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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데리다, 지젝이 경외했던 그 사람은…

[프레시안 books] 모리스 블랑쇼의 <카오스의 글쓰기>

블랑쇼는 누구인가?

모리쇼 블랑쇼(1907~2003)는 프랑스의 작가, 비평가, 철학자이다. 그의 <정치평론 1953~1993>(그린비 펴냄, '블랑쇼 선집'의 9권이다)을 번역한 고재정 교수의 말을 인용하자면 블랑쇼는 "20세기를 온전히 살다 간 작가"이다.

"1907년에서 2003년이라는 그의 생존 시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전체주의, 나치즘과 유태인 학살, 탈식민주의(알제리 전쟁), 공산주의 혁명과 실패라는 20세기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며, 그 자신 또한 이 시대적 흐름의 심층을 규명하고 저항하며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하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정치평론 1953~1993>, 223쪽)

블랑쇼는 20세기 프랑스, 나아가 유럽철학 전반에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모리스 블랑쇼 자신이 인간관계―그는 레비나스 같은 저명한 철학자와 평생에 걸쳐 우정을 나눴지만, 누구와도 사제관계 비슷한 것을 맺지는 않았다―나 사회적 지위나 정치적 행위 혹은 저작의 명성들을 통해 형성한 게 아니다. 그는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았고 노년에는 거의 은거하다시피 외부(출판사나 언론 등)와 접촉도 끊었다.

그것은 신비주의나 성격적 수줍음, 혹은 겸손함이란 덕목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익명성'이라 불렀던 어떤 철학적 에토스의 담담한 실행이었던 것 같다. 아마 블랑쇼는 자신을 '은둔자'라 부르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다들 이렇게 살지 않는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 뿐이다. 나는 삶을 살지 명성의 세계를 살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학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푸코, 데리다, 낭시, 바디우, 아감벤, 지젝 등등 사상가들 입이나 글에서 그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다. 거기에는 어떤 경외감이 묻어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다. 블랑쇼의 그처럼 조용한 명성과 저음의 영향력은, 20세기의 사유가 자신의 한계―아우슈비츠와 공산주의―를 경험하는 자리(aporia)에 그가 언제나 미리 도착해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지적, 감성적 촉수이지 않은가. 그는 사유의 첨단(尖端, 뾰족한 끝)을 아무런 유행 감각도 없이 주도해나갔다. 그는 '바깥'이나 '타자'(이 용어는 물론 레비나스에게서 온 것이지만)라는 이름으로 그 한계지점을 명명했다.

하지만 다시 말하자. 그 사유의 첨단은 유행의 최신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유의 유행어들을 만들어내는) 문제의 근원성―혹은 심연성―을 가리킨다. 그는 바로 그 '문제'―언어 이전과 언어 이후의 사이(문학의 공간)의 공동체 혹은 타자의 공동체―를 내내 지켜냈기 때문에, 또 그런 문제를 사색의 폐쇄회로가 아니라 현실의 정치경제적 문제들이라는 열린, 아니 찢어진 틈새를 통해 거듭해서 제시했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다.

'사이'에서 삶을 앓다

블랑쇼는 '말하는 동물'인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알았고, 일생 그것을 앓았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의 문제를 '알았고', 또 독배를 마시고 죽는 자리에 이를 때까지 그 문제를 (물론 혼자가 아니라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며) '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것이 삶을 알려면 삶이 대상화되는 삶의 바깥, 삶과 거리를 둔 비-삶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 서야 한다. 우리가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젠가 한번은 그 비-삶의 자리에 서 보았기 때문인가. 아마 그럴지 모른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런 자리를 고수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폭력과 화를 부른다.


▲ <카오스의 글쓰기>(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플라톤이 동굴 신화에서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가르쳐주는 바는, 일반적인 인간들이 돌아서거나 돌아올 힘이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있다는 것이다. (…) 플라톤의 동굴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어떠한 단어도 없으며, 죽음을 형상화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감하게 해줄 어떠한 꿈이나 어떠한 이미지도 없다. (…) 죽음은, 자유롭게 되어 빛에 나갔다가 이제 되돌아와 나타나 질서를 교란하고 피난처의 평온을 깨트리고 그렇게 거처를 없애려는 자들을 살해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죽음, 그것은 살해의 행위이다. 철학자는 최고의 폭력을 겪지만 또한 그것을 부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가 간직하고 되돌아와 말하는 진리는 폭력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카오스의 글쓰기>(박준상 옮김, 그린비 펴냄), 76쪽)

블랑쇼는 그처럼 폭력과 화를 부르는 '언어와 언어 앞의/이전의 무엇 사이'―요컨대 언어의 근원―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고, 그 '사이'를 자동화되고 일상화된 언어-세계에 들여오는 데 바쳤던 작가다. 이 점에서 그는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리는 횔덜린 가까이에 있다.

그렇게 세계와 언어 내로 진입한 블랑쇼의 글은 얼음조각 같다. 냉장고나 정수기에서 만들어낸 동글동글하고 입안에서 시원하고 부드럽게 녹는 얼음이 아니라 한겨울 시냇물에서 만나는―가령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의 정서로 추운 오솔길을 홀로 걷다가 만나게 되는― 그런 얼음조각이다. 잘못 만지면 손을 벨 수도 있을 것 같고 잘못 던지면 맞아서 머리가 깨질 수도 있다. 들여다보면 투명하고, 빛을 받으면 영롱하고 신비롭게 빛을 반사해내지만, 여전히 위험한 고체이고 냉정한 사물성도 갖고 있다.

그리고 민감한 독자가 그 얼음에 매혹되거나 베이거나―둘은 결국 같은 뜻이다―한 후에 돌아보면, 우리 몸의 온기나 피의 열기 속에서 얼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혹은 우리가 그 수정체를 따듯한 방안으로 가져오려 할 때, 그것은 눈처럼 녹아서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블랑쇼는 그런 얼음조각이다. 도대체 블랑쇼의 글은 무엇이 결정(結晶)된 것일까? 사이다. '사'이고, '사이'다.

사유 또는 사랑, 이 찢어진 상처에 머물기

블랑쇼의 <카오스(재난)의 글쓰기>는 철학책도 아니고 문학책―소설은 물론이고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쓰여진 수필―도 아니다. 철학서라기엔 체계나 논증이 없는 문학서처럼 보이고, 문학서라기엔 너무 건조한 사유의 나열처럼 보인다. 이 책은 철학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지만 철학과 문학―하이데거가 '사유'와 '시(詩)짓기'라고 부른, 존재의 근원적 흔적을 추적하는 두 발의 행보―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철학과 문학의 공통원소인 공집합(空集合)이다. 우리는 그 공집합을 "사(思)"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思)"는 사유(思惟)의 "사"일 뿐만 아니라 사랑(그리움)의 "사"―상사병(相思病)의 "사"―이다.

블랑쇼의 사유와 글쓰기가 고수한 자리는 언어의 세계와 언어 앞의/이전의 비(非)세계, 언어와 비(非)언어, 세계와 비(非)세계 사이―그의 용어로는 '중성성'(neutralité)―이다. 그가 "문학의 공간"이라고 말한 곳도 바로 여기이다. 지금 우리가 "사(思)"라고 부르는 "사이"도 바로 그 문학의 공간이자 중성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블랑쇼의 사유가 지니는 현대성이 있다. 이러한 사유의 현대성에 관해 철학자 김상환의 말을 잠깐 들어보자.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붕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재현 모델은 주체와 현실적 대상을 잇는 이자二者관계를 축으로 한다. 반면 현대사상은 그 주체-대상의 관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축의 발견으로 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축과 더불어 원래의 이자관계는 삼자관계로 변형된다. 현대이론은 이 삼자관계를 그려내는 다양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김상환 지음, 문학과 지성사 펴냄), 248쪽)

블랑쇼가 현대적 사유―바르트, 푸코, 데리다, 들뢰즈, 아감벤 등―에 기여한 바는 김상환이 "제3의 항"이라고 부른 차연적(diffélance) 축에 대한 평생에 걸친 사유에서 찾아야할 것 같다. 그의 모든 주요 개념은 이자관계를 해체하고 재배치하는 매개적 또는 중성적 제3항을, 이자관계를 배태한 '근원적 분리'의 자리로 파악한 데서 나온다. 중성성은 하나(A1)와 다른 하나(A2) 사이가 아니라 하나(A)와 다른 하나(~A)를 낳는 사이이다. 그것은 하나의 실정성과 그에 대한 부정성이라는 모순적 관계를 낳는 사이이고 배중률(排中律)의 중(中, the middle)이며 변증법적 '사이'—하지만 정반합의 변증법이 언제나 그것을 은폐하고 망쳐놓는 '사이'—이다.

사이(空)를 함께(共) 사는 공동체의 언어

블랑쇼가 이 "사(思)"에서 끌어낸 산출물들, 흔적들, 파편들은 밤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들처럼 이 책 <카오스의 글쓰기>에서 어떤 성좌배치(constellation)를 갖지만 그걸 감상하고 독해할 수 있는 시야와 시력을 확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사실 블랑쇼의 글은 그런 '전체적 조망'을 허용하지 않게끔 쓰인 것 같다.(*하지만 이 책 후반부에 실린 옮긴이 해제가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길지만 반드시 읽어 보아야할 이 해제는 <카오스의 글쓰기>만이 아니라 블랑쇼의 사유 전반을, 나아가 현대사상을 이끈 핵심적 문제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보르헤스는, 그것이 그리는 땅의 넓이와 똑같은 축적의 지도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우화이지만, 나는 보르헤스의 지도를 삶의 지도로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 삶의 지도를 갖지만―어쩌면 인간은 맨땅, 대지(Erde)가 아니라 바로 그 지도, 즉 세계(Welt)를 밟고 살아가도록 조건지워져 있다― 그것은 정확히 삶의 넓이와 일치하기 때문에 조망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블랑쇼의 텍스트들을 구성하는 별자리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이 블랑쇼의 독특함이고 그의 텍스트의 무용함(또는 무위(無爲))이자 소중함이다. 블랑쇼 선집 간행위원들이 "그의 언어는 우리가 반복하고 추종해야 할 종류의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종류의 것, 익명의 몸과 마음으로 느껴야할 비인칭의 언어 또는 공동의 언어이다."라고 쓴 까닭도 아마 그런 맥락에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블랑쇼를 읽는다는 것은, 그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모리스 블랑쇼'라는 개인의 이름을 지워지게 하는 동시에 어떤 공동의 우리에 참여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귀결점은 또 다른 공동의 언어로 열리고 그것을 생성하게 하는 데에 있다."

나는 여기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때 '공동의 언어'는 앞서 철학과 문학(사유와 시-짓기)이 지닌 공동성, 즉 동일성이 아닌 공동(空洞)성이다. 그 둘은 구멍(혹은 간극)을 공유하지 실정적인 공통의 속성이나 자질을 공유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블랑쇼의 독특한 공산주의 이해에도 어떤 빛을 던진다. 간단히 말해, 그의 정치적 공산주의는 시적 코뮤니즘, 문학적 공산주의이고, 궁극적으로는 공동체(空洞體)의 공산(空算)주의다. 공(the Void) 또는 '바깥'을 공유한―블랑쇼의 또 다른 용어로는 '죽어감'을 공유한― 사람들의 사회, 그런 '바깥'을 생존과 가치의 세계 '안'으로 계산해 들일 수 있는―모든 가치와 실용을 무위로 돌려버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용기를 가진 사회만이 공산주의적 연대를 살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책에서 김상환 교수는, 그런 블랑쇼적 공동체를 혁명가들의 사회라기보다는 인문적 주체들의 공동체로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인문적 주체는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동시에 비-사회적인 역설적인 존재다. 인문적 세계인 정신적 동물의 왕국은 사회성을 결여한 주체들의 사회, 자폐적 영혼들의 공동체다. 그러나 한 사회가 해결해야할 문제, 추구해야할 최후의 가치와 이상 등은 자신 안으로 잠수하여 극단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이런 특이체질의 주체들 사이에서 비로소 예감될 수 있다. 블랑쇼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등과 같은 개념은 이런 인문적 공동체의 역설을 현대적으로 옮기고 표현하는 사례들일 것이다. (김상환, 같은 책, 404쪽)

전적으로 동의되는 말은 아니지만, 블랑쇼가 공동체를 위해 지키고자 하는 저 중성적 지대―문학의 공간, 언어의 시원적 자리―가 언어화 되면서 갖게 되는 역설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재미있는 역설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역설이고 (블랑쇼가 아우슈비츠를 잊지 말라고 할 때처럼) 경각심을 갖고 대해야할 역설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그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라는 게 아니라 사유 안의 사유 불가능성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아우슈비츠라는 '재난'은 우리에게 의미와 의미 불가능성, 기억과 기억 불가능성, 사유와 사유 불가능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모든 것이 말해졌을 때 남아 있는 말해야 할 것이 카오스(재난), 즉 말의 붕괴, 글쓰기에 의한 몰락, 웅얼거리는 웅성거림, 다시 말해 남김 없이 남아 있는 것(파편적인 것)이다. (<카오스의 글쓰기>, 74쪽)

재난, 코스모스에 파고드는 카오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désastre(재난)'을 '카오스'로 번역한 것에 관하여,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고충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서 역자 박준상 교수가 '카오스'로 옮긴 말은 désastre로 보통은 '재난(disaster)'으로 번역되지만 블랑쇼는 이 일상어휘를, 그것의 어원적 의미를 활용해 자신의 독특한 전문용어로 만들었다.

카오스(재난, désastre)가 별에서 떨어져 나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높은 곳에서 발생한 우연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길을 잃었음을 알려주는 천체의 기울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재난의 필연성에서 비롯된 전락(轉落)의 신호이다. 법은 카오스(재난), 최고 또는 극단의 법, 법전에 올릴 수 없는 법의 초과, 즉 우리가 연루되어 있지 않은 채 향해 나아가기로 예정되어 있는 지점인가? 카오스(재난)는 우리를 쳐다보고 고려하지 않으며, 시선이 없는 무한정적인 것, 실패를 겪는다 할지라도, 완전하고 단순한 성실에 따라서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카오스의 글쓰기>, 24쪽)

désastre는 우주의 질서(astre)를 벗어나 분리됨(dés-)을 뜻한다. 그래서 천체의 운행질서(天文), 별들의 조화로운 배치와 정해진 궤도의 반복적 운행에서 벗어나 갑작스레 등장한 혜성 같은 것이 전형적인 재난의 징조이자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땅의 고요한 질서(地理)가 갑작스레 요동치며 무너지는 지진(地震)이나 화산 같은 현상도 물론 '재난'이다. 조화로운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astre)로부터의 벗어난(dis-) 자리를 그는 '바깥'(de hor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바깥'도 그렇지만, 이 '재난'이란 말도 그냥 읽으면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차이'는 평범한 말이지만 그걸 데리다나 들뢰즈가 쓸 경우 정신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그들의 책을 읽고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하지만 여기서 '전문용어'로 만들었다는 주장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소위 전문가들의 직업병을 보여주는 증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문용어이면서도 여전히 일상어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는다. 그들은 왜 그런 식의 이중플레이를 할까?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펴냄)이 일본에서 번역돼 출간됐다는 소식을 들은 독일 대학생이 "아니 그 책의 독일어 번역본은 언제 나오는 거야"라고 불평을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이데거의 독일어는 독일인에게도 어렵다. 아니 낯설다. 하이데거가 독일어를 너무나 사랑―이 지나친 애착이 화를 불러왔다―했기 때문에 그의 독일어는 일상의 언어에서 벗어나 버렸고(그렇다고 철학적 개념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또 달리 생각하면 그처럼 일상의 언어를 벗어난 독일어라서 그가 '자신의 독일어'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평이하게 흘러가는 모국어의 밑바닥을 파고들어 캐내는 말-뿌리―자의적이기로 악명 높은, 그러나 언제나 매력적인 하이데거의 어원학―의 낯설음이 블랑쇼의 프랑스어에도 있을 것이다. 블랑쇼가 하이데거의 어원학을 비판하면서도 통째로 내다버리지 않는 것은, 과감히 비약해 말하자면, 우리가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공동(코뮨)주의―언제나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내장한―를 버리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블랑쇼의 정치적 도전은 바로 그 위태로운 사이를 지키는 데 놓여있는지 모른다. 마치 횔덜린의 유명한 시구―"가까이 있으면서도/ 붙들기 어려워라. 신은/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도 함께 자란다"―에서처럼 말이다. 여기서는 단지 일상어에 철학적 위광을 부여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삶과 사유의 길항과 상호침투가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재난'을 '카오스'로 옮기는 친절한 번역이 독자들의 블랑쇼 독서를 가능하게 했겠지만, 그 이면에서 '난문(難問)' 속을 헤매다 '돈오'할 기회를 빼앗아 버렸을 수도 있다는 걱정도 든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문장이 안 되잖아'라고 화를 내다가도 인내심을 갖고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하고, 책을 덮고 살다가(재난을 겪다가) 다시 돌아와 '아 그런 뜻이었어'라고 깨달을 수도 있는 기회를, 그런 기회를 통해 '재난'이라는 이 일상적 어휘의 심층에서 다른 세계, 다른 사유로 통하는 문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벤야민의 표현을 빌자면 일상의 경험과 말들을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뜰 기회를, 그 친절함이 닫아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désastre를 '일괄적으로' 카오스로 옮길 게 아니라, 재난으로 옮기면 정말 한국어가 안 되는 그런 대목에서만 카오스나 다른 어휘로 번역하고 원어를 병기했으면 어땠을까.

일상화된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며 재난을 사유하기

사실 '재난'은 일상적 어휘일 뿐 아니라 점점 더 일상적이 되어가고 있는 사태이다.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천재지변들이 그렇고 고도로 기술화된 사회에서 겪게 되는 위험들―유전자변형에서 원전사고까지―도 그렇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흉기를 휘두르거나 총기를 난사하는 테러들―'묻지마 살인'이라는 잘못된 표현으로 불리는―도 그렇다.

재난의 일상화는 아감벤이 우리시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벤야민으로부터 인용했던 중요한 명제, "예외가 상례가 된다"가 결코 문학적 수사가 아님을 방증하고 있다. 벤야민의 명제는 <역사철학 테제>라 불리는 문서에 들어있는 것이고, 거기서 예외를 상례로 여기며 살아온 자들은 역사의 무게에 깔린 익명의 사람들, 가난한 민중들, 배제된 인간들, 프롤레타리아들이다. 오늘날 재난의 일상화 속에서, 우리가 '예외의 상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바로 그 '역사 속의 소외된 자들'과 우리 자신이 동일한 조건에 처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깨달음에 문학과 철학이 책임이 놓여있으며 블랑쇼의 카오스(재난)의 글쓰기는 바로 그런 부름에 답하는 글쓰기이다.

"인간들에게 끼치는 문학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것―아마 그것이, 성경의 민중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아보게 만드는, 서양의 궁극적 지혜일 것이다."(레비나스) (<카오스의 글쓰기>, 233쪽)

민중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아보게 만드는 것, 자기 자신을 아는 것—그런 불가능한 앎이, 철학과 해방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에서도 항상 핵심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블랑쇼의 사유는 (사적 영역을 다루는) 정신분석학과 (공적 영역을 다루는) 해방정치(코뮤니즘)가 문학(시-짓기)과 만나야만 하는 자리에 세워진 하나의 이정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정표의 팻말은, 마치 고장난 것처럼, 다른 어딘가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바닥을 향해 꺾어져 있다, 혹은 아예 바닥에 떨어져 있다. 마치 '당신이 영원히 도달해야할 곳이 바로 여기, 혹은 이 푯말을 주워든 당신 자신'이라는 듯이.

후기: 본문에서 '재난'이 '카오스'로 번역된 것에 관해 (책머리에 이에 대한 옮긴이의 충분한 해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표명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은, 이 난해하지만 소중한 저작을 공들여 우리말로 옮겨준 역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이다. 이 번역본이 없었더라면, 고백컨대, 나는 이 책을 읽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극히 어려웠을 번역과 출판 작업을 통해 블랑쇼를 우리 가까이로 데려와 준 이들—<카오스의 글쓰기>를 번역한 박준상 교수를 비롯해 '모리스 블랑쇼 선집' 발간에 참여한 번역자와 편집자들—에게 응당 표했어야할, 독자로서의 고마움의 인사를 이렇게라도 덧붙이지 않으면 마음이 내내 무거울 것 같다. 그들의 노고가 블랑쇼의 사유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면, 우리(사회와 자신들 각자) 안의 '들리지만 읽을 수는 없는 절규들, 혹은 들리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침묵들' 곁으로 블랑쇼의 사유를 데려다 놓는 수고는, 나와 같은 독자들의 몫이 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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