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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이 만든 연백평야 물값 시비, 그 진상은?

[해방일기] 1947년 11월 7일 : 38선 이야기 ③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쫙~ 그은 38선은 크고 작은 숱한 문제를 가져왔다. 마을 한가운데를 38선이 가로질러 이쪽은 이남 저쪽은 이북이 되는 일, 심지어 38선에 딱 걸친 집 같으면 안방과 부엌은 이남에 있고 건너방과 뒷간은 이북에 있기도 했다. 미-소 양군 진주 후 경계 지역을 함께 답사하며 실제 경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마구 잘라놓은 경계선이 일으킨 구조적 문제의 단적인 예가 연백평야의 수리(水利) 문제였다. 조선 시대의 연안과 배천을 합쳐 일제 초기에 만든 연백군은 황해도의 동남부, 개성과 해주 사이의 해안을 낀 군이었다. 북쪽의 산악 지대에서 남쪽의 해안선으로 내려오는 북고남저의 지세인데, 남쪽의 연백평야는 조선에서 손꼽히는 곡창 지대였다.

연백평야의 대부분이 38선 남쪽에 있었다. 그런데 연백평야가 곡창 지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38선 북쪽 구릉 지대에 있는 저수지들 덕분이었다. 그중 구암저수지는 당시 조선 최대의 저수지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었다. 평야와 저수지의 관할권이 달라진 이제, 수리비 얼마를 누가 누구에게 지불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해방 당시에는 벼농사의 물 필요가 이미 채워져 있었다. 그 해 가을에는 아무도 수리비를 지불하지 않았다. 원래 수확 후에 수리비를 지불하게 되어 있는데 평야를 점령한 미군은 수리비를 거둬 북쪽으로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 모내기 때가 되어서야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북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작년 수리비를 내지 않은 농지에 물을 보내지 않기로 지역 임시인민위원회가 결정한 것이다. 제1차 미소공위가 아무 성과 없이 무기정회에 들어선 한 달 뒤의 일이었다.

"38선의 비극 또 하나! 연백에 통수(通水) 거절코 백미 4만5000석을 강요"

지난 달 돌연 수원지가 38선 경계선에 있는 연백군 괘궁면 구암리의 연백수리조합에 38 이북 인민위원회로부터 통수를 거절하여 왔다. 즉 이 수리조합 수원지는 38 경계선에 있는데 돌연 경계선 이북에 있는 인민위원회에서는 소련 주둔군을 충동하여 저수지의 수문지기를 내쫓은 다음 수문지기의 가옥을 빼앗고 38 이남의 모판으로 나가는 물꼬를 막아버린 것이다. 물꼬를 막아버릴뿐더러, 물이 필요하면 백미 4만5000석을 내놓으라고 무리한 요구를 제시하여 수백 농민에 우려와 큰 고통을 주고 있다.

이에 수리조합원들은 누차 모여 토의한 결과 그와 같이 많은 백미를 보낼 것이 없는 만큼 당지 미군정당국에 진정하여 원만 해결책을 바라는 한편 나날이 말라드는 모판만 들여다보며 38 이북 측이 회심하여 물꼬를 터놓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만약 이 이상 더 물꼬를 안 터놓는다면 곡창 연백평야는 도리 없는 백지건답(白地乾畓)이 될 것으로 이 지방 민심은 날로 흉흉하여지고 있는 터이다. (<동아일보> 1946년 6월 10일)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기사가 열흘 후에 나왔다.

"연백수리조합 용수 거절 해결"

연백수리조합 저수지는 38 이북에 있는데 그편 인민위원회와 소군 측에서는 이앙기를 앞두고 백미 4만5000석을 안 주면 용수를 거절하겠다는 사실에 대하여 러치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백군의 군정관과 연백수리조합장(조선인)은 이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다고 나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우기 중에는 급수의 필요가 없으므로 급수 않기로 양방이 동의하였으며 필요한 때는 곧 급수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6년 6월 20일)

과연 어떻게 해결된 것인지는 알아볼 수 없는 기사다. 1946년 중에 수리비 문제가 다시 제기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북 측을 만족시켜 줄 무슨 조치든 취한 것일 텐데, 이북 측에 대한 어떤 양보도 굴욕으로 여기던 미군정 측이 그 조치 내용을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1947년으로 들어서면서 수리비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정조(正租) 80만 석 어찌되나-문제의 연백수리조합"

정조 80만 석을 생산할 수 있는 조선 제일의 연백수리조합은 해방 이후 38선에서 양단되어 구암저수지를 잃은 이남 1만3600정보의 몽리 면적에 대한 용수 문제가 해마다 말썽을 일으켜오던 바 춘경기를 앞두고 다시 큰 두통거리로 등장하여 관계 수십만 농민들을 우울에 잠기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관계 당국에서도 그 대책을 고려 중이던 바 지난 1월 11일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농림국장으로부터 하지 중장에게 과거 2년간 수리조합비 309만6000원과 작년 수해로 파손된 저수지 복구 공사비 900만9000원을 보내줄 것과 금년 수리조합비 544만 원은 금년 말에 청구할 터이니 이에 대한 조처를 1월 말일까지 회신하도록 OO서신이 온 것이 요즈음에야 경기도 농림국에 회부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도 당국에서는 지난 17일 평양에 대표를 파견하여 원만 토의할 것을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관에게 보내었으나 아직 하등의 회신이 없으므로 앞으로 어떻게든지 해결되어야 할 이 문제는 관계자들을 더욱 초조케 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22일)

"문제화한 연백수리조합-해결의 열쇠는 경기도 대표 파견에"

조선 제일이라고 하는 연백수리조합 용수 문제에 대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부터 하지 중장에게 1월 말일까지 하등의 조처가 없으면 문제의 책임은 오로지 하지 중장에게 있다는 서신이 있었다 함은 작보한 바와 같거니와 북조선 소련군당국과 인민위원회 지방 당국에서는 지난 2월 11일부터 14일까지 전후 4일간 문제의 구암저수지 현장에서 남조선 대표들과 연석 현지회의를 열고자 정식으로 연백수조 당국자에 전달된 바 있었는데 경기도 당국에서는 대표 파견을 보류하게 되어 연석회의가 성립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2월 22일에 다시 구암저수지 현지에서 남북 대표가 모여 수해로 파손된 저수지 복구 공사에 대한 제2차 연석회의를 열기로 되었는데 역시 경기도 당국에서 대표를 보내지 않아 회의를 열 수 없이 된 사실이 요즈음에야 판명된 것으로 보아 남조선에서 지난 17일 대표를 평양에 파견할 것을 소련군사령부에 교섭하였으나 아직 하등의 회신이 없는 것은 전번 2차의 회담에 남조선 측의 성의가 전혀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하등 소식이 없는 것으로 추측되므로 앞으로 어떻게든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므로 관계자들의 절대한 성의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 요망되어 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24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연초에 하지 사령관에게 서신을 보내 1월 말까지 조처를 요구했으나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그 서신을 관계 부서에 보내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는 소련군만을 상대로 인정하고 임시인위의 존재를 묵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의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현지 차원에서 대책을 강구하자고 2월 중 두 차례 현지 회의를 제안했으나 이것을 경기도 당국이 묵살했다. 그리고 경기도 대표가 평양에 가서 의논하자고 소련군사령부에 연락을 취했는데, 이것은 소련군 당국이 묵살했다. 이남의 미군정은 북조선임시인위를 무시한 채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인데, 소련군 측에서는 임시인위 소관의 일이니 자기네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5월이 되어 모내기철이 다가오니 이 문제를 그런 식으로 내버려둘 수 없게 되었다. 이북 측이 5월 3일부터 일단 물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협상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연백평야의 관수(灌水) 남북 당국 간 타협 해결"

오랫동안 난관에 부닥쳐 있던 연백평야 수리 문제는 남북 양 당국자 간의 건설적인 타협으로 지난 3일부터 관수되고 있어 당지 20만 농민들은 환희 속에 기경(起耕)을 시작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이번 관수는 잠정적이라 앞으로 또다시 단수될 염려도 없지 않다는 바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관수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이 제시되었으므로 경기도에서는 가급적 타협안을 수리하여 연간 80만 석의 옥답을 생산 증강에 추진시키리라 한다.

1. 제방 수축용 시멘트 1만8000포대를 해주에서 출하여 청단까지 수송하되 경기도에서 담당 운반할 것.
2. 청단-구암 간 전화 공사를 시설할 것. (<경향신문> 1947년 5월 7일)

5월 23일 현장에서 회담이 열렸다. 아래 기사에 이남 대표는 어느 기관 소속인지 밝혀져 있는데 이북 대표는 밝혀져 있지 않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쪽 대표였을 것이 빤한데, 부득이해서 그를 상대로 회담하면서도 그 사실을 가급적 감추고 싶었던 것 같다. 이남 대표 중 군정청 2명이라 한 것은 1947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경기도 앤더슨 고문과 이용근 농림국장이었다. 군정청의 '조선인화(Koreanization)' 방침에 따라 '고문'이란 직함을 쓰고 있었지만 앤더슨 소령이 사실상의 도지사였다. 미군정 간부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상대로 회담에 나서는 것은 미군정이 극력 회피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이쪽이 아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담에 임했던 것이다.

"연백수조 또 말썽-이북서 쌀 3만3000석 요구"

38선으로 양단된 연백 수리조합 문제는 그 동안 많은 물의를 빚어내어 오던 중 드디어 지난 23일에 남북 양 당국 대표가 연백수조 사무소에 모여(이남 대표 군정청 2명, 경기도 2명, 연백군과 수조 측 각 1명) 근본적 해결책을 토의한 바 있었는데 이번 회담에서 이북 측은 종래에 요구 중인 수세의 대가로 백미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즉 1단보 3원50전 계산으로 38 이남 소재 몽리 총면적 1만3000여 정보에 대한 총액을 8·15 이전 백미 공정 가격 1두 4원40전의 비율로 환산하여 1년분 1만1000석, 1945년 이래 3년간 총계 3만2000여 석을 요구하여 왔다고 한다. 이번 회담에서 이북 측이 1945년도분 1만1000석을 요구한 것은 매우 주목되는 바이어니와 이남 측 대표는 예기치 못한 이북 측의 요구로 말미암아 오는 6월 3일경까지 이에 대하여 회답할 것을 약속하고 지난 24일 일단 퇴정하였다는데 이번 회담에서 구암저수지 수축 문제만은 남북 몽리 면적의 비례에 따라 각각 공사비를 부담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8일)

5월 23~24일 회담에서 이북 측의 물값 요구에 확답을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연백수조 문제 쌀로 수세 지불"

경기도에서는 연백수리조합 수세에 관한 이북 측의 요구에 대하여 수차 신중 협의한 후 지난 2일 외무처를 통하여 회답을 보내었는데 경기도로서는 이북 측 요구의 수세 백미 연 1만2000석은 너무 과대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이 수세가 결정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북 식량 사정을 참작하여 백미로 수세를 지불할 것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7년 6월 6일)

모내기철의 회담에서 만족할 만한 합의가 있었기에 그 해 내내 물 공급이 원활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확철에 이르자 수세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6월 초에 이북 측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보낸 회답이 확고한 것이 아니었던가?

"문제의 연안수조 북조선의 과대 요구로 양측 협의 또 결렬"

[연안에서 김호진 본사특파원 발] 곡창 황해도의 연백수리조합 수세 문제는 해방 이후 3개년 동안 남북 간에 수차의 회합이 있었으나 해결을 못 보고 있던 중 지난 19일 하오 0시40분부터 연안군 수리조합 회의실에 북조선 측에서는 깨지쓰 소련군 소좌 외 1명 이순근 북조선인민위원회 농림부장 외 2명 그리고 남조선 측에서는 경기도 미인 군정관 앤더슨 소좌 옴스테드 고문관 이용근 농림국장 외 수 명의 남북 대표가 모여 토의한 결과 1년분 수세로 소련 측에서 백미 1500톤(약 1만 석)을 요구한 데 대하여 남조선 측에서는 관리비로 150톤(약 1000석)을 주겠다고 하다가 200톤까지 남조선 측에서 제의하였으나 끝끝내 북조선 측의 고집으로 회의는 하오 7시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3일)

6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에서 이북 측 요구 1만2000석이 과대하다고 보면서도 "이북 식량 사정을 참작하여"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약 1만 석이 너무 많다고 하여 회의를 결렬시켰는데, 그게 정말 너무 많은 것이었을까?

5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수세 책정 기준이 밝혀져 있다. 해방 전 제도와 관행에 맞추어 책정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기사에서 연백평야가 80만 석을 생산하는 곡창이라 했는데, 그 대부분이 이북 저수지에서 보내는 물에 의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몽리 지역에서 줄잡아 50만 석을 생산한다면 1만 내지 1만2000석은 그 2~2.5퍼센트다. 수세로 높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남 측에서 제의했다는 약 1000석은 어떤 기준으로 책정한 것인가? 관리비로 주겠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인 기준을 알아볼 수 있는 다른 기사가 있다. 9월 26일 한민당 선전부에서 유엔총회 조선 대표로 이승만을 보내자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 담화문 중에 연백수리조합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한민당 담-UN총회 대표에 이 박사 추대는 현명"

한편 연백수리조합 용수료 문제로 남북 당국 간에 타협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유감인 동시에 38선 이남 농지의 몽리 면적은 1만3000여 정보인데 그 용수료로 정미 1만 석을 요구한 이북 당국의 태도는 너무 무리하며 이북 저수 면적의 수확고를 추산하고 5할인 2000석까지 양보한 이남 측의 주장은 당연한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7일)

저수지에 물을 채우지 않고 그 면적에 농사를 지을 경우의 수확고를 추산해서 그 절반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기발한 착상이다. 이런 사람들, 자동차 살 때 차에 들어간 철 500킬로그램, 고무 20킬로그램, 유리 2.5킬로그램 식으로 재료값만 받으라고 할 사람들 아닌가?

38선 이야기는 이 정도로 일단 접어둔다. 세 차례 이야기를 했지만 실제로 38선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겪은 고통 중 빙산의 일각도 보여주지 못했다. 다만 38선이 일으키는 고통을 줄이는 일에 미군정이 얼마나 성의가 없었는지라도 보여줄 수 있었다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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