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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망치는 전문가! '우리'가 바로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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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망치는 전문가! '우리'가 바로잡자!

[프레시안 books] 대니얼 리 클라인맨의 <과학, 기술, 민주주의>

이야기 하나. 1980년대 중반, 세계 의료 연구 분야를 선도하는 미국의 국립보건원(NIH)은 연구 제안서의 평가 책임을 맡은 자문위원회에 의료 분야 전문가만이 아니라 환자 단체와 같은 소비자들도 참여시키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과학자들이 연구 제안서의 기술적 장점에 대한 판단을 내리면, 이어서 과학자와 일반인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앞 단계의 과학적 평가뿐 아니라 국립보건원의 우선순위와 사회적 고려에 근거해 특정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예산 지원 여부를 결정했다.

이야기 둘.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생명공학 내지 DNA 재조합 연구의 잠재적 위험을 놓고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는데, 많은 경우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도 생명공학에 대한 지침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1970년대 중반에 DNA 재조합 연구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뜨거워지자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는 DNA 재조합 연구에 대한 규제 가이드라인을 논의하기 위한 실험심사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여기에는 과학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다수 참여하였다.

이야기 셋.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의 토론 과정에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합의회의'라고 불리는 시민 참여 제도가 활발히 시행되고 있다. 합의회의는 선별된 보통 시민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논쟁적이거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적, 혹은 기술적 주제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질의하고 그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답을 청취한 다음 이 주제에 대한 내부의 의견을 통일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는 시민 포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민과학센터의 주도로 생명 복제, 유전자 변형 작물(GMO), 핵 발전 중심의 전력 정책의 미래 등을 주제로 한 시민 합의회의가 개최된 바 있다.

이야기 넷. 1970년대 후반 자신들 주위에서 많은 수의 아이들이 백혈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의 한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음용하는 식수와 백혈병 사이에 일정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정부 관리들에게 조사를 의뢰하였으나 번번이 무시당하자 의학적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일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백혈병의 원인 규명 작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주민 주도 역학 연구는 전문가들만이 질병 역학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전통적 역학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으로, 후에 학자들에 의해 '대중 역학(popular epidemiology)'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과학, 기술, 민주주의>(대니얼 리 클라인맨 엮음, 김명진·김병윤·오은정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이야기 다섯. 전통적으로 에이즈 치료 연구(실험 설계와 자료 수집 등)는 자격증 있는 과학자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비전문가인 에이즈 치료 활동가와 환자 단체도 에이즈 관련 의학 지식의 생산 과정에 성공적으로 참여하였다. 에이즈 치료 활동가는 임상 자원자의 확보를 용이하게 하고 과학 지식 생산의 도구를 향상시켰다. 그 결과 기존의 의학 전문가조차도 이들이 에이즈 환자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임상시험의 절차나 방법을 새롭게 설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궁극적으로는 에이즈 의학 지식의 생산에도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에 제시된 다섯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다섯 개의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전문성을 특징으로 하는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시민 참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앞의 세 이야기는 과학기술 정책 영역에서의 시민 참여 경험을 말해주고 있고, 뒤의 두 이야기는 과학 지식의 생산 영역에서의 시민 참여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다섯 개의 이야기들은 대니얼 리 클라인맨이 엮은 <과학, 기술, 민주주의>(김명진·김병윤·오은정 옮김, 갈무리 펴냄)가 던지는 핵심적 메시지, 즉 과학기술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로서 제시되고 있다.

사실 오랫동안 과학기술은 전문가주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전문가주의란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상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과학기술만큼은 그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에 의해 논의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믿음 체계를 의미한다. 전문가주의를 신봉하는 주장에 따르면 아무리 민주주의가 진전될지라도 과학기술은 진리성 여부에 따라 그 분야의 전문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지, 대중 참여와 같은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되는 예외적 존재라는 것이다. 요컨대 과학기술만큼은 민주화 논리가 아니라 전문화 논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이미 85년 전에 사회의 기술적 복잡화에 따른 전문가 집단의 득세와 일반 시민의 소외 심화 그리고 종국에는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 가능성을 날카롭게 경고한 바 있다. 그의 경고는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지난 20세기를 돌이켜 보면 겉으로는 사회의 민주화가 점차 심화되고 확산되어 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 자체가 더 기술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으로 변모하면서 일반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적 의사 결정에서 점차 소외되고 오로지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그러한 의사 결정 과정을 독점하는 비민주성이 동시에 증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어 왔다. 정치철학자 랭던 위너도 이제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하나의 입법과 같이 시민들의 삶을 압도적으로 규정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갈파한 바 있지만, 문제는 시민들의 생사여탈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 입법 과정이 오로지 전문가와 기술 관료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전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특히 노무현 정부 때에 과학기술 정책과 관련해서 시민 참여에 대한 논의와 그 실천들이 이루어졌지만 일반적으로 과학기술자와 기술 관료들이 시민 참여에 대해 갖는 거부감은 매우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역시 시민 참여에 대한 거부의 논리로 항상 등장하곤 하던 담론은 과학기술 예외주의와 전문가주의였다. 한 마디로 과학기술은 그것을 잘 모르는 무지한 일반 대중들이 참여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자와 기술 관료들이 마지못해 시민 참여를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그들이 선호하던 방식은 사실상 매우 형식화된 참여 방식이거나, 시민을 참여의 주체가 아니라 교육받아야 할 피교육 대상으로 간주하는 계몽주의적 참여에 국한하고자 하는 속내를 별로 숨기려 하지 않았다.

과연 과학기술은 민주주의와는 한 참 거리가 먼 예외적 존재이며, 전문가만이 발언할 수 있는 영역인가? <과학, 기술, 민주주의>에 실려 있는 여덟 편의 글들은 이 질문에 대해 입을 모아 단연코 아니라고 답한다. 이 글들은 하나 같이 일반 시민들이 어떤 식으로든 과학기술과 관련된 의사 결정, 또는 지식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과학기술 영역에서 시민 참여가 왜 필요하고,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풍부한 예들과 함께 과학기술학(STS)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되어온 이론적인 논의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서로 다른 사례를 다루고 조금은 상이한 학문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글의 저자들이 일단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것은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시민 참여, 넓게 보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민주주의가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공적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제도라면, 과학기술이 입법과 같이 우리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그것을 민주적인 통제를 통해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과학기술 시대의 새로운 민주주의 규범으로 당연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에 대해 시민들이 민주적 통제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사회적,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쪽의 민주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민주화 주장은 대중 투표와 같은 다수결 원리로 특정 과학기술 지식의 진위를 결정짓자는 식의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시민 참여가 규범적으로 가치 있고 필요하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과학기술이라는 전문성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하면 참여 자체가 불가능할 텐데 과연 그러한 전문성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시민 참여를 가능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원론적인 민주주의 당위성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기술 영역에서 실제로 시민 참여를 가능케 해줄 수 있는 '시민 지식(lay knowledge)'의 의미와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시민 지식이란 일반 시민들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의 경험과 통찰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으로서 암묵적 지식의 형태로 축적되는 특성을 갖는데, 때로는 전문가 지식보다 문제 해결에 더 많은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문가의 지식은 주로 교과서나 실험실에서의 탐구 활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임에 반해, 일반인의 지식은 주로 삶의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러한 환경에 오랫동안 놓여 있던 일반인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지식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시된 사례들 중에서 대중 역학의 사례와 에이즈 활동가들의 사례가 여기에 직접적으로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국립보건원 자문위원회, 케임브리지 DNA 재조합 실험심사위원회, 합의회의의 사례에서 등장하는 시민 참여도 기본적으로는 전문가가 아닌 시민으로서의 삶의 경험과 통찰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든 시민 참여의 기저에는 시민 지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정치 및 사회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있는 뿌리 깊은 신화 중의 하나는 과학기술과 같은 전문적 영역에 대한 시민 참여는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학, 기술, 민주주의>에 실려 있는 여덟 편의 글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비록 전문성을 특징으로 하는 과학기술 분야라고 해서 그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반 시민들도 자신들의 삶의 경험 속에서 축적한 나름의 전문성과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정책과 관련된 논의과정에, 혹은 과학기술 지식의 생산과정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참여를 통해 더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이 책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원래 2000년에 출판된 것을 번역한 것이라 지난 10여 년 사이 과학기술과 시민 참여 및 민주주의의 주제를 둘러싸고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성과들을 담아내고 있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 주제를 이해하는 데 입문서로서는 손색이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이 책은 오랫동안 이 분야를 공부해 오던 이들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읽힌다는 점도 이 책이 지닌 장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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