함한 6자 회담의 중단 상태를 각각 어느 위치에 두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은 따로 언급했지만 사실상 같은 장에 놓여야 하며, 마치 시소처럼 어느 한쪽에 힘을 기울이면 다른 쪽은 들릴 수밖에 없는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들이다. 거기다 국내적으로 이 문제들은 어떤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좌나 우, 빨갱이나 보수 꼴통으로 나뉘어 공격을 일으킬 수 있는 강력한 지표로 기능하기까지 한다.
▲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한승동 지음,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
저자가 '이명박 시대'에 다양한 지면에 쓴 글들을 다듬어 엮어 낸 이 책에는 4대강 사업이나 친일파 후손 세력에 대한 비판, 독도 등 동아시아 영토 문제, 공권력과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 등 많은 주제가 망라되어 있다. 여러 글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바로 분단 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어떻게 하면 전쟁을 반복하지 않고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주변국들과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며, 거기에 있어 남북관계의 회복, 궁극적으로는 '낮은 단계의 연방'의 추구라는 변수를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답을 내보이고 있다.
사실 이 책엔 그런 '주장'이 표면화되어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정서'로서 드러나고 있다. 처음부터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써내려간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정서를 어떤 크기로 읽는가는 독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 정서는, "미국에 의존하는 기형적 동맹에서 벗어"나 중국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진짜 외교'를 할 수 있으려면 "시작은 남북관계"라 말한 문정인 교수의 주장이나(☞바로 가기) 한반도의 모순과 실천적인 타개책을 설명해내는 백낙청의 분단 체제론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정서를 감지했을 때 일부는 '퍼주기', '한미동맹 파탄', 나아가 '종북'이라는 딱지를 거의 자동적으로 갖다 붙이고, 일부는 과거 대학가를 배회한 반미 민족주의의 냄새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독자 공중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한겨레>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오면서 많은 공격에 노출되어 왔을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여러 번 경고하는 위험한 '생각의 틀'이기도 하다.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고 전략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자는 목소리는 앞서 말했듯 이제 보수 언론에서도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남북관계라는 항이 들어오면 이성의 끈은 사정없이 풀려 버린다. "남북관계의 우선적 회복을 통해" 혹은 "남북관계를 잘 풀어야 그 뒤도 잘 할 수 있다" 등의 이야기는 검토를 거치기 전에 바로 네 편 내 편의 문제로 귀속된다. 이 점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두 번째 정서다. 이는 아마 저자의 정체성과 관련된 투쟁이기도 할 것이며, 외교 문제와 연계된 국내 정치에서 정치인들이 특히 유념해 주기를 바라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음의 인용구처럼 반도의 정치는 많은 부분 그런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그 펄펄 살아 있는 상흔을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그야말로 7000만 남북 겨레가 하루아침에 미친 듯이 입에 거품을 물고 50여 년 전의 악몽을 현실에서 재연한다. 그 증오와 원한 앞에 멀쩡한 이성, 점잖은 합리란 존재할 수 없다. (…) 누가 상흔의 스위치를 터치하는 순간 각자 제 죽은 부모형제 수백만만 생각하고 길길이 날뛰며, 눈에 퍼런 불을 켜고 이를 갈고 입에 흰 거품을 물며 동족을 증오하도록 우리는 프로그래밍돼 있는 것 같다. (…) 정치라는 게 뭔가. 그 원한에 찬 얘기를 들어주고 상처를 쓰다듬으며 민족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95쪽)
책에서 발견한 세 번째 주요한 정서는 점점 더 보수화되고 있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우려다. 이는 한미일 삼각 동맹의 일원, 아니 미일동맹의 부산물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턱 밑까지 제시된 어느 예시에 대한 질문과 성찰의 요구이기도 하다.
2009년 일본의 정권 교체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정권의 기획은 탈 미국, 아시아 중시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규정해 온 자민당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고자 한 야심찬 그림이었다. 그 노선을 상징하는 것은 하토야마가 중국을 중시한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추진한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 이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미국 매파의 분노를 자극했고, 일본 내 관료들과 주류 언론의 비판에 직면했다. 그리고 2010년 봄 천안함이 침몰하면서 기획에 종지부를 찍었다. 너무 이른 실패 이후 "실패한 민주당은 자민당화하면서 퇴화했고, 이제 자력으로가 아니라 민주당 실패에 편승해서 자민당 잔류 본당들이 다시 권력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212쪽)
2006년 1차 내각에서 실패한 아베 신조 정권은 선택을 분명히 했다. 대내적으로는 공격적인 '아베노믹스'로 지지율을 높였고, 대외적으로는 미일동맹과 군사력 강화, 특히 중국과의 영토 문제에 대한 강경한 대처를 보여 하토야마의 실험을 한낱 '돌출'로 만들어 버린 형국이다. 이는 저자가 관련 글을 쓴 시점에서 우려한 "'대일본제국' 체제의 부활"이나 '다시 과거의 영광으로!' 같은 극우적 정체성의 강화까지는 아니다. 그들이 평화헌법을 버리고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승격시킨 '보통 국가'로 거듭날 가능성은 낮다.
여기서 내게는 수많은 당이 등장했으나 도저히 찍을 곳이 없어 자민당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지난해 말 중의원 선거가 겹쳐 보인다. 표가 향한 자민당도, 자민당이 표방하는 미일동맹의 강화라는 선택도 뭔가 '어쩔 수 없음'으로 회귀했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칼이 제 칼집을 찾아가듯이 그들의 원래 방식대로 현대 일본을 규정짓는 틀 안에 다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동아시아 국제정치 지형에서 일본은 미국의 기지이자 이익 대행자로 기능해 왔고, 한국은 미일동맹 중심의 동아시아 전략 상 "보조 축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서 미국의 눈이 향하는 곳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며, 적이라 지목되는 것은 북한이다. 하토야마의 실험을 통해 <트루먼 쇼>의 세트장 같은 거대한 벽이 다시금 확인되었다면, 그것을 넘는 대신 '거래의 장소'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게 현재 일본의 선택인 셈이다.
저자의 물음은 그리하여 "대한민국 자국의 이익 혹은 국가 정체성"을 강조하는 여타의 대 일본 강경 어조와는 결을 달리한다. 오히려 미국의 주된 교환이 이루어지는 미일동맹의 '부속'으로서의 쓸쓸한 처지를 바라보게 해 준다. 그 위치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한국이 가진 유일한 카드인 북한이, 한국을 그 종속 관계에 매어 두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우리는 커다란 수가 등장하는 방정식의 괄호 안에 있는 셈이다. 그것은 정해진 위치를 넘어 설 수는 없는 기획의 일부라는 의미이지만, 반대로 괄호는 가장 먼저 풀고 나가라는 뜻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이 책에 흐르는 위와 같은 정서는 역사적·지정학적으로 여전히 '반도 이남'을 살아가며 긴장과 마주하는 우리에게 유효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이런 감수성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물론 많은 책과 영화, 자신의 경험 등 다양한 장소에서 출발해 사유를 엮어나간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입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곳에서 뻗어져 나온 실들이 각자 정해진 역할을 가지고 비슷한 패턴으로 조직된다는 점에서 약간 도식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과거의 '소중화' 의식이 현재의 친미 이데올로기와 유사하다는 문제의식 아래 광해군 외교에 대한 높은 평가와 인조반정에 대한 비판이 자주 거론되는데, 그를 둘러싼 울퉁불퉁한 해석의 장을 건너뛰고 '광해군 외교=이상적'이라는 항등식 안에 가둬 둔 건 아닌가 싶었다. 동시에 우상 파괴를 외쳤던 리영희 선생이 지금의 맥락 속에서는 스스로가 하나의 우상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보수 언론과 친일파 후손이 그 복잡한 욕망의 결에도 불구하고 성격적으로 너무 단순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악이든 적이든 그것이 잉태된 과정을 살피고 캐릭터를 세심하게 부여하는 정서도 있었다면 하는, 그런 작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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