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그 선배는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직했다. 몇 년 뒤 외국 출장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았다. 하루 2~3시간밖에 못 잘 정도로 바빴다. 몸이 좋지 않았는데 업무가 밀려서 병원도 못 가고 일하다가 결국 쓰러졌다. 과로사였다.
그때는 주위 사람이 20대 후반에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몇 년 뒤, 기자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뜻밖의 죽음들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부고 기사를 쓰는 일이 잦아졌다.
정신이 퍼뜩 든 것은 며칠 전이었다. 지인이 친목 모임 참석 여부를 묻자, 나는 무심결에 "최근에 사람이 죽어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지인은 의아해 했다. "그런 일이 그리 흔히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
지인의 말을 듣고 새삼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죽었더라?' 하고 되묻게 됐다. 부고 기사 목록은 이랬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58명이, 쌍용자동차에서 23명이 세상을 떠났다. 25살 사육사가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일하다가 패혈증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에는 노동자들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며칠 전에는 삼성전자 불산 공급 업체에서 일하던 고 박 모(34) 씨가 일하다 숨졌다.
물론 노동자들이 죽는 일은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자영업에 뛰어든 지인은 내게 이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직업이 있지. 하나는 돈을 많이 벌고 죽도록 힘든 직업, 또 하나는 돈을 조금 벌고 죽도록 힘든 직업. 난 후자야."
대학 시절 OO 선배의 부고를 전한 친한 선배의 결론도 비슷했다.
"죽자 살자 취직해서 죽도록 일하다 죽으면 뭐하나. 대기업도 소용없다. 고시나 볼까."
▲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김순천 지음,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 |
첫째,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이 한다. 둘째,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지며 건강이 나빠진다. 심지어 동료가 죽기도 한다. 셋째, 경영 상황이 흑자이든 아니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직원이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언제든 잘린다. 넷째, (위 세 가지 사항 등에 대해) '개기면' 잘린다.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이 한다
'공기업이라고 다 좋은 직장인가요'라는 소제목으로 소개된 금융계 공기업에 다니는 김성오 씨의 사례를 보자.
"1년 내내 자야 할 시간을 넘겨서 자니까 몸이 항상 피곤했어요. 밤 11시에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면 12시가 넘는 거예요. 체력이 많이 딸렸어요. 일이 너무 많이 쌓여 있으니까 집에 와서도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 거예요. 이번 달만 하면 나아지겠지 그랬는데 일은 해도 해도 또 생기는 거예요." (234쪽)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이 나쁘다
너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갖가지 부작용을 겪는다. 취업 포털 '잡 코리아'가 2011년 3월 직장인 91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87.8퍼센트는 "업무 스트레스로 심리적, 신체적 이상을 겪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으로는 과도한 업무량(34.5퍼센트)이 1위로 꼽혔다.
반월공단에서 맥심 커피믹스를 250개씩 포장하는 일을 했던 김준서 씨는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커피믹스가 눈앞에서 비처럼 내려오는" 환영을 봤다. 몸 성할 날도 없다. "무릎 크기, 어깨도 짝짝이고, 10시간씩 서서 일해서 다리가 다 엉망"이었다.
대기업은 좀 나을까.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문기주 씨는 "유기용제를 쓰던 동료들이 암에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사위가 경영하는 한국타이어에서는 1년이 아니라 한 달에 무려 5명이 죽었다. 사인도 다양하다. 심장마비, 돌연사, 폐암, 간암, 식도암….
삼성전자 해고자인 박종태 씨는 대기업의 노동 강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삼성전자 부사장이 자살할 정도면 일반 사원들은 어떻겠어요?"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언제든지 잘린다
쓸모가 없어지면 잘리기도 한다. 경영 상태가 흑자인 회사도 마찬가지다. 동부그룹에서 일하는 이진혁 씨는 삼성SDI를 그만두고 이직한 이유를 구조조정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삼성이란 기업이 급여 등 보상 체계는 좋은데 회사가 필요 없다고 여겨지면 바로 구조조정을 했어요. (…) 잘하는 사람이라고 항상 잘하지는 않아요. 잘할 때도 있고 운이 안 맞아 못할 때도 있고 그렇죠. 그런데 성과가 안 난다면서 30대 초중반 직원들까지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을 붙여 구조조정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그 모습을 보니까 지금은 인정받고 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에게도 저 화살이 날아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회사에 대한 충성도와 애정이 많이 사라지게 됐죠." (251쪽)
'개기면' 잘린다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거나 잘못을 해도 절대 개기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삼성전자 사내 전산망에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글을 올린 박종태 씨는 징계 해고됐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사측 경비에게 두들겨 맞았다.
한국타이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회사맨'일 정도로 애사심도 강하고 열심히 일했던 정승기 씨도 그렇게 회사에서 찍혔다. 친한 친구가 기계에 눌려 두개골이 함몰돼 현장에서 죽었는데, 회사가 근조 리본을 못 달게 했다. 회사가 남자 사원들을 버스에 태워 이른바 '묻지 마 관광'(성매매)을 보내기도 했다. 불행히도 정 씨는 이런 문제를 가벼이 보지 않았다. 결과는 동료에게 당한 '커터 칼 테러'와 회사가 내린 징계 해고였다.
내가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인지 알고 싶다면…
일부 극단적인 사례가 있지만 몇몇 기업들만 대한민국에서 특출하게 '나쁜 기업'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노동자가 "노예나 다름없는" 상황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상적인 회사라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이 지켜지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고야 만다. 뒤집어 말하면? 다음 열거한 사항과 자신이 다니는 직장의 근무 조건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저희 회사는 해고를 시키지 않습니다. 저희 회사는 비정규직은 한 명도 없고 모두가 정규직입니다. 저희 회사는 8시간 노동제를 꼭 지킵니다. 저희 회사는 여름에는 무조건 일주일 휴가를 줘서 다 쉬게 합니다. 저희 회사는… (…)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마음이 울컥했다. 그가 말한 내용들은 정상적인 회사라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동안 삼성, 쌍용, 한국타이어, 두산, 반월공단의 열악한 중소기업 등 많은 회사 사람들과 인터뷰하면서 얼마나 그리워했던 말들이었나."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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