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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한 인간들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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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한 인간들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2012 '올해의 책'] 루이자 길더의 <얽힘의 시대>

'프레시안 books' 송년호(121호)는 '2012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2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올해 읽은 책 제목을 쭉 훑어보았다. 각종 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여기저기서 많이 언급된 책을 제외하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 몇 권 있다.

우선 '올해의 소설'은 돈 윈슬로의 <개의 힘>(김경숙 옮김, 황금가지 펴냄)이다. 이 소설은 '서사의 힘'을 통해서 삶의 진실을 불편하게 드러낸다. 올해 재미있게 읽은 또 다른 소설 <제노사이드>(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황금가지 펴냄)의 순진한 낙관주의가 이루지 못한 성취다. 혹시 올해 인상적인 소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책이 최선의 대안이다.

댄 가드너를 만난 것도 소득 중 하나다. <이유 없는 두려움>(김고명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 <앨빈 토플러와 작별하라>(이경식 옮김, 생각연구소 펴냄) 등이 작년(2011년) 연말과 올해 3월에 연달아 나왔는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화두인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한 그의 통찰은 (동의를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나만 독점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피터 버거의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노상미 옮김, 책세상 펴냄)도 혼자만 읽기는 아까운 책이다. 뼛속까지 보수인 미국 지식인의 지적 여정을 흥미롭게 읽은 까닭은 좌든 우든 '꼴통'들만 가득한 우리나라의 현실과 대비가 된 탓이다. 자신이 책임지지도 못할 말들을 100자, 400자로 인터넷에 쏟아내는 한국 지식인의 소음에 진절머리가 났던 이라면 꼭 챙겨 보시길.

작년 연말에 나온 요시다 타로의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송제훈 옮김, 서해문집 펴냄)도 올해의 책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다. 이 책은 타로의 전작인 <생태 도시 아바나의 탄생>(안철환 옮김, 들녘 펴냄)을 읽고서 쿠바에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현실 감각을 또 쿠바를 북한의 쌍둥이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정치적 상상력을 준다.

▲ <얽힘의 시대>(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부키 펴냄). ⓒ부키
머릿속에 맴도는 책들이 몇 권 더 있지만, 이제 그 중에서 딱 한 권을 선정해야 한다. 고심 끝에 고른 책은 루이자 길더의 <얽힘의 시대>(노태복 옮김, 부키 펴냄)다.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라는 이 책의 부제를 보고서 한숨부터 내쉴 이들이 많을 듯하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지금 한창 정리 중인 기사를 쓰느라 한동안 관심을 끊고 살았던 양자 물리학을 벼락치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책을 손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 과학 책이 아니다. 이 책의 부제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단어는 "양자 물리학"이 아니라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부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수다쟁이가 바꾸는 세상" 정도로.

저자 스스로도 뿌듯했던지, 책머리에 따로 소개한 수다 장면만 봐도 그렇다. 1923년 여름 코펜하겐의 어느 길가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그리고 아르놀트 좀머펠트가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있다. (이 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과학자들인지 감이 안 온다면 잠시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쳐볼 것!)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수다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목적지를 한참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길을 돌이켜 다시 전차를 탔지만 또 목적지를 지나쳤다. 이렇게 그들은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길더는 그들의 수다 내용을 그들의 회고 또 그 즈음에 썼던 다른 편지를 인용해 격조 높게 재구성해 놓았다.

길더는 당시 그 세 사람을 사로잡고 있었던 양자론을 중심으로 수다의 내용을 채워 놓았지만, 전차를 타고 수차례 왔다 갔다 하면서 그들이 했던 대화가 어찌 양자론뿐이었겠는가? 과학계의 뒷 담화, 아내의 험담 혹은 최근에 만난 매력적인 여성에 대한 은밀한 고백, 최근 개봉한 영화 이야기 등이 오히려 수다의 주된 내용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와 같은 온갖 종류의 수다를 통해서 이 책이 주목하는 알쏭달쏭한 양자 물리학의 세계가 열렸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20세기의 가장 전위적인 문화가 꽃 피울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책은 과학 책으로 포장된 일종의 '수다 예찬'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의 삶이 이토록 지리멸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수다의 부재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수백 만 명이 인터넷에서 재잘거리는 시대에 무슨 수다 타령이냐고 쌍심지를 켜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명사라는 사람들이 지껄여 놓은 독백이나 자기들끼리 찧고 까부는 얘기를 여기저기 퍼 나르면서 '좋아요!' '싫어요!'나 남발하는 게 어찌 수다란 말인가?

올해 1년을 돌이켜 보면, 나 역시도 제대로 된 수다를 떠는 즐거운 경험을 많이 하지 못했다. 수다가 없으면 관계가 사라진다. 그리고 관계가 없으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새해에는 제발 골방에서 나와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수다를 떠는 즐거운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정말 입 꾹 다문 의뭉스러운 인간들은 다 지옥으로 보내 버려야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책 제목도 '얽힘의 시대' 아닌가. 새해에는 좀 얽혀 보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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