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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방사능의 계절! 한국은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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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방사능의 계절! 한국은 자유로운가?

[프레시안 books] 엠마뉘엘 르파주의 <체르노빌의 봄>

"내 눈앞에서 정장을 입은 그를 비닐 주머니에 넣고 묶었다. 그 주머니를 나무 관속에 넣었다. 관을 또 다른 자루에 넣었다. 비닐은 투명했지만 풀 먹인 천같이 두꺼웠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아연으로 만든 관 안에 겨우 집어넣었다."

몇 번이고 책장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페이지를 다시 들추기도 했다. '체르노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때론 무채색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도 느껴졌다. 시꺼먼 그림 속을 헤매는 죽음의 공기가 페이지를 뛰쳐나와 나를 덮칠 것 같았다.

1986년 4월 29일, 평화로운 봄날의 토요일 하루를 뭉개버린 그날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작가는 체르노빌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러저러한 고민과 함께 그림 도구를 챙겨들고 동료들과 죽음의 땅으로 걸어 들어가는 작가의 망설임과 먹먹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페이지를, 나도 함께 헤매었다.

기억은 기록보다 쉽게 잊힌다. 기록을 하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다. 삶과 사건은 기록을 통해 역사가 된다. 그때를 기록하고 기억함은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희생된 이들에 대한 감사이자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어쩌면 인간의 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될 미래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이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묵직한 질문이다. 행동하는 작가들은 사신의 칼날이 덮친 공간을 찾았고 기록했다. 그리고 <체르노빌의 봄>(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이미지프레임 펴냄)은 그림이라는 장르가 주는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

"로봇이 견뎌내지 못하고 기술이 미쳐가는 곳에서 우리는 일했다."

▲ <체르노빌의 봄>(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이미지프레임 펴냄). ⓒ이미지프레임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정식 명칭은 '레닌 공산주의 혁명 기념 핵발전소'다. 위대한 사회주의 조국의 과학기술은 바벨탑처럼 붕괴되었다. 4호기의 지붕이 날아가고, 감춰져 있던 원자로는 맨 얼굴을 드러냈다. 플루토늄은 지옥의 신 '플루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지옥의 신은 '체르노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원자로를 감싸고 있던 흑연이 조각난 돌덩이가 되어 흩어졌다. 덩어리 하나가 모두 수분 내에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의 방사능 덩어리였다. 3호기 지붕 위에 떨어진 흑연 덩어리를 치우기 위해 로봇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봇의 계기판은 미쳐 날뛰었고, 곧 터져버렸다. 그리고 구소련의 어린 병사들이 투입되었다. 그들에게는 '백 루블'의 돈과 '영웅' 칭호가 주어졌다. 사고가 일어났던 그날에도 발전소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온 건 소방관들이었고, 그들은 훗날 모두 사망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청소'를 위해 체르노빌로 보내졌다. 헬기 조종사는 물론 인근 마을의 농부들도 투입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오만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들은 분노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지금도 후쿠시마에서는 매일매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청소'를 하고 있다. 더럽고 오염된 노동은 '하청업체'의 노동자의 몫이다. 치울 곳조차 마땅치 않은 쓰레기를 정리하고 발전소를 수습하는 일을 위해 투입된 사람들이다.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방사능 오염수가 바다로 버려지고 있으며, 이제 겨우 패널을 씌운 것에 불과한 후쿠시마는 오늘도 지구에 죽음을 배출하고 있다. 과거 구소련의 어린 병사와 소방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쿠시마에도 가난한 비정규직들이 그곳에 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방사능 노출 빈도가 높은 것은 전 세계 핵발전소의 공통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름을 대문에 새겨넣었다. 아니면 울타리나 길가에…."

발전소가 터졌을 때 정부는 마을 주민들에게 어떤 경보나 주의도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서야 1000대가 넘는 버스가 마을에 도착했고, 그들은 서둘러 떠나야 했다. 옷가지 하나 그릇 하나 마음대로 가져갈 수도 없었고, 발전소에서 일했던 남편을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곧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삶은 통째로 뜯겨나갔다. 여전히 체르노빌은 '통제' 구역이다. 인간이 떠난 자리에선 폐허가 된 마을과 무성한 수목이 주인이 되었다.

떠난 이들 중 일부는 돌아왔다. 작가는 폐허가 된 마을과 숲을 거닐고 사람들을 만났다. 여전히 통제 구역이며 사람이 거주해서는 안 되는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사고 당시 강제로 그곳을 떠나야 했던 사람도, '처리반'으로 참여했던 사람도, 아이였던 청년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버려진 마을에서 가난과 질병과 소외와 외로움과 이웃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깨끗한 감자 바로 몇 미터 앞에 '오염된' 감자가 있을 수도 있는 공간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20분입니다. 문 닫으세요!" 틱 틱…. 마치 수만 개의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듯 했다.

체르노빌 인근 마을 프리프야트 시내를 거닐며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재촉하는 것은 방사능 계측기의 소리였다. 평화롭고 고요한 숲의 그림은 싱그러운 초목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았다. 하지만 그건 싱그러운 봄이 주는 경쾌함이 아닌 공포, 압도적 두려움에 가까웠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못한 곳, 생명이 뒤틀려 당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곳. 끊임없이 틱틱거리는 방사능 계측기의 소리가 담긴 책장 사이사이는 생명이 어그러진 공간의 죽음을 재촉하는 초침 같았다.

지금도 체르노빌은 여전히 죽음의 땅이다. 후쿠시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에 제염을 포기해버린 땅이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넘는다. 최근에도 정전으로 인해 사용 후 핵연료 저장 수조의 온도가 상승하는 아찔한 뉴스가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래 이 사고를 수습해야 할까. 아니 수습할 수 있을까. 체르노빌의 석관은 26년이 지난 지금 빠른 부식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나버렸다. 새로 씌울 계획인 강철 돔은 유럽 재정위기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이 사고로 우크라이나 영토의 5퍼센트, 벨라루스의 25퍼센트가 오염됐다. 아직도 그곳에서는 피난을 거부한 수백만의 사람들이 오염된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방사능은 전 유럽을 덮쳤고, 유럽에 반핵운동과 녹색당 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정작 체르노빌 발전소를 소유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핵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체르노빌의 방사능 물질 대부분이 덮쳤던 벨라루스는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가지고 있다. 후쿠시마라는 재앙을 가진 일본은 아직도 '탈핵 선언'을 뭉그적거리고 있다. 전 세계 핵 마피아들의 새로운 엘도라도는 중국이다.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수도권에서 1200킬로미터 떨어진 핵 참사에도 한국은 새로운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졸저 <체르노빌 후쿠시마 한국>(아카이브 펴냄)을 쓰면서 내내 고통스러웠다. 인간이 가서는 안 되는 공간으로 달려간 갓 스무 살의 병사들, 후쿠시마의 비정규직, 남겨진 아이들, 어떤 주의 경보도 이뤄지지 않았던 삶의 터전, 목을 매어 자살한 낙농업자, 평화로운 어촌마을에 '전기 공장'이 들어선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주해야 했던 기장군의 어민들, 찬핵과 반핵으로 갈려 반목하는 사람들. 핵이라는 이름으로 위대한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통 그 자체였다.

노란 민들레가 흩날리고, 사람들이 춤을 추는 <체르노빌의 봄>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조금 복잡해졌다. 흑백으로 시작하여 채색으로 끝나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가장 이질적인 것은 장갑과 마스크를 쓴 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었다. 작가는 검은 파스텔과 어두운 잉크 목탄을 준비했지만 찬란한 색상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했다. 숲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악어의 이빨 속에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던 작가는 푸른 잔디와 호수와 숲을, 그리고 사람들의 노래를 그리며 말한다. "나를 감동시킨 건 바로 삶이었다."

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시린 겨울을 딛고, 새순이 돋아나며 꽃이 피는 멋진 계절이다. <체르노빌의 봄>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단지 생명이 자라고 푸른 싱그러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삶'이 여전히 그곳에 있어서 그렇다. 생명과 죽음이 뒤엉켜 결계를 이룬, 일그러진 인간의 바벨탑은 여전히 그곳에 건재하다. 그래서 체르노빌의 봄은 처연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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