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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로 말하는 삶,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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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로 말하는 삶, 끝나지 않는다!

[프레시안 books] 알렉산더 클루게의 <이력서들>

알렉산더 클루게는 국내에서 '뉴 저먼 시네마(New German Cinema)'를 이끈 영화감독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소개하고 끝내기에는 이력이 좀 복잡한 인물이다.

클루게는 1932년 독일 할버슈타트에서 태어나 나치 체제와 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폭격과 전후의 혼돈 속에서 성장했다. 대학에서는 법학, 역사학, 종교음악을 공부했고, 1956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괴테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1958년부터 변호사로 일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교류하기 시작해, 그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영화와 문학 방면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1961년 발표한 단편영화 <돌 속의 잔인함(Brutalität im Stein)>과 1962년 출간한 소설집 <이력서들(Lebensläufe)>(이호성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이었다.

▲ <이력서들>(알렉산더 클루게 지음, 이호성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이 책 <이력서들>은 여러 겹의 맥락에 가로놓여 있다. 첫째로, 저자 클루게는 예외적인 개인이 아니라 당시 그를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정황과 다양한 집단들에 연루되어 있었다. 이 책이 출간된 해, 클루게는 새로운 독일 독립 영화의 시작을 공표하는 '오버하우젠 선언'에 동참했으며, 전후 독일 문단의 주요 세력이었던 '47 그룹'에도 참가했다.

제각기 접근법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전후라는 시간과 독일이라는 장소 자체를 일생의 과제이자 풀어야 할 숙제로 떠맡았다. 전후 독일은 나치 집권에서 패전에 이르는 바로 직전의 과거에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일단은 그 관계망을 없는 셈 친 채 과거사를 청산하고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모순적 상태에 처해 있었다.

클루게의 이력은 이처럼 난해한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어지러운 행적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다른 많은 또래 젊은이들처럼 영화를 사랑하면서도, 매체의 형식적 특정성보다는 포괄적인 공론장의 작동에 더 관심을 두었다. 자기모순에 속박되어 저 자신을 해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전후 독일의 폐색 상태를 해소하기 위하여, 그는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클루게는 소설가이자 이론가로서, 영화감독이자 TV 제작자로서, 교육자이자 로비스트로서 폭넓게 움직였지만, 이는 모두 대안적 공론장의 시동을 걸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밀접하게 상호 연관되었다.

여기에 <이력서들>의 두 번째 맥락이 있다. 클루게의 책은 자기 완결적인 장편 소설이나 단편 소설들의 모음이라기보다는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야기들'의 모음에 가깝다. 우리가 겪는 일들을 어떻게 경험으로 조직하고 이해를 발전시키며, 더 나아가서 바람직한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순환을 창출할 것인가 고민할 때 그 고민을 풀어 나가는 가능한 출발점 중 하나로서 이야기의 문제가 있다. 요컨대 전후 독일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혹은 독일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초점은 거장들과 걸작들로 구성된 어떤 문학의 세계를 살짝 비켜난다.

실제로 클루게 소설의 기이한 매력 중 하나는 그것이 잘 쓴 글이 되는 데 무관심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종착점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페이지, 일종의 테스트나 슥슥 그린 스케치에 가까워 보인다. 클루게가 영화감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이야기들은 그저 영화 시놉시스와 설정, 촬영 대본 일부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클루게는 <이력서들>에 수록된 '아니타 G.'의 이야기를 1966년 <어제와의 이별>이라는 영화로 각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서화된 이야기를 단순히 영화의 전 단계로 취급할 수는 없다. 클루게는 1970년 SF영화 <대혼란>에서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충하기 위해 1973년 <치명적 종말로 가는 배움의 과정>이라는 소설집을 낸 적도 있다. 때로는 기존 이야기의 주인공을 다시 불러내어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한다. 물론 아예 새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도 쓴다. 클루게는 <이력서들>을 시작으로 평생에 걸쳐 말 그대로 수천 페이지의 이야기들을 썼고, 2000년에는 이를 모아 <감정의 연대기>라는 합본을 내기도 했다.

이것은 이를테면 발자크가 본인의 전작들을 '인간희극'이라는 이름으로 합본하면서 18~19세기 프랑스의 총체적 비전을 제시하려는 야심을 품었던 바와는 조금 다르다. 2000년대 초에 출간된 클루게의 합본들은 20세기 독일의 총체적 비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알렉산더 클루게라는 어떤 '세계에-파묻힌-개인'의 좌충우돌과 시행착오의 집적으로 보아야 할지 모른다. 그것들은 여전히 완결되고 굳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풀려나와 움직여야 하는,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시험용 장치 또는 도면에 가깝다.

이제 곧 81세 생일을 앞두고 있는 (그러나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 노작가의 길고 구불구불한 여정이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서, <이력서들>은 여러 가지 감흥을 준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이십대 후반의 클루게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에 별로 능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반면 시간강사, 법률가, 군인 등 전문 지식을 기반으로 온건한 수준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획득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간 계급 남성 이야기는 좀 더 설득력 있다. 독일 교양소설과 카프카식 관료제 우화 사이에서, 이 남성 주인공들의 일생은 인간적 성숙의 서사가 아니라 직업적 경력의 전개, 말 그대로 '이력서'로 환원된다.

전부는 아니지만 클루게의 많은 이야기들은 특정한 한 개인의 일생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는 급격한 사회 변동이 반복되었던 20세기에서 이야기의 노선을 찾아내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를테면 독일이라는 국가는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졌을 때나 "1945년이라는 붕괴의 순간"을 전후로 뿌리째 뒤바뀌었지만, 그렇게 빠르게 전면적으로 변화하지 못하는 개인들의 연속적 생활은 당시 상황에 대해 조금은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이력서들>의 한 페이지에는 "가능한 세계 전부가, 그 온 세계가 모양을 바꾸어 고유한 개인 안으로 녹아듭니다. 그것이 삶이라는 단어에 담긴 보다 고귀한 의미입니다"라는 빌헬름 폰 훔볼트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를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 본다면, 개인이란 그런 세계의 일부가 임의로 선별 출력되는 불가사의한 인터페이스로, 문자 그대로 '세계의 임의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감정은 서사를 이루지 못하고, 생활은 시대와 생애 주기별 단계에 따라 조각난다. 개인들은 주어진 사태를 받아들이고 정당화하기 위해 지력을 소모한다.

"권력 안에 있는 자는 생각할 수 있다. 현실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생각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이 기회는 다시금 높은 위치에 이른 학자들에게만 있다."

클루게의 개인들은 대개 무력하고 불완전하며 여간해서는 '전인(全人)'에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각도를 달리 해서 보면, 그들의 무질서한 움직임—부분적으로 적용되는 규칙들은 있지만 그 결과는 확정적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움직임들의 연쇄 작용—이 세계를 이루고 지탱시킨다.

여기서 클루게가 노린 것은 단순한 세태 묘사나 고발이 아니다. 나는 그가 이야기들로부터 얻고자 했던 것이 일차적으로 이야기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이야기를 믿으며 살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살아가려고 시도해 볼 수 있을까, 여기서 클루게는 정확한 이야기를 찾으려 하는 만큼이나 좋은 이야기를 찾고자 했다. 혹은 그냥 적절한 이야기, 유효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그는 이 모든 요건을 충족하는 하나의 최적화된 이야기에 시간을 바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들, 완결을 유예하는 이야기들을 찾아서 계속 퍼뜨렸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그는 오히려 더 많이 쓰고 있다. 2003년 <악마가 남긴 틈새>라는 제목으로 500편의 이야기를 내놓았고, 2006년 <문을 서로 마주 댄 다른 삶>이라는 350편의 이야기, 2009년 <부드러운 힘의 미로>라는 166편의 이야기, 2011년 <단단한 널빤지 뚫기>라는 133편의 이야기, 2012년 <다섯 번째 책. 새로운 이력서들>이라는 402편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그 사이에 다른 책도 계속 내고 영화도 몇 편 발표했다.) 독일 내에서도 클루게는 거대하지만 약간 지긋지긋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지긋지긋할 만큼 클루게를 많이 알지 못한다. <어느 사랑의 실험>(임홍배 엮음, 창비 펴냄)에 단편 '어느 사랑의 실험'이 수록된 것을 제외하면, 온전한 한 권의 책으로는 <이력서들>이 클루게의 첫 번째 국내 출간작이다. 번역을 맡은 독문학자 이호성 씨가 책 말미에 앞으로도 클루게의 책을 꾸준히 국내에 소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으니, 조만간 후속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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