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암흑의 시대, 절망하라 또 절망하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암흑의 시대, 절망하라 또 절망하라!

[마녀의 '도서관 편지'] 몽테뉴와 슈테판 츠바이크

세밑의 뒤숭숭한 분위기 탓일까요? 얼마 전부터 책이, 책 읽기가 싫습니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책들이 빼곡한데 읽고 싶은 책이 없습니다. 현실을 비판하고 시대를 걱정하는 책들, 불안한 영혼에게 위로와 긍정의 당의정을 처방하는 책들, 혼돈스런 세상에선 과학적·철학적 지식이 힘이라고 역설하는 책들…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것 같은 책들을 멀거니 바라봅니다. 돈이 모든 것인 세상, 정의가 시대착오가 되어버린 세상, 종교는 분노를 탓하고 잠재우며 과학은 자본의 첨병이 되고 철학은 질문조차 생산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저 책들이 무슨 쓸모가 있나, 자꾸 냉소적이 되고 맙니다.

책을 쓴 이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비분강개하고, 진심으로 위로하고자 하며, 진심으로 앎이 힘이라고 믿겠지요. 그래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책을 썼겠지요. 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 그들의 비분강개가 울리는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그들에게 위로받는 영혼이 얼마나 적은지, 그들의 앎에 힘입은 삶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생각하면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의 확신이, 책들이 설파하는 확신과 해답이.

책을 통해 알고 믿고 의지했던 것들이 거듭 흔들리어, 더는 책 속에 길이 있다 말하는 책들을 읽고 싶지 않습니다. 약속한 연재 때문에 도서관을 찾긴 했으나 무기력한 앎을 진실이니 지혜니 포장해온 책에게 싫증이 날 뿐. 결국 도저히 안 되겠다, 연재고 뭐고 다 그만두자, 마음먹고 돌아서는데 반납대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띕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작, <위로하는 정신-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안인희 옮김, 유유 펴냄). '체념과 물러섬'이란 말에 움찔해서 작고 얇은 책을 집어 들고 뒤표지에 적힌 글을 읽는데,

"우리 삶을 더욱 순수하고 아름답고 풍부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 우리의 평화, 독립, 타고난 권리 등이 광신도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몇 안 되는 인간들의 광증에 제물로 바쳐진 그런 시대에, 시대로 인해 자신의 인간성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모든 문제는 단 한 가지로 집중된다. 어떻게 하면 나는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 <위로하는 정신>(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유유 펴냄). ⓒ유유
문장이 가슴을 치고, 떠밀리듯 저는 다시 책의 세계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200쪽이 안 되는 작은 책을 천천히 오래 읽었습니다. 다 읽은 뒤에는 너무 방대해서 읽다가 만 몽테뉴의 <수상록>을 새로 읽기 시작했고, 덕분에 세밑의 소란 속에서도 저는 먹고 자고 읽고 일하며 일상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막막한 한숨이 터져 나올 때마다 츠바이크의 절망과 절망한 지성에게 마지막 위로가 되었던 몽테뉴를 떠올렸고, 그러면 마음이 가지런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편지는 저를 위로한 두 정신 몽테뉴와 츠바이크에게 써야겠지만, 타인의 감사에 아마도 무심할 그들에게 팬레터를 쓰는 게 마땅할까 싶습니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그들에게 어설픈 감사 편지를 써봐야 당신들의 글을 오독했다고 고백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니까요. 그래서 이 편지는 당신께, 저처럼 책에서 답을 찾아왔으나 그 답들에 회의가 들어 이제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세상의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을 찾고 싶은 이에게 쓰기로 했습니다. 아마 몽테뉴와 츠바이크도 그 편을 더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1941년 11월, 망명지 브라질의 셋집 지하실에서 우연히 몽테뉴의 <수상록>을 발견한 츠바이크는 그 기쁨을 전 부인 프리데리케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지금 몽테뉴를 큰 기쁨으로 자주 읽고 있거니와 그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껴요."

그 말처럼 그는 몇 년째 <발자크 평전>(안인희 옮김, 푸른숲 펴냄)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음에도, "모든 자유인의 조상이자 수호성인이며 친구"인 사람, "겉으론 고통스럽거나 영웅적인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나 누구보다 "정직하고 격렬하게 싸운 사람"의 삶을 기리고자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스무 살 때는 몰랐으나 40년이 지나, 파시즘의 광풍에 떠밀려 유럽에서 브라질까지 쫓겨 온 신세가 되어서야 이해하게 된 "스승" 몽테뉴에게 감사를 바치고 싶어서였지요. '야만의 회오리 속에서도 이성을, 사람다움을 보전하는 법을 가르쳐준'(<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로랑 세크직 지음, 이세진 엮음, 현대문학 펴냄) 105쪽) 데 대한 감사 말입니다.

솔직히 젊어서 읽을 때는 잘 몰랐다는 츠바이크의 고백처럼 저도 오래 전 <수상록> 발췌본을 읽고 또 1300쪽이 넘는 완역본까지 사서 조금 읽기는 했으나, "온화하고 잘 정리된 구식의 지혜"라는 인상 이상의 감동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츠바이크의 책을 보니 몽테뉴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를 살았는지, 그가 그 시대의 증오와 야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고투했는지, 그의 부드러운 지혜가 얼마나 치열한 탐색 끝에 나왔는지 비로소 알겠더군요. 그리고 다시 펼친 <수상록>은 전과 다른 책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대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생명에서 훔쳐온 것이다. 생명은 생명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그대의 생명이 끊임없이 하는 일은 죽음을 지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플라톤의 도덕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는 식으로 말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뭐라고 말하나?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 사람을 고문하는 일이 사람을 죽여서 먹는 일보다 더 야만스럽다고 본다. (식인종들이 말하기를) 우리(프랑스인)들 중에 좋은 것을 혼자서 다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집 문 앞에 찾아오는 다른 사람들은 배고픔과 가난으로 바싹 마르고 곤궁하면서 어떻게 이 부정의를 참아낼 수 있는지, 어째서 그들은 다른 자들의 멱살을 잡든지 그 집에 불을 지르지 않는지 대단히 이상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끌어내어 제 자신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 할 수 있다면 아내, 아이, 재물, 무엇보다 건강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이 거기 매이게끔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남이 침범하지 않는 고유한 뒷방을 가지고 그 속에 진실한 자유와 은둔처를 마련해둘 일이다.

그대가 비굴한지 잔인한지, 믿음직하고 착실한지 아는 것은 그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불확실한 추측으로 그대를 짐작한다. 그들은 그대의 기교를 보는 만큼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결에 매이지 마라. 그대 자신의 판결에 매여라.

우리는 어떤 의술을 써도 늙고 병들고 약해지게 되어 있다. 멕시코 인들이 어린아이에게 맨 먼저 가르쳐주는 말은 이것이다. "아이야, 너는 참으라고 이 세상에 나왔다. 참아라, 견뎌내라, 그리고 잠자코 있어라." 어느 누구건 다 당하는 것을 자기가 당했다고 불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 <몽테뉴 수상록>(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동서문화사
1570년 공직생활을 그만둔 몽테뉴는 집 안의 성탑에 서재를 만들고 칩거합니다. 그리고 서재 천장에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새겨놓고, 10년 동안 세상을 등진 채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 무렵 바깥세상에서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하룻밤에 수천 명이 살해당하는 바르톨로메오 학살*이 일어났고 그에 맞선 피의 복수가 계속되었지요. 그런 시대에 한가하게 서재에서 책을 읽다니 비겁한 현실도피가 아니냐고요? 츠바이크를 읽기 전에는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필자 주 :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종교 갈등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왕비의 사주로 가톨릭교도가 신교도인 위그노를 대량 학살한 사건. 파리에서 시작된 학살은 급속히 지방으로 확산되며 최소 3000명에서 최대 7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았다.)

하지만 파시즘이 득세하던 20세기의 도망자 츠바이크는 종교전쟁에 시달리던 16세기의 은둔자를 보며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니, "정신적 독재에 미친 자들,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십 만 명의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들보다 몽테뉴가 더 미워한 것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자신의 지혜로 타인에게 충고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았던 몽테뉴에게서 그는 누구보다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긴 겸허한 정신을 봅니다. 그리고 독재와 야만의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어쩐지 발이 저렸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몽테뉴의 물러남을 마냥 상찬한 것은 아닙니다. 츠바이크가 지적하듯이 몽테뉴 스스로도 자신의 이른 은퇴를 반성하고 십 년 뒤엔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다만 그는 세상일을 할 때도 "내가 무엇을 아는가?"를 물었고,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한계를, 자기 자신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앎 덕분에 자신의 시대에 성실했으되 시대의 광기에 자신을 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1942년 2월, 츠바이크는 몽테뉴에 관한 책을 완성하지 못한 채 부인과 함께 목숨을 끊었습니다. 싱가포르가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독일군이 수에즈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지요. '위로하는 정신' 몽테뉴의 지혜가 시대의 절망을 이기는 데에는 별무소용이었던 걸까요? 글쎄요, 두 스승의 책을 읽고 나니 그리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깊은 절망을 실패나 패배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자유에 대한 희망이 클수록 절망은 깊은 법이니 그이가 절망에서 쉬 헤어나지 못한다 해서 비난할 수는 없지요. 세상을 사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듯 절망을 겪는 방법도 다 다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해야 할 것은 온전히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고 생각하는 것, 타인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나를 모르고 우리를 어찌 알겠으며 우리를 모르면서 상대를 어찌 알겠습니까.

당신께 편지를 쓰지만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어떤 마음으로 읽을지도 알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할 수 없지요. 그래도 제가 이 편지를 쓰며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한 줄기 촛불과도 같은 질문을 얻은 것처럼, 당신도 책에서 그런 위로를 얻고 빛을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새해가 지금보다 나은 나를 꿈꾸는 희망으로 설레기를 기원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