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왕조가 왕을 천자(天子)로 일컫고 왕조를 하늘의 왕조인 천조(天朝)라고 불렀으며, 특히 조선이 임진왜란 때 도왔던 명나라를 천조로 부른 것에서 기원을 짚는 이들도 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왔듯 한국 전쟁 때 남한을 도운 미국 역시 천조로 불릴 만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여러 기원이 분분하지만 인터넷에서 천조국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으로 보건대 이들 중 역시 첫 번째 기원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친미적이고 우파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북한이 군사적 행동을 보일 때 미군이 운용할 수 있는 병력 규모를 찬양하면서 "오오 천조국"이라고 감탄하는 글들을 볼 때 특히 그렇다.
▲ <적을 삐라로 묻어라>(이임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
미 극동사령부(Far East Command, FECP는 전쟁에 참여하면서부터 휴전될 때까지 전선과 후방에 "무려 40억 장의 전술 및 전략" 삐라를 뿌렸다. 유엔군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 주민과 북한군에게 20억 장 이상의 전단을 살포했다. 최고 절정기의 제작량은 매주 2000만 장 이상이었다.
유엔군이 살포한 전단은 1950년 10월 말에 1억 장을 돌파했고 다음해 1월 26일에 2억 장을 돌파, 동년 11월 16일에는 8억 장을 돌파하고 휴전 성립 때까지의 총량은 25억 장을 넘었다.
삐라 25억 장은 펼치면 한반도를 스무 번 뒤덮고, 지구를 열 바퀴 돌고도 남는 양이었다. 그런데 육군 심리전감실과 국방부 자료에는 40억 장이라고 한다. 이는 지구 열여섯 바퀴, 한반도를 서른두 번 덮을 양이다. 1950년 세계 인구가 약 25억 명이었으니 한 사람에게 두 장씩 나누어줄 수 있는 양이었다. (11쪽)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초등학교를 다녔던 내게도 삐라의 추억이 있다. 도덕 교과서에서 북한 정권의 폭정을 배우고 반공 포스터를 열심히 그렸지만 북한이라는 국가의 실체가 판타지 소설 속 악마의 나라만큼이나 실감나지 않던 어린 시절, 동급생이 몰래 보여주었던 삐라는 실체감 없던 북한의 존재를 상기시켜주던 마법의 아이템이었다. 그것을 보고 "아, 북한이 진짜 있는 나라였구나. 삐라라 불리는 이 종이 쪼가리가 그곳으로 부터 왔구나" 하고 북한의 존재를 되새길 수 있었다.
선생님께 삐라를 갖다 주고 학용품을 받기 전, 그 아이는 어른들로부터 삐라를 선생님께 바로 갖다 주어야지 다른 아이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들었다며 나에게는 특별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보여준 시간도 너무 짧아 그때 나는 '왜 너는 봐도 되고 나는 봐서는 안 되느냐'고 되물었고 그 아이는 '그게 억울하면 네가 직접 주워서 보라'고 쿨하게 응수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 동안 으슥한 산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그렇게 귀하디귀한 삐라가 이렇게 엄청난 양이 뿌려졌다니 그것도 미국에 의해. 꽤 놀라웠지만 지금의 천조국이 그때부터 천조국이었음을 상기해보면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북한의 것이 아니라 미국의 것이기는 하지만 , 어린 시절의 삐라에 대한 갈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어 좋았다. ) 미국은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거의 전 세계를 아우르는 유럽과 아시아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면서 여러 전쟁 경험을 쌓았다. 그 중 심리전 역시 어느 경지에 도달했음을 이 책에 담긴 여러 다양한 삐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총 5개의 장 중 3장인 '제1장 총력전의 완성, 미국의 심리전', '제2장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가져온 삐라', '제3장 적 이미지와 상징 그리고 기호 만들기'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뿌려진 삐라가 단순한 선전물이 아니라 미국이 여러 전쟁을 치러오면서 쌓아 올린 심리전의 노하우가 총결집된 총아임을 다양한 삐라와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설명한다. 아울러 삐라만으로 한국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덕후'들 중 그 전문도가 다른 분야의 덕후들에 비해 결코 빠지지 않는 '밀덕', 이른바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는 한국전과 심리전에 대한 전문 지식을 업그레이드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상당하다.
잠깐 서브컬쳐 쪽으로 더 뻗어보면 로버트 하인라인의 고전 밀리터리 SF 걸작을 폴 버호벤 감독이 영상화한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1997년)에서 닐 패트릭 해리스 주니어가 맡았던 칼 젠킨스가 수행했던 심리전이 떠오른다. 또 다른 SF 작가 코드웨이너 스미스도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심리전을 담당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 책 <적을 삐라로 묻어라>에도 줄기차게 언급되는 존스홉킨스 대학 산하의 폴 니츠 고등국제대학에서 아시아 연구학 교수를 맡았던 스미스는 1948년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이라는 책을 저술한 바 있고 당연히 한국 전쟁 당시 미8군의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은 심리전에 힘썼고 그만큼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심리전을 구사했다. 그 결과가 한국 전쟁 당시 숱하게 뿌려졌던 삐라들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 대해서 천황은 평화주의자이고 전쟁의 책임은 나쁜 군국주의자들에게 있다는 삐라를 살포하는 심리전을 펼쳤던 미국은 한국 전쟁에서는 한국의 상황에 맞는 심리전을 펼친다. 전쟁 초기에는 원조의 주체로 미국을 선전하다가 미국이 아닌 유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유엔을 평화, 통일, 재건의 이미지로 굳히면서 북한이 선전하던 사회주의 개혁을 폄하하고 소련과 중국을 해방자가 아닌 착취자로 몰아붙인다.
일견 조악해 보이는 삐라지만 들어간 삽화나 문구에 들인 공은 좋게 평가하면 세심하면서도 나쁘게 말하면 교묘하기 짝이 없다. 이런 세심함은 삐라 제작에 현지인 즉 한국인들을 적극 기용하고 포로들을 면밀히 심문하여 얻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으로 더욱 강화되었는데 삐라 제작에 참여하는 것으로 미국의 앞선 심리전을 경험한 화가 김규택, 오천석, 장리욱 등은 이후 한국의 해당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한국 교육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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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든 평시든 국가의 모든 능력이 군대로 이전되는 과정인 총력전에 부응하는 전쟁 지식이 병참학이라면, 심리전은 인간의 심리를 자극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일으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심리전의 효과가 이에 그친다면 근대전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전후에도 심리전은 계속된다'라는 말은 전쟁 동안뿐만 아니라 전쟁 뒤에도 심리전의 효과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심리전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멈추지 않고 사회를 전시 사회로 조직하고 재생산한다. (12쪽)
소련과 중국을 해방자가 아닌 착취자로 몰아붙인 미국의 심리전은 특히 한국 전쟁 당시 직접 병력 지원을 한 중국을 고대와 중세에 한반도를 침략해온 오랑캐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런 중국군과 맞서 싸우는 국군은 연개소문과 화랑, 을지문덕과 이순신으로 거듭난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을 물리친 연개소문
서기 645년에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수륙 30만 명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범했다. 고구려 명장 연개소문 장군은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사를 맞아들여 싸웠다. 이세민은 맹열이 공격했으나 안시성은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두지휘하던 이세민의 왼쪽 눈알에 연개소문 장군의 화살이 박히고 말았다. (…) 이세민은 날세가 추어졌다는 구실로 드디어 퇴군했다. (8289) (376쪽)
그리고 북한군에게는 시조 단군을 등장시켜 한민족을 강조하는 심리전을 펼치는데 거기에는 미군 측에서 분석한 합당한 이유가 존재했다.
삐라 속 북한과 중국이 소련의 열등한 문화를 받아들여 전통의 문화를 파괴했다면 유엔은 오히려 무너진 전통을 새로이 세워야 했다. 전통의 구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서유럽의 기독교 문화처럼 종교적 제전과 습관들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FEC, GHQ. Command Reports, Psychological Warfare Section 1951. 11, RG407 Box 578) 그러나 한반도에는 기독교인이 너무 적어 기독교 교리를 심리전에 이용하기에는 그 효과가 의심스러웠다. 극동사령부는 종교 대신 토착 문화를 강조하라고 했고, 그래서 찾아낸 것이 "한 시조-한 피-한 민족"라는 '단일민족' 담론이었다. (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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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목들은 1980년대에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를 다녔던 시절의 경험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가령 고무줄 하면서 불렀던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 길 승리 뿐~(가사는 정확하지 않음)"의 '오랑캐'는 무엇이었는지, 나 역시 여러 차례 상을 받은 바 있는 반공 도서 독후감 대회나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포스터 대회들로부터 습득한 북한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의 기원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전쟁 당시 삐라의 세례를 받았던 전쟁 세대들이 기꺼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들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반대하는 반미로 그리고 종북, 좌빨(좌익빨갱이)과 자연스럽게 연결 짓고 악마 대하듯 증오하는지를 알 수 있다. 전쟁 당시 폭격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엄청난 화력과 식량 원조 등과 함께 삐라는 이들 전쟁 세대에게 '미국=유엔=정의'와 '공산=오랑캐=악마'라는 공식을 뇌세포 깊숙이 새겨놓았다. 뿔 달린 악마, 돼지, 소련과 중국의 괴뢰(꼭두각시)인 북한과 김일성의 이미지가 모두 이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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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공식은 전쟁 이후 세대들에게도 교육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다. 북한 지역에서 노획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던 오천석과 장리욱은 극동사령부의 심리 작전에 참여해 미국인 요원들과 심리 전용 원고 작성, 라디오 방송 내용 조정, 포로 대상 교재 제작일을 했는데, 오천석은 전쟁 후 한국교육학회장,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제4장 교과서와 심리전의 재생산 메커니즘'은 삐라에서 구축된 냉전의 논리가 어떻게 남한 교육에서 재생산되었는지를 세세히 짚는다. 특히 외솔 최현배가 편수국장을 맡은 전쟁 시 교과서 <전시 교재>는 폭격기, 제트기를 비롯한 미군과 유엔군 비행기 구별 방법과 중공군을 쳐부수러 간다는 내용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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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기에 대한 설명은 3, 4학년 <전시 생활>에 가면 더욱 구체적인데 그 내용이 무시무시하다.
"비행기가 하루에 일천 번이나 쳐들어가서, 이번에 새로 나온 네이빰탄을 막 퍼부었대. 그 폭탄은 넓이 90미터, 길이 270미터를 불바다로 만든다는구나."
명길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어머니. 그럼, 그게 원자탄이 아니어요?"
"원자탄 아니야. 이 폭탄은, 기름에 불이 붙어서 타는 것인데, 탕크 같은 것도 빨갛게 달아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까지 타 죽는단다."
어머니는 이 밖에도 재미있는 새 무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탄환을 화약의 힘으로 얼마든지 멀리 가게 하는 로켙포, 탕크를 쳐부수는 바주까포, 적군이 몰래 파묻어 놓은 지뢰를 찾아내는 기계, 밤이나 날이 흐린 때에도 적이 있는 곳을 찾아내는 전파탐지기, 모두 신기한 이야기뿐이었읍니다. 그 중에도 유도폭탄이라는 것이 제일 신기했읍니다. (282쪽에서 재인용)
지금 시각에서 보면 무기의 제원이나 살상효과를 자녀에게 자세히 설명해주는 어머니가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가령 "엄마가 밀덕ㅋㅋㅋ" 이런 식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대도시에 가해진 폭격이나 독일 드레스덴 못지않게 엄청난 폭격이 가해졌던 한국 전쟁 당시를 대입해보면 이런 내용은 전혀 우습지 않다.
미국에 적대하게 되면 이 엄청난 화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와 함께 미국 그리고 유엔과 함께라면 이 막강한 화력으로 악마와 같은 공산주의자들과 오랑캐를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쟁 세대는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이들에게 미국은 요즘 세대가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천조국(千兆國)이자 천조국(天助國)이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교과서에서 묘사된 미국은 그래서 더욱 생경하다.
그들은 자유와 평화를 주장하고, 무슨 일에 실제적이고, 활동력이 크고, 명랑하고, 모험을 좋아한다. 또 그들은 무엇이든지 세계 제일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의 사람됨이 너무 가볍고, 돈에 대하여 무섭고, 동양 도덕으로 보아 어느 방면의 도덕심이 부족한 것은 그 사람들의 결점이다. (<(성인 교육용) 공민 독본 3권>(1949년), 34~35쪽)
반공과 숭미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전쟁 세대가 주축이 되어 건설한 대한민국의 반공 교육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된 냉전 속에서 준전시 체제에 합당한 형태로 지속된다. 비록 그 톤은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정도로 다운되었지만. 저자는 제5장('미국적 가치'와 한국 사회의 윤리)에서 냉전 시절 반공 교육을 흠뻑 받은 386세대로서의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러한 반공 교육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몸이 아파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공부할 것을 채근하는 부모의 극성스러움의 근원 역시 그 곳에서 찾는다.
"부병(富病), 경쟁, 무한질주, 성공.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이다. (…) "이러한 논리는 심리전에서 정의가 무엇이든, 과정이 어떻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방침과 비슷하다. 남을 짓밟고 성공해 1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치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지받는 까닭은 전쟁 경험과 학습 받은 냉전 이데올로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 부병(富病), 경쟁은 자식 교육으로 번져갔다. 나를 포함한 386 세대는 아이의 빈둥거림을 못 참아내고 곧장 대학 입시로 매진하곤 한다. 경쟁심과 물질 만능주의를 체화하지 않으면, 이기심을 무한 계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정은 자본의 가치관을 뼛속 깊이 새기는 과정이다. 마치 성차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습속과 극우 독재 체제 속에서 자라면서 뼈에 새겨지고 몸에 체화된 의식과 버릇들을 좀처럼 바꿀 수 없는 냉전 세대처럼 말이다." (322쪽)
그런데 제5장('미국적 가치'와 한국 사회의 윤리)에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들은 저자가 언급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인 "부병(富病), 경쟁, 무한질주, 성공"이 삐라에 어떻게 강조되었는지를 더욱 자세히 설명한다기보다는 정작 앞의 1, 2, 3장에서 기술한 심리전을 더욱 보강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부제인 "한국 전쟁기 미국의 심리전"에 걸맞게 '미국의 심리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1, 2, 3장에서 언급되었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중국군, 북한군의 선전, 선동, 심리전에 대응한 미군의 심리전이 오히려 이 부분에 더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소련을 제국주의로 정의하는 심리전은 해방자 계획으로 잘 드러났다. 이 계획은 러시아가 한국을 해방했다는 공산주의 신화를 깨뜨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소련은 단지 한국과 만주를 얻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괴로 정부를 세웠다. 유엔 지지로 세워진 한국은 공산주의 아래 있는 북한과 반대였다. 매체는 러시아와 괴뢰들을 향한 반감을 일으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찍이 일본 군국주의자와 함께 했으며 한국을 식민지로 유지하면서 소련 혹은 중국 위성국으로 이끌려고 지금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자 계획의 목적은 "첫째, 한국 독립은 일본의 패배를 원하는 동맹국에 의해 자연스럽게 주어졌다. 소련은 단지 무의미하고 자기 본위의 역할만 했다. 둘째, 러시아의 점령은 북한에서 고통과 비참 이외에 가져온 것이 없지만 연합국의 일부인 한국은 민주주의적 정부와 경제적 진보를 가져왔"음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396쪽)
저자는 제5장에서 삐라를 통해 '미국적 가치'를 들어 공산주의를 매도하고 그 '미국적 가치'를 한국인들의 심성 구조에 안착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냉전 시기를 거쳐 한국 사회에 윤리로 자리잡은 '미국적 가치'에 이미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숨어있었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가 1980년대 서서히 그림자를 내비치다가 1990년대 본격적으로 얼굴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냉전은 이미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잉태하고 있었다. 과잉된 생산과 소비는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 온 지구를 헤집으며 자연을 훼손하고, 노동력을 갈취하고, 하나만으로도 수십, 수백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산더미처럼 쌓고 있다. 한국 전쟁 때 삐라의 생산과 소비는 이런 모습을 닮아 있다. 읽지도 않을, 지천에 널려 있는, 불쏘시개로 쓰일 삐라를 무한 생산해 뿌리지 않았는가. (441쪽)
이 주장이 다소 의아하게 들리는 것은 현대 전쟁의 특징인 물량전과 이미 그 효과를 책 전체에서 여러 자료를 동원하여 입증했던 심리전의 효과를 신자유주의 비판을 위해 갑작스럽게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지도 않을, 지천에 널려 있는, 불쏘시개로 쓰일 삐라를 무한 생산해 뿌리지 않았는가"라는 대목은 책 전체에 걸쳐 입증된 삐라를 통한 심리전의 효과와 상충된다. 한국 전쟁이 미국 역사에서 잊힌 전쟁 취급을 받는 이유에 대한 주장도 뜬금없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 논리, 그 공을 인정한다면 두고두고 기념하고 퍼뜨려도 문제가 없을진대 미국에서 한국 전쟁은 왜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은 걸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바로 "바로 냉전의 빈약성 때문이다"라고 응답한다.
냉전 논리에는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어떠한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그 어떤 가치도 담아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의 삶은 늦든 빠르든 진보적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을 필두로 해서 냉전에 기반한 그 어떤 전쟁도 인류가 지향해야 할 진보적 가치를 생산해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악'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거짓과 속임수, 사기와 협박, 위협과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가공할 만한 무기와 인간에 대한 불신. 한국전쟁은 냉전의 서막으로서 이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국 역사에서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잊힌 전쟁으로 감추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오직 한국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에게만 향수와 젊음을 기억나게 하는 전쟁이었는지 모른다. (428~429쪽)
사실 관계 파악에만 집중하던 책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는 저자의 선악 판단에 근거한 미국의 심리전에 대한 질타가 이어진다. 그리고 미국이 수행해온 다른 전쟁에 비해 한국 전쟁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미국 역사 자체로 소급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유럽 지식인들은 대거 미국으로 넘어왔다. (…) 유럽 지식인과 사상사는 한마디로 지금까지 미국이 가지고 있던 가치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 이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냉전 논리다. 냉전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미국식 자본주의가 아닌 다종다양한 사상과 경향들을 친구와 적으로 정리했다. 한국 전쟁을 앞뒤로 미국은 유럽에서 전파된 불안 요소들을 말끔하게 정리해나갔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이며 한국 전쟁이 미국 사회와 국제 사회 그리고 냉전 시대의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음을 책 후반부에서 주장한다.
그리고 "한국은 아직도 냉전의 틀 속에 갇혀 있고 냉전과 결합된 신자유주의는 왜곡되고 극단적 행태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 부, 과잉생산과 소비가 최고 가치인 세상이기 때문에 예전에 '정의'라고 외쳤던 가치와 윤리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 자체에 대한 이견은 없지만, 냉전 논리와 신자유주의의 연결에 대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자료들은 미국의 물량전과 심리전의 메커니즘과 효과를 설명한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미소 냉전의 최전선으로 현재에도 유일한 냉전을 치르고 있는 남한이 미국의 가치를 이견 없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고도성장한 한국 사회가 왜 다른 곳보다 신자유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여기에 있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굳건하지만, 신자유주의의 기원 중 하나로 고려해볼만한 냉전 논리를 한국에서 횡행하는 신자유주의의 직계 조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더 심층적으로 연구되어야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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