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해피 패밀리> 줄거리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학생이었지만 인류학과에 진학한 후 아버지의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한민형(1980년생)은 술로 세월을 보낸다.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 진규(1950년생)는 야심 없는 아들을 보며 허허로움을 느끼고, 일찍 세상을 떠난 딸 민희(1977년생)를 그리워한다. 진규의 처 민경화(1953년생), 민형의 부인인 서현주(1977년생)와 동생인 민주(1983년생), 어려서 입양된 영미(1983년생), 민형을 보좌하여 출판업계에서 성장하고자 꿈꾸는 학교 후배 이정석(1982년생), 현주의 어머니이며 민형의 장모인 강희숙(1951년생)등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로 그간의 삶을 반추하는 가운데, 그들이 바라지만 가지지 못하는 행복과 묻어버릴 수 없는 아픈 기억이 고개를 든다. |
1.
<해피 패밀리>(문학동네 펴냄)는 소설가 고종석의 마지막 책이다. 여기서 '소설가 고종석'이라는 표현은 어떤 이중적 의미나 반어법, 혹은 그의 절필을 애써 무시하기 위한 제스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1993년 첫 소설 <기자들>(민음사 펴냄)을 펴낸 후로 고종석은, 많지는 않을지언정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왔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을 모종의 일탈 정도로 치부하는 시각은 결코 옳지 않다. 젊은 시절 몇 편의 작품을 낸 후 강단에 숨어있으면서도 계속 소설가라는 직함을 유지하는 작가들과 비교해보자. 고종석의 꾸준한 창작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받을만한, 혹은 평가받았어야 할 일이다.
산문가 고종석의 탁월한 미문을 칭송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가 고종석을 에둘러 낮잡아 말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은 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아, 그 사람은 참 훌륭한 에세이스트지. 그런데 소설은 그에 못 미치는 것 같더라고. 고종석 소설을 보면 말야, 그 사람이 신문 칼럼에서 했던 얘기들을 등장인물들이 술 마시고 막 떠들어. 그리고 집에 가. 집에서도 고종석 칼럼처럼 혼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마지막엔 누이를 그리워하더라고.
고종석의 소설을 그의 산문의 다른 판본쯤으로 여기는 시각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고종석의 소설을 읽기 위한 어떤 '표준 독법'으로 통용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개별적인 작품의 주인공 혹은 주요 화자의 의견을 저자의 것과 동일시하는 것, 그래서 끝내 그의 산문의 자장 내에서 소설을 읽어내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법은 그리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종의 착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종석의 산문 작업이 내뿜는 특유의 광채로 인해, 그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전자를 먼저 접한 후 후자를 집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고종석이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부 완성시켜놓은 후, 그것을 소설의 형태로 '다시' 만들어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야 모를 일이지만, 주요작의 연표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다. 고종석의 소설은 고종석의 산문과 함께, 한 문필가의 정신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별도의 산책로를 제공할 따름이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이 논의되었던 그 경로가 아닌 반대편의 길을 택해볼 수도 있다.
2.
▲ <해피 패밀리>(고종석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이 서평은 <해피 패밀리>에 대한 것이지만, 고종석의 소설 작업에 대해 쌓여있는 오해가 제법 두텁기 때문에 오직 그 작품에 한정하여 이야기를 진행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마지막 책이 될 <해피 패밀리>는 고종석의 소설들 중에서도 제법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써온 허구의 서사들을 검토하여 <해피 패밀리>까지 도달하고 나면, 우리는 산문 작가 고종석이 절필을 선언한 이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해보자. 첫 단행본이며 장편소설 <기자들>이 1993년 출간되었고, 이후 1997년 단편집 <제망매>(문학동네 펴냄)가 나왔다. 2003년 단편집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 펴냄)를 낸 후 고종석은 약 7년간 소설을 단행본의 형태로 출간하지 않았다. 새로운 장편소설을 발표한 것은 2010년의 일. <독고준>(새움 펴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후 2012년 대선기간 도중 <한겨레신문>의 칼럼을 통해 절필 선언을 한 후, 그 이전에 썼던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가 2013년 출간되어 오늘에 이른다.
연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1993년 이후 비교적 주기적으로 책을 내던 그는, 2003년에서 2010년 사이에 짧지 않은 공백기를 갖는다. 그 기간이 태평성대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막 그 시절을 지나쳐온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 공백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자들>, 그리고 <제망매>와 <엘리아의 제야>에 수록된 소설들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고종석 소설'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화자는 지식인(중에서도 남성)이며, 저자 본인과 비슷하거나 적어도 몇몇 지점에서 포개지는 삶의 행적을 지니고 있다. 그는 냉소적이거나 회의적이다. 정치적 열정을 과시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작품에 따라서 사교성의 폭이 다르기는 하지만, 몇몇 각별한 술친구를 지니고 있고 그들과의 오랜 술자리 및 담소를 즐긴다.
계속해보자. '고종석 소설'의 화자는 서양의 언어와 문화에, 사회 평균인에 비해 훨씬 능숙하고 또 친숙한 편이다. 앞서 서술된 모든 속성을 종합해보자면, '문화 주당' 정도로 표현해볼 수 있겠다. 술과 책을 사랑하고, 스포츠나 육체적 활동은 그리 즐기지 않으며, 유럽에 거주하고 있거나 살아본 경험이 있거나 그곳에서의 삶을 막연하게라도 동경한다.
하지만 그는 전라도 사람이다.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한 이유는 그것이 그가 '문화 주당'의 삶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류 사회가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마이너리티에 속함으로써, '고종석 소설'의 화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다른 소수자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다. 동시에 그 정체성으로 인해 그는 술친구들과의 대담 속에서도, 가끔, 매끄럽지 않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본격적인 갈등이나 반목으로 이어지는 일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讚 기 파랑"(<제망매> 수록)에서 프랑스의 언어학자 '기 파랑'의 전기를 쓰고 있는 누군가처럼 모호한 인격을 지니고 있거나, "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엘리아의 제야> 수록)의 주인공인 피터 버갓 같은 외국인이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 한, 고종석은 그의 전기 소설작의 대부분에서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상 작가 본인이라고 착각해도 크게 문제될 리 없어보이는, 전라도 출신에 유럽의 문화와 언어를 사랑하는 한국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택했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은 역시 대단히 높은 확률로, 그 감정에는 넓은 스팩트럼이 있겠으나, 아무튼 누이를 사랑한다.
3.
(1) 전라도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2) 유럽, 특히 파리를 지향하며 (3) 누이를 사랑하는 남자. 이 세 가지 요소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종석이 긴 휴식기를 가지기 전에 썼던 소설들에 대한 어떤 이해의 틀을 마련할 수 있다.
가령 <제망매>의 표제작인 "祭亡妹"를 살펴보자. 잘 다니던 신문사를 불현듯 그만두고 프랑스로 건너간 '이진우'는 자신의 이종사촌 '김혜원'의 부고를 그곳에서 전해듣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때 학교 선생을 때리고 퇴학당한 후, 혜원이 사는 전주에서 세 달을 보내면서 두 사람은 풋정을 나누었고, 그 이후로도 가늘지만 손가락에 감겨 있는 그런 인연이 이어져왔다. 그는 칸 영화제 취재차 한국에서 온 기자 정경희 씨와 파리를 거닐며 혜원의 추억을 곱씹다가, 페르-라셰즈 무덤에서 죽은 누이를 위한 혼자만의 비문을 마음 속으로 써내려간다.
▲ 소설가 고종석. ⓒ프레시안(김하영) |
'고종석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늘, 전라도에서 출발해 파리에 도착하는 여정 위에 있어 왔다. 그것은 설령 그가 서울에 있어도, 혹은 파리에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서정주의 시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할 때, 그것이 실제 사실 관계와는 무관하게 애비를 종이라고 말함으로써 시적 화자의 자의식을 구성하는 것과 유사하다. 고종석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전라도 출신으로 태어난다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가 그곳에 있음을 '선언'한다.
그와 동시에 화자는 결코 파리에 도착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적으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본인이 지향하는 '파리'가 현실의 그곳이 아님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그것을 흔쾌히 인정한다. "김수영이 파리에 가보지 못한 만큼, 그 몽마르트르 같은 분위기도, 내 몽파르나스 풍경처럼, 김수영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63쪽, <제망매>)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이 꿈꾸던 1910년대와 20년대의 파리에 본인이 도달할 수 없다는 것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전라도에서 출발해 파리에 도착하는 여정이 끝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나'는 전라도를 떠날 수 없다. 아니 떠날 수는 있어도 벗어던질 수가 없다. 동시에 '나'는 파리에 도착할 수 없다. 자신이 동경하는 그곳은 꿈의 도시일 뿐이며, 그나마 "귀화를 한다고 해도 그가 백인이 아닌 이상 진짜 프랑스인이 될 수는 없을 것"(109쪽,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라도에서 파리로 향하는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고종석의 소설에 등장하는 '누이'는, 바로 그 여행에서 (단테의 <신곡>에서와 마찬가지로) 베아트리체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기 작품들에 한정해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 누이는 전주에서 가출한 나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혹은 누이처럼 수수하게 생긴 무슬림 여성이 파리에서 나의 연인이 되어주면서 내가 '프랑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시작된 여행이 끝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을 방황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고종석이 2003년까지 쓴 소설에서, 누이는 방황하는 나를 감싸고 지켜주는 여신이다.
4.
<오뒷세이아>(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숲 펴냄)에서 오뒷세우스의 오랜 방황은 귀향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그가 키우던 늙은 개를 빼고 그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무튼 그는 집에 돌아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그러나 모든 방황이 이렇게 완성된 형태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고종석의 여정 또한 그랬다.
2003년부터 2010년까지 고종석은 새로운 소설을 출간하지 않았다. 그 공백에 들어가는 사건들의 이름을 몇 개만 짚어보도록 하자. 대통령 탄핵, 탄핵 역풍으로 인한 민주당의 붕괴 및 열린우리당의 출범, 황우석 사태, 이명박 당선, 2008 촛불시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전 대통령, 노환과 질병으로 세상을 뜬 김대중 전 대통령.
이 사건들 중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그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었는지 조목조목 거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2010년, 소설가로서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한 <독고준>이, 주인공 독고준이 노무현과 같은 날 자살로 생을 마무리 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는 것부터 일단 지적하도록 하자.
필자는 지금 '노무현의 자살로 인해 고종석이 절필했다'는 식의 극도로 단순한 주장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앞서 우리가 나열해본 사건들의 연쇄 이후, 고종석의 소설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끝나지 않는 여로가 끝나지 않은 채로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독자들이 너무도 쉽게 자연인 고종석에 대입할 수 있었던 화자로서의 '나'는 이제 없다. 독고준은 이북 실향민 출신이며, <해피 패밀리>의 남자 주인공격인 한민형은 청주 한씨, 즉 충청도 출신이지만 본인의 지역색을 강하게 느끼거나 하지 않는다. 계속 돌아오게 되는, 혹은 본인의 선언을 통해 돌아오고야 마는 출발지로서의 전라도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두 주인공의 연령대 역시 작가 본인의 그것과는 맞지 않으며, 그 어색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종석은 일부러 한민형을 "구식 취향"으로, 즉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도록 설정해놓기까지 한다. 두 사람 모두 파리를 지향하고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서평의 대상이 되는 <해피 패밀리>에 좀 더 집중해보자. 극중의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프랑스에 대한 동경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민형의 부인 서현주는 자신의 남편을 두고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재능이 있고, 외국어 익히는 것을 즐긴다"(100쪽)고 평가하지만, 한민형은 "최근엔 아랍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한민형의 심복 노릇을 하는 이정석 또한, 다양한 외국어를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중 프랑스어가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가 프랑스어를 잘 하는 이유는 외국어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공을 했기 때문일 뿐이다.
물론 작중에 등장하는 가상의 프랑스 소설인 <행복한 가족>이 고종석의 프랑스 애호를 일종의 흔적기관처럼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액자소설은 외부의 작품을 끌어갈만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한민형이 던져놓은 소설을 그의 아내와 여동생이 무심히 넘겨보기만 할 뿐이다. 그 속에 담겨있는 모습이야말로 등장인물들이 희구하는 '행복한 가족'을 보여준다는 해석을 굳이 하자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종석 소설'의 주인공들이 파리를 꿈꾸고, 직장을 그만두고 날아가고, 그 속에서 거닐면서도 도달하지 못하던 그 이상향의 모습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다. 적어도 같은 수준에서 '텔로스'로서 기능하지는 않는다.
떠날 수 없는 출발지도, 도착할 수 없는 목적지도 없으므로, 이제 방황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다. 한민형은 24시간 술을 마시고도 집에 잘 돌아오고, 자신의 의지대로 어머니가 준비한 생일 파티를 거부하며, 아내와 장모와 딸과 함께 한 살을 더 먹는다. 방황이 없으므로 죽은 누이 또한 이제는, 그를 여신처럼 지켜줄 수가 없는 것이다.
5.
<해피 패밀리>의 결말은 고종석의 절필만큼이나 논리적이다. 논리적이라는 표현에는 다소 어폐가 있을 수 있겠다. 전후 사정을 종합해보면 다른 가능성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소설이 됐건 산문이 됐건, 우리가 고종석의 글을 읽으며 느꼈던 날 선 윤리 감각, 짐짓 차가운 척 하지만 뜨거운 인류애, 추억하면서도 그 추억을 착취하지 않는 산보객의 시선 등은, 그가 영원히 방황하는 자였기 때문에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라도라는 선언된 정체성은 고종석이 다른 소수자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기제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다수자가 되기 위한 존재론적 비약을 굳이 시도하지 않게 해주는 안전핀 역할도 수행했다. 파리를 지향함으로써 그는 소설과 산문 곳곳을 빛나게 해주는 지식을 얻었고, 그것들을 천진난만하게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면서 지적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파리는 19세기의 중심 도시이지만, 또 다른 중심지인 런던과는 다르게 그 이름에서 혁명의 냄새를 지울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에세이스트의 심장마저도 때로는 뛰게 만들었고, 그가 사회 참여적인 발언을 기꺼이 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제 대단히 민감한 발언을 하나 해야만 한다. 정치적인 '주체'로서, 전라도라는 정체성은 현재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2012년 대선에서도 전라도의 유권자들은 기호 2번을 달고 나온 후보를 향해 90퍼센트의 몰표를 선사했지만, 그 선택이 과연 '주체적 판단'에 의한 '정치적 결단'인지,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이루어진 불가피한 결정이었는지,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건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2003년까지는 전라도의 정체성을 자기 소설 속 화자의 정체성으로 삼던 고종석이 2013년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자로서 직무유기에 가깝다.
파리라는 도시, 프랑스라는 국가, 그 나라의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 철학, 역사학,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허영심. <해피 패밀리>의 등장인물들이 <기자들>의 주인공보다 덜 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후자를 달뜨게 하고 있던 지적 허영이 전자에게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일일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씨부렁거리며, 실제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하면서, 이른바 '먹물'들의 유희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프랑스 철학'을 비웃는 것은 너무도 흔하고 또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과 품위를 이야기해야 할 시점에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과 진화와 자연선택을 논하는 쪽으로 저자의 정신세계가 기울어져버린 것 역시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추잡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가 말하는 원숭이에 불과함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최근의 지배적인 지적 경향은 고약한 농담처럼 보인다.
고종석이 본래부터 구태의연한 도덕률에 얽매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금욕주의 및 경건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보다는 쾌락주의에 더 쏠렸던 것 등은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지적 허영의 북극성, 즉 파리를 지향하지 않게 되자, 고종석이 견지하고 있던 회의주의에 기반한, 그러므로 견고한 것처럼 보였던 휴머니즘도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합리적인 시장주의자라고 말하는 복거일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프랑스제 철학과 문학 등의 유효기간이 끝나서일 수도 있지만, 그야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제 그 댄디는 구두를 공들여 닦은 후 바리케이드에 올라 시를 읊지 않을 것이다.
6.
고종석의 오랜 독자로서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해피 패밀리>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그리 될 수밖에 없었던 진행 과정으로 인해 더욱 비극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품 안에서건 밖에서건, 새로운 구조를 찾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는 한, 결말은 없다. 다만 우리가 작가의 말도 없이 끝나는 책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종말만이 있을 뿐이다. <해피 패밀리>의 마지막 페이지야말로 무참한 절필 선언이다. 작가로서 고종석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어떤 결말을 낼 것이냐가 아니라, 언제 어떤 식으로 종말을 선언할 것이냐였던 것이다.
물론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여기에는 희망의 씨앗이 없지 않다. 이제 고종석은 '고종석 소설'이 아닌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해피 패밀리>가 그렇다. 시점을 나누고, 한 사람의 생각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하게 하는 대신 다른 화자에게도 기회를 주고, 수없이 반복해온 끝나지 않는 방황의 구도에 의존하지 않으며, 정해진 파국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서술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 잔해로부터 그가 새로운 창조의 거푸집을 짜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훌륭한 글을 썼지만 훌륭한 삶을 살지는 못한 하이데거가 즐겨 인용한 횔덜린의 시구처럼, 위험이 있는 곳에 또한 구원의 손길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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