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우드사이드의 <잃어버린 근대성들>(민병희 옮김, 너머북스 펴냄)은 과거제, 즉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아 나라를 운영했던 동아시아의 중국, 베트남, 조선의 경험이 근대성의 요소로 정당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 관료제 운영에서 나타난 경험과 위험 역시 현대 사회의 관료제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단서가 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 책의 논의는 두 축, ①과거제를 통한 전통 관료제(중국식 관료제, mandarinate)의 경험과 문제의식 ②현대 관료제의 위기에 대한 전통 관료제의 기여로 나뉠 수 있다.
근대성들
▲ <잃어버린 근대성들>(알렉산더 우드사이드 지음, 민병희 옮김,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
이 책의 제목을 보며 마찬가지로 거슬렸다. 영어로 'Lost Modernities'니까, '잃어버린 근대성들'이 맞다. 그러나 근대성은 '속성, 성격'이기 때문에 그냥 '잃어버린 근대성'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평자의 잘난 척은 여기까지!
애당초 저자는 단수형의 근대성이 역사의 '패배자'들과 다양한 형태의 권력에 대한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저항을 무시할 수 있으며, 심지어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공모하고 있다는 지표로 읽힐 수도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40쪽). 복수형의 '근대성들'이라는 개념은 조야한 단수형 개념의 근대성이 죽여서 묻어버린(死藏) 광범위한 합리성의 전통을 들추어내도록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복수형 'Modernities'라고 썼고, 역자도 원의에 충실하게 '근대성들'이라고 썼다.
이 점, 매우 중요하다. 대략 19세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뭔가 인류사, 세계사 같은 게 있어서 인류의 역사가 쭉, 도도히 흘러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하는 관념이다. 국민 국가를 주체로 놓고 역사를 보는 국사(國史) 관념도 비슷한 시기에 확립된다. 이때의 국사도 세계사와 공모한다. 왜냐하면 그 국사의 발명자들이 세계사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사, 유럽의 세계사였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런 역사를 대문자 역사 즉, 'Hisroty'라고 부른다. 숱한 역사, 예를 들어 개인의 역사, 가족, 이익 단체, 종교 집단, 동아리, 지역(지방) 등등의 역사들(histories)의 대표 선수이자, 이들 복수의 역사를 묻어버리는 단수의 역사를 가리킨다. 우드사이드는 이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 대문자 역사는 계몽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로 근대를 환원하고, 따라서 자유를 향한 역사, 이성을 향한 역사, 평등을 향한 역사의 모습을 띤다. 목적론이다. 마치 인류의 역사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향해 지금까지 가열차게 전진해온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관념. 그래서 우드사이드는 말한다.
"훌륭한 역사가라면 일반적으로 목적론을 거부한다." (60쪽)
덧붙이자면, 대문자 역사 관념 역시 역사적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역사적 관념이고, 역사적 관념이란, 다름 아닌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관념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언젠가는 변할 역사이듯이.
발견
우드사이드는 해럴드 버먼의 "보통 전근대 사회로 간주되었던 시기의 '근대적 특성들'을 살펴보는 노력을 통해서 수정되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29쪽), 버먼의 이와 같은 작업이 서구의 역사에서 가치 있는 일이라면, 이는 아시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임기, 인사 고과, 무엇보다 과거 시험으로 이루어진, 즉 인재들의 교육을 바탕으로 한 통치인 동아시아 관료제에 주목했다.
알다시피 유럽 봉건제 아래의 귀족제는 세습으로 작위를 이었다(우드사이드는 봉건제라는 용어를 종종 세습제, 귀족제와 혼용해서 쓰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당나라 이후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함으로써 세습이 아닌 능력주의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17세기 이후 유럽 계몽주의 학자들은 중국의 과거제에 주목했고, 절대 왕정기를 거치면서 관료제와 상비군을 갖춘 국민 국가가 태동했다.
우드사이드는 과거제를 시행하고 있었던 이 세 나라 정체의 조숙하고 제한적인 탈봉건화 과정은 합리적인 사고를 정치와 경제에 적용하려는 시도였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 이성이 일궈낸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34쪽).
위험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의 시행을 통해 성취해낸 것들뿐 아니라 그러한 시도 자체의 취약점에도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드사이드는 과거제를 폐지하라는 압력, 과거 시험을 통해 운영된 관료제의 위험에 대해 논의하였다.
21세기 서구 관료제 전문가들은 '관료제가 지닌 책임의 역설'을 고민하고 있다. 봉건제 이후 공복(公僕)은 한편으로 단순히 더 높은 정치적 권위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은 또한 직무상 개인적인 책임감의 결여라는 위험성을 대변한다. 윗사람에게 보고하고, 또 보고해서, 위로 책임을 넘기는 방식 또는 업무 분장을 통해 책임을 분산하는 방식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다른 한편, 그들이 정책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그들의 주관적인 행동이 상부의 정치적 권위를 침해할 위험성도 있다.
이런 두 측면의 위험을 조정, 관리하기 위해 유무형의 요구 사항이 있다. 유형은 '공무원 윤리 규정' 같은 것이고, 무형은 조직 문화라고 부르는 것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 부정적인 것으로는 '눈치 보기' 같은 게 있을 것이다. 이런 요구 사항들이 오히려 공무원들이 온전히 책임감 있는 자세로 표준을 따르기 위해 필요로 하는 그들 개인의 도덕적인 역량을 약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외적 규정, 규제가 내적 자율성을 압도하는 것이다. 우드사이드는 이런 책임의 역설에 대한 논의가 늦어도 명(明)나라 때는 논의되고 있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처음 개발된 능력 본위의 권력 편제는 분명히 진일보한 것이었다(37쪽). 동시에 능력 본위의 권력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의 숭고함을 공정하게 기술하려면, 그것의 선진성 뿐만 아니라 위험성도 동시에 살펴보아야한다고 강조한다.
대안
우드사이드는 동아시아와 근대라는 주제에서 서구 중심의 근대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당위에 그치지 않는다. 이 주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생각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옮긴이 서문, 10쪽).
관료제적 주관성에 대한 비판적 자각에 대한 주목은 이런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행정 계획은 언제나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송나라 사마광(司馬光)부터 내내 동아시아 학자-관료들은 관료제 아래서 살아 있는 현실이 문서에 갇힐 상황에 대하여 경고해왔다(62쪽).
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행정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빈곤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더 나아가 철학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재정 문제, 예산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 시험이 문장력이나 테스트하는 사장학(詞章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 및 경고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문장만 잘 쓰면 결국 현실적 제도의 다이나믹스로부터 '말=개념=정책 언어'가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우드사이드가 말하는 '관료제의 주관성'이다. 그리고 그 주관성에 대한 동아시아의 오랜 우려, 수백 년에 걸친 엘리트들의 우려가 곧 근대를 사는 우리가 닥친 위기를 풀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산을 우드사이드는 1978년 이후 최근까지 베트남과 중국의 최근 관료제 논의를 통해 진단하고 있다. 1991년 베트남에 공무원 제도가 처음 재도입되었을 때 베트남 정부는 구태의연한 당 간부를 새로운 공무원들이 대체해주리라 기대했다. 다시 '중국식 관료제화'가 이루어지면 정치적 민주주의의 모든 위험 요소가 없이 국가조직이 작동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베트남 정부는 전통 시대에 오래 논의되었던 '관료제의 위험'에 대한 논의를 몰랐고, 현대 경영 이론에서 지적했던 위험성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하였다.
역사
나는 베트남과 중국의 관료제 현실과 문제점, 그에 대한 개선 노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른다. 또한 시스템 이론을 비롯한 현대의 경영, 조직 이론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 이는 단순한 유예가 아니라, 반성으로 하는 말이다. 우드사이드의 역사 공부는 살아 있다. 지난 과거의 경험이 현재 닥친 위기, 문제와 이어져있고, 대안으로 제시된다. 역사 공부의 강도(强度)와 스케일, 곰곰이 생각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일이다.
의문
분명 우드사이드는 어떤 문화(지역, 국가, 민족)가 다른 문화가 간 길을 따라가는 식의 진보사관, 즉 직선적, 선형적(線型的) 역사관을 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봉건제(세습제)에서 관료제(능력주의)로의 과정은 '합리화 과정'이며, '시계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1. 우선 우드사이드가 말하는 '합리화 과정'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성적 합리화 과정'이라고 보고, 세습제에서 능력주의 관료제로의 전환이 그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러한 우드사이드의 전제가 타당한지 잘 모르겠다.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신분제의 폐지야말로 새로운 사회의 가늠좌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분을 대체한 계급의 폭력성이나 위험성은 어떠한가?
혹시 동아시아 봉건제에서 관료제로의 전환을 합리화 과정이라고 보는 우드사이드의 전제 역시 '계몽주의적 근대의 잔재' 아닌가? 오히려 맹자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듯이 귀족정, 민주정, 왕정이 사회의 산업, 규모, 기술 등의 조건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정체(政體)인 것처럼 세습제의 귀족제와 능력주의의 관료제 역시 그런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부분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는) 제도가 아닐까?
나아가 우리가 과연 역사의 불가역성을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 뒤로 돌아갈 수 없을 듯 보이는 '단순한 합리화의 산물'인 기술 발달마저도 축적적 발달보다는 문명의 성격과 구조에 따라 대체되면서 변화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똥거름 퇴비가 지금 거추장스러워 포기하였듯이, 화학 비료 역시 퇴출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퇴출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우드사이드는 "교육을 통해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더 나은 기술과 희망이 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비서구 사회의 농민이라면, 아마도 근대가 실패한 개념이라는 데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87쪽),
이 말에 대해 바로 떠오르는 질문은 이렇다. 어떤 교육을 말하는가? 성인(聖人)이 되는 교육? 노동자가 되는 교육? 더 나은 기술이 희망과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식의 확대, 인생의 풍요로움'이라는 보편적 희망과 꿈이 왜 굳이 '근대'라는 개념과만 연결되어야 하는지? 아무래도 우두사이드의 '합리화 과정'이라는 전제는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런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우드사이드는 동아시아 관료제의 선진성과 위험성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진성과 위험성'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 사건, 현상에서 나타나는 음과 양, 공과 과를 균형 있게 보아야 한다는 말만은 아닌 듯하다(이에 기초하고 있지만).
내게는 오히려 하나의 가능성, 즉 역사를 인간의 합리화 과정이라고 보는 자신의 관점이 갖는 한계를, 내 방식으로 표현하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도로형의 역사관'의 근원적 문제점을, 즉 '계몽주의적 근대의 잔재'를 완전히 탈각하지 못한 자신의 인식을 우드사이드가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매우 적극적인 단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2. 역시 '선진성'이란 말이 걸린다(실은 우드사이드 선생에게 '선진성'이란 용어, 개념을 신중히 재고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곳곳에서(167쪽 등) 우드사이드는 "동아시아는 몇 시인가?"를 묻는데, 위험하다. 같은 시계를 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애초 시계를 차고 있지 않다면?
관료제의 주관성, 정치의 행정화 등 우드사이드가 포착한 동아시아가 했던 고민과 경험의 긍정적 가치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근대성'으로 묶기에는 여러 가지 사전에 검토될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어법상, 근대성을 개별 요소로 보게 되면, 자칫 그 요소의 관계성을 떼어내고 실체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관료제는 다양한 사회와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드사이드가 다룬 동아시아 귀족제와 공존하는 관료제가 있는가 하면, 민주주의와 결합한 관료제가 있고 전체주의와 결합하는 관료제가 있다. 이러한 결합은 시대를 달리해서도 나타나고, 동시대에도 다른 체제와 결합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말은 곧 관료제의 선진성이나 위험성을 논할 때 반드시 관료제가 결합하고 있는 체제, 사회와 연관시켜 이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경제적으로 농업 사회와 공업 사회, 소농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회적으로 신분제 사회와 계급 사회, 정치적으로 왕정 사회와 민주주의 사회라는 상이한 배경의 동아시아와 근대 사회(내재적 발전에 의해 도달했든, 폭력적으로 도달했든)에서 관료제 문제를 다루면서, 과연 '자본주의적 역사로만 축소시키는 접근 방식'에 대한 경계만으로 문제가 해결될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근대 관료제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지원하던 절대 왕정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근대 관료제는 자본주의적 역사로 '환원해서는 안 될' 별개의 독립적인 근대의 요소'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반드시 결합해서 분석해야할 역사적 산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요소'라도 배치에 따라(시대에 따라) 얼마나 '요소의 성격'이 달라지던가.
3. 우드사이드가 인용하거나 예시한 한국(정확히 말하면 조선)의 역사적 사례는 좀 더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그간 연구가 많이 쌓였다. 예를 들어, 우드사이드가 인용한 조선 시대 자료로는 유형원, 유수원, 이익, 박지원 등의 문집을, 현대 연구로는 에드워드 와그너, 마르티나 도이힐러, 이기백의 연구가 주를 이루는데, 이들이 좋은 자료이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최선은 아니다. 베트남과 중국 측 자료 역시 같은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대개 소스북이나 논문을 전거로 접근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정밀하지 못한 부분도 눈에 띤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관료제의 조정 기능 부재를 언급했는데, 분명 우드사이드는 조선의 일부 당쟁은 이런 관점에서 살펴봐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07쪽). 그러나 이는 조선 관료제의 조정 기능 부재를 증명하는 논거가 되지 못한다('일부 당쟁'이 해당한다고 했으니, 나의 비약일 수도 있겠다). 논쟁을 해결, 완충, 조정하는 다양한 형태의 제도와 관행이 존재했다. 삼사(三司)의 피혐, 처치, 논계, 관원의 사직, 체직, 심지어는 귀양에 이르기까지 '누가 중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105쪽) '어떻게 중재할 것인가'로 바꾸면 발견될 여러 장치가 눈에 띌 것이다.
또한 관직 부족을 불평하는 이익이나 박지원의 견해를 소개했는데, 역으로, 문과에 급제한 급제자가, 또는 소과의 급제자가 문과의 정원(33명)을 불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왜 그럴까? 또 식년시 외에 별시를 통해 급제자가 양산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관직에 임용될 수 있었는가?
앞서 나는 관료제가 어떤 사회적 기반에서 작동하는가에 따라 '선진성과 위험성'이라는 논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 두 가지 사례만 문제제기 삼아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 조선 양반 사회에서 관직은 출세(현대의 의미에서)이기도 하지만, 직역(職役)의 수행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양반이라는 신분에 부과된 의무의 이행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애초 근대 관료제와 전혀 다른 작동 논리를 내포한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 관료 임용 시험인 외무 고시와 행정 고시가 조선 시대에는 중인(中人)이 지원하던 역과(譯科), 이과(吏科)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우드사이드의 접근 방법이 갖는 문제의 소재를 가늠할 수 있다.
둘째, 만일 동아시아 학자-관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덜 국가주의자였다면? 이는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다. 현재 한국의 관료는 국가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국사 교육 등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국가의 관직'을 떠나서는 먹고살기가 거의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학자-관료는 그렇지 않았다. 국왕과 조정에 대한 상소문의 수사학에 현혹되지 않는다면(물론 그들의 상소가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들의 관직에 대한 태도는 현대 관료와 사뭇 다르다. 나는 전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주자(朱子)의 왕안석(王安石)에 대한 비판을 나름대로 해석할 때였다.
"주자(朱子)에게 '현(縣)'은 중앙 정부의 연장이자 국가 권력의 표현이었다. 곡식이 아니라 돈을 지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돈은 국가에서 통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역시 국가(이 경우는 중앙 집권 국가) 중심의 해결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주자는 시폐(時弊)를 국가 중심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즉 지역(향촌, 마을)의 자발성에 기초하여 해결하지 않는 시도를 거부하였다. 왕안석의 개혁은 곧 국가 권력의 강화, 법제의 강화를 의미하였고, 패도(覇道)로 가는 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자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근대 학자들보다 '국가'에 훨씬 덜 포섭되어 있었다. 사유나 존재 두 측면에서 모두 그랬다. 유가(儒家)는 늘 제도를 말하지만 그보다 앞에 두는 것은 인간의 자발적 동력이다. 이것이 유가가 문명(文明) 일반을 대하는 두 측면이다. 좀 더 두고 논의할 사안이지만, 조선 시대 관료들의 출사(出仕 : 관직에 나아감)에 대한 열망 또는 사회적 책임감이 국가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재지 기반도 그렇고, 이념적 지향도 그렇다.
나라=왕조는 사회의 안정을 위해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관리의 대상, 견제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긴장성을 놓치면 우리는 근대 국민 국가의 전일성(專一性)에 포섭된 채, 아니 그 획일성을 내면화한 관점으로 평가할 것이다. 늘 국가 제도가 공정한 것은 아니며, 또 제도가 공정하게 만들어졌다고 해서 공정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포식성의 측면에서 볼 때 근대국가는 더 심하다."
욕심
종종 역자(譯者)들은 겸손한 경향이 있다. 아마 저자에게 1차 공(업적+책임)을 돌리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역량 있는 역자들은 그 역량을 발휘해줄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저자를 감당할 만한 역자가 번역을 맡았다. 그러므로 역자는 훨씬 더 개입함으로써 독자와 저자 사이를 중개해주어도 좋았을 것이다.
역자는 '옮긴이 서문'을 통해서 책의 가치, 저자의 논리를 가늠해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또 독자들이 생경할 수 있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도록 각주를 첨부하였다. 간간히 내용의 맥락을 잡아주는 각주도 달았다.
욕심인지 모르겠으나, 논의의 맥락을 잡아주는 각주는 늘려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관료주의의 주관성, 현실의 문서화라는 저자의 핵심 논지의 경우가 그러하다. 또 최근 베트남과 중국에서 진행된 관료 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어지간한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저자의 주석만으로 확인이 불가능했다. 또 부지런한 독자가 직접 해당 논문을 찾아본다 해도 언어의 장벽이나 상황의 몰이해 때문에 이해도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실력 있는 역자들이 독자들을 도와준다는 데 마다할 독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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