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모처럼 속 시원한 책 한권을 찾았다. 조너선 라이언스의 <지혜의 집-이슬람은 어떻게 유럽 문명을 바꾸었는가>(김한영 옮김, 책과함께 펴냄)(이하 '지혜의 집'으로 표기)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다. 언론인 칼럼니스트로 독자들 눈높이에 맞춰 아랍과 이슬람 문명이 유럽 근대화를 일깨우는 방대한 과정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무엇보다 풍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 <지혜의 집 : 이슬람은 어떻게 유럽 문명을 바꾸었는가>(조너선 라이언스 지음, 김한영 옮김, 책과함께 펴냄). ⓒ책과함께 |
9세기 바그다드에 설립된 중세 최고의 아카데미였던 '지혜의 집'은 서양역사가 스스로 닫아버린 암흑의 시기에도 인류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의 빛이 비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인류의 자산이다. 왜냐면 그곳에서 지금 인류가 누리는 과학과 철학, 문화와 사고의 기본 틀이 상당부분 형성되고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지혜의 집'이 이룩했던 고전의 취합과 번역, 창의적인 학문 전통, 체계적인 지식전수 과정은 당시 서양에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놀라운 수준에 있었다.
이슬람 제국 주권자인 칼리프나 재력가 등 지식의 후원자들은 필요한 책을 구입하거나 필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학자들을 지원했으며,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커스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스탄불로 달려갔다. 지금으로서도 쉽게 할 수 없는 경탄스러운 세계지식여행이었다. 이슬람제국인 압바스 왕조는 지식인을 극진히 대우했으며, 학자는 존경받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계층과 신분, 출신지역에 상관없이 오로지 학문과 과학적 성취로만 사람을 평가하였다. 선대의 학문적 업적을 낡은 것이라 버리지 않았으며,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철학을 이교도의 것이라 하여 폄훼하지 않았다. 인도의 대수학, 중국의 과학 등 당대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총망라하였고 이를 종합하여 새로운 창조의 단단한 터전을 닦아주던 곳이 '지혜의 집'이었다.
그럼 중세 서양과 이슬람 세계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생기고 학문적 명운을 갈랐던 인식론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학문전통을 이해하는 사고방식과 학문적 재해석을 통해 세속적인 지식을 수용하는 태도의 차이였다.
예를 들면 600년 이상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적인 가르침으로 대표되는 서양 기독교 세계는 플라톤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특히 3세기 이후 알렉산드리아, 로마, 아테네 등지의 아카데미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 철학과 사상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합리적인 사상들은 기독교 교의라는 프리즘을 거치면서 거룩한 천국과 지상의 비천한 삶 사이에는 무엇으로도 연결할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견고한 독단으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인간이란 이성적 판단과 과학적 활동으로 도출된 경험을 통해서는 우주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절대한계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신학과 과학이 갖는 상호 모순된 문제점을 두고 회피하거나 억누르려는 태도 대신 치열한 논쟁의 과정을 거쳤으며, 몇몇 뛰어난 칼리프의 놀라운 지원을 통해 종교적 해석에 이성과 과학이라는 선물을 허용했다. 신성과 세속사이의 관계 정립을 위한 오랜 고뇌 끝에 양자의 유용성과 상호 합치라는 확신을 얻었고, 결국 "과학연구는 종교적 의무"라는 놀라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확고한 신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칼리프 알 마문(813~833 통치)의 역할을 놓칠 수 없다. 중세 이슬람 역사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통치자의 한 사람이었던 알 마문은 과학적 탐구에 종교적 사명이라는 신성한 보호막을 씌움으로써, 과학을 이단적이고 세속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하부구조로 인식하는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이로써 중세는 이슬람 과학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이슬람세계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인간이 만든 합리적 추론과 이성적 판단, 축적된 경험적 관찰 등이 과학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신이 창조한 자연현상과 우주를 연구하는 것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오묘한 섭리를 이해하기 위한 무슬림들의 고귀한 의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의 이상적인 조합이라는 인류역사의 새 장을 이슬람세계가 열어주었다.
일상이나 여행 중에 하루 다섯 번씩 예배를 드려야 되는 종교적 의무는 메카 방향(끼블라)의 정확한 측정을 필요로 했고, 지리학과 천문학, 기하학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무엇보다 초승달에서 시작하여 다음 달 초승달까지 라마단(단식) 기간을 정확하게 산정하기 위해 천문학과 역법과 천체학이, 무함마드의 여정이나 언행록을 가록하기 위해 서지학과 역사학이 중시되었다. 모든 학문은 종교적 신앙과 실과 바늘의 관계를 맺으면서 무한의 진보를 거듭했다.
이를 위해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사상이 재해석되고 인도와 중국은 물론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정보가 총망라되었다. 이러한 지식의 D/B 작업과 체계화 결과 2세기 동안에 300만권이 넘는 다양한 지식들이 새로 개발된 중국 종이에 필사되었다. 이런 자료 중에 신라를 기록한 필사본이 수십 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놀랍기 보다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쉬운 필체와 더불어 꼼꼼한 자료정리와 세세한 주석까지 달아준 저자의 친절함 때문에 이 책은 더욱 돋보인다. 서술 구성에서 서문 제목을 아랍인들의 하루의 시작인 '알마그립, 일몰기도'로 출발하는 것도 아랍세계가 갖는 우주관의 이해와 밤하늘을 통해 천문지식을 체득했던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점에서 참신하다. 매끄러운 번역과 함께 서양 중심의 역사에서 새로운 인류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21세기 표피적인 테러현상으로서의 이슬람 세계가 아닌 문명으로서 이슬람의 인문학적 깊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지혜의 집>은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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