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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마릴린 먼로·다이애나 비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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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마릴린 먼로·다이애나 비의 공통점?

[프레시안 books] 정국의 <섹슈얼 트라우마>

지난 8월, 나주에서 일어난 7살 여자아이에 대한 잔인한 성폭행 사건이 언론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언론은 아동을 납치, 강간하고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을 시도했던 가해자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했고, 끔직하고 잔인하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그 놈'의 평소 아동포르노에 심취해왔던 반사회적이고 공격적인 기질에 여론적 공분이 집중되었으며, 약 한 달 뒤 경찰청장은 아동 포르노 대책팀을 꾸려 아동 음란물과 성인PC방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대응은 그리 낯설지 않다. 2006년 용산초등학생 성폭행 살해사건이 있었을 때도, 2007년 안양초등학생 납치 살해사건이 있었을 때도, 2009년 한 언론을 통해 일명 '조두순 사건'이 언론화되었을 때도, 2010년 '김길태 사건'이나 '김수철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의 관심은 비정상적인 가해자에게 집중되었고, 정부나 국회는 이 '현대사회의 괴물'을 어떻게 미리 발견하고 격리할지에 대한 대책에 골몰해왔다. 이러한 대중의 분노가 순수하고 약한 아동이 경험한 끔찍한 피해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피해아동이 ※트라우마(trauma)에서 어떻게 회복되고 있는지, 사회로 어떻게 다시 통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 외상이라 번역되는 트라우마의 사전적 정의는 "폭력에 의해 생겨난 상처, 혹은 지속적인 파급효과를 가지는 정서적 쇼크"이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용어로서 트라우마는 그보다는 넓은 의미로서 "폭력이 가해진 심리적 상처로서 지속적인 파급효과를 미치는 일이며, 이 때 지속적인 파급효과란 생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트라우마에는 그 지속적인 파급효과로서 과거가 현재 속으로 끊임없이 침윤(intrusion)함으로써 일어나는 침습적이고 회피적인 증상의 결합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도 포함된다. (Jon G. Allen 저, 권정혜 외 공역, <트라우마의 치유>, 2010, 학지사, 24-25면.)

사실 아동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은 몇 가지 전제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첫째, 아동 성폭력은 아동에 대해 비정상적인 성애를 가진 반사회적인 가해자에 의해 일어나는 아주 특수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격리하게 되면 아동 성폭력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둘째, 그 어리고 순수한 아이가 피해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은 대중적 분노의 가장 핵심적인 원천이다. 이 두 번째 전제는 첫 번째 전제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가해자가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형상화될수록 아동의 피해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아주 특수한 경험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가정할 때에 사람들의 관심은 피해자의 회복이 아닌 가해자의 처벌에만 집중되며, 피해자는 결국 자신의 피해경험을 평생 숨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피해는 말할 수 없는 경험으로서의 트라우마가 된다.

▲ <섹슈얼 트라우마>(정국 지음, 블루닷 펴냄). ⓒ블루닷
30년간 정신과 개업의로 수많은 성적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상담해 온 정국 교수의 <섹슈얼 트라우마>(블루닷 펴냄)는 이러한 전제들에 대한 실증적인 도전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트라우마에 관한 저서들은 주로 전쟁이나 역사적인 경험에 기초한 트라우마 내지 다양한 트라우마의 심리학적 치료에 집중되어 있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성학대 환자들의 치료와 연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된 이 책은 성폭력과 가정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치유에 대해 소개했던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최현정 옮김, 플래닛 펴냄)에 이어 다양한 트라우마 중 성적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중요한 의미는 성적 트라우마를 단순한 질병이거나 특별하고 특수한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일 뿐 아니라 "인간사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성적 트라우마가 전 세계 3분의 1 이상의 인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아동 성폭력이나 성 학대에 대한 다양한 통계자료를 통해서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각종 연구들을 통해서도 뒷받침되듯이, 아동기 성적 트라우마의 경험은 낯선 비정상적인 소아성애자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친밀하거나 평소에 알고 있는 정상적인 주변인에 의해서 그리고 대부분 (안전하다고 상상되는) 집 안이나 주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단지 성적 트라우마가 우리 사회와 문화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반복하는 것을 넘어, 불편하지만 불가피한 진실인 "성 학대는 예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이렇게 성적 트라우마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점을 인정할 때에 사회가 성적 트라우마의 경험을 단지 피해자에 대한 사형선고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갖는 다층적이고 복잡하며 풍부한 결들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성 학대 피해자들이 그 피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피해 '때문에' 유일한 인간이 되었다."

<섹슈얼 트라우마>는 전반부의 상당한 지면을 통해 성적 트라우마가 회복될 수 없는 고통과 상상할 수 없는 분노, 그리고 인간됨의 상실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창조적이며 타인과 사회, 세계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를 탄생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 저자에게 성적 트라우마는 "인간 드라마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본질적인 부분"이며, 또 다른 생의 경험이자 인간됨의 조건들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1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예카테리나 2세, 하워드 휴즈(미국 투자자 및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엘리노어 루즈벨트, 오프라 윈프리, 마릴린 먼로, 다이애나 비, 프란츠 카프카나 루이스 캐럴과 같은 유명인들 혹은 찰리 맨슨 등과 같은 연쇄살인범의 알려지거나 추정된 성적 트라우마의 경험들을 상세히 추적해나가면서, 저자는 성적 트라우마가 가진 "자기 파괴 및 사회 파괴의 극단에서부터 평범한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제한 없는 창조력, 예리한 통찰력,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 강한 에너지와 추진력, 심오한 성취의 극단까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근대 미국사에서 의미있는 하위문화로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나 비트족, 히피족을 이끈 작가나 사상가들의 경계를 넘어서는 추동력 역시 성적 트라우마의 경험으로부터 추출해낸다.

비록 저자가 그들 모두의 독특한 심리적, 성격적 특성들이 아동기에 경험했던 성적 학대로부터 출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완벽히 제공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트라우마의 부정적이고도 긍정적인 힘들을 사회적 영향을 추동해낸 요소들로 해석하는 저자의 시도는 기존의 성적 트라우마에 대한 서술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데에 일조를 하고 있다.

저자가 두 번째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전제는 바로 회복할 수 없는 피해이자 경험으로서 성적 트라우마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책 중반부, 그리고 후반부에서 성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들이 어떻게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경험을 잘 해결함으로써 성적 트라우마의 긍정적 특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성 학대 환자들의 치료 경험을 통해 밝히고 있다.

성적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들의 경험에는 단지 그 당시 성학대의 충격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의 부정과 침묵, 비밀스럽고 금기시하는 태도, 사회적 낙인과 시선들은 피해자들을 더욱 위축시키고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게끔 하는 기제가 된다. 성적 학대의 경험을 '말할 수 없는' 망각된 기억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을 '회복할 수 없는 피해'로 바라보는 사회이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성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재구성한다.

"성 충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공허한 인간이 없다. 고통과 번뇌와 갈등은 인간 고유의 감정이다. 그것을 잘 해결함으로써 인간의 심오함과 예민함, 깊은 연민의 사랑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성 학대로 인한 고통과 분노, 상실의 경험을 당연한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한 혼란과 불안, 성적인 문제 등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얻은 풍부한 통찰력과 예민함을 찾아내어, 이를 바탕으로 평범한 사람이 도달하지 못하는 새로운 지평과 경계를 여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성적 트라우마의 치유의 과정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아동 성폭력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여전히 아동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대응은 낯설고 비정상적인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사회 격리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사회적인 문제로서 성적 트라우마의 아주 일부분만을 다룰 뿐이며, 여전히 성적 학대에 노출된 개별 피해자들의 다양한 고통과 사건 이후 피해자들이 겪게 되는 트라우마의 경험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성적 학대나 성폭력의 경험과 성적 트라우마의 치유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책의 후반부에서 상세히 서술되어 있는 성적 트라우마 치료단계에 대한 소개는 우울증, 각종 인격 장애, 공항장애, 정신 분열 등 각각 별개의 정신질환으로만 다루어져왔던 문제들에 대해 성적 트라우마의 범주를 통한 치유의 방안을 제시한다.

물론 <섹슈얼 트라우마> 역시 성 학대 피해자들의 심리적 치유라는 한 측면만을 집중하여 성적 트라우마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사회적 문제로서 성적 폭력에 대한 다른 측면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최근 우리 사회의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빠져있는 그림을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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