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소설가 구니키다 돗포가 말한 것처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부모, 스승, 친우와 같이 우리 인생을 결정했거나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저 한번 스쳤던 것 뿐인데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들은 나와 같은 평범한 운명을 공유한 사람들이라서 잊을 수 없다는 게 그가 소설에서 힘주어 환기하고자 한 말이었다.
최장집이 이 책에서 만나본 사람들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이름 없는 대중들이다. 그들은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노동자이기도 하고, 청년유니온의 조합원이기도 하며, 영세 봉제 공장의 노동자이면서 사장이기도 하다. 지역 자활 센터의 수급자이기도 하며 재래시장의 상인이기도 하고, 농민 운동에 참여했으나 가망 없다는 심정을 갖게 된 농민이기도 하며, 그 자식들인 지방대 학생들이기도 하다. 수렁에 빠진 신용 불량자와 이주노동자들도 만날 수 있다.
▲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최장집 지음, 폴리테이아 펴냄). ⓒ폴리테이아 |
최장집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의 표정 앞에서 거듭 정당에 기반을 둔 대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음미하는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그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이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과 열망이 제대로 대의되는 정당 체제, 또 그렇게 대의된 정치 세력들이 경합과 타협을 통해 실질적인 정책을 실현하는 정치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사람들의 절망과 열망은 왜 정치 세력에 의해 대표되거나 대의되지 않는 것일까. 대체적으로 그가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노동을 대변할 진보 정당의 부재,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지속적 폐해, 지난 민주 정부의 무능력, 대안 없는 정치권의 추상화되고 구호화된 반대 담론, 대안적인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의 부재 등이다. 대체로 이것이 정당으로 요약되는 정치 엘리트에 대한 비판이라면, 반대로 스스로의 요구를 결집해 정치 과정과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회의도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보다도 이 책에서 최장집이 반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의미 있는 대안은 영국의 사회학자 토머스 마셜이 제안한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은 성장과 효율성, 시장 경쟁의 경제적 가치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충돌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시장 경쟁이 극단화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쟁에서 패배한 자에 대한 소외와 배제를 낳고 그것이 심화될 때, 공동체로의 통합이나 공존은 불가능해진다. 소외되고 배제된 시민들은 정치 참여로부터도 소외되는데, 이는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위기 모두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약화하거나 제거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기여도와 무관하게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기본 생활과 복지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이를 통해 삶의 기회가 확대되도록 하는 것을 공동체의 의무라고 인식하는 사회 윤리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최장집의 주장이다.
최장집이 '사회적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민주주의의 윤리적 이상인 동시에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사회 정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단순한 복지 국가 논의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내 판단에 이러한 '사회적 기본권'의 강화는 '기회의 평등'을 역설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결과의 공정'이라는 공화주의적 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의 보완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러한 최장집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노동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한계는 공동체의 공존과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적 가치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파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가치의 출발점인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 가운데 유독 자유, 그것도 '소유권'으로 제한된 자유만이 팽창되는 폐해를 구조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국가와 기업의 동맹이 이러한 현실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 판단에 동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기업화' 경향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기업 국가'라는 김동춘의 진단도 일찍이 제기된 바 있거니와, '국가의 기업화'에 의한 한국 민주주의의 이 끝없는 오작동은 일본의 정치적 후진성인 '국가의 관료화' 경향만큼이나 오늘날 '제2의 자연'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국가는 마치 기업이 노동자를 임의로 해고하듯, 국민 또는 시민을 실질적으로 비시민 또는 '난민'적 상황으로 배제해 버리는 일을 점점 당연시하고 있다.
최장집이 만나본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대중들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 그리고 환멸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이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연권에 해당되는 '시민권'을 오늘의 기업화된 국가가 체계적, 노골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부에 들어와서 우리들이 확인했던 저 끝없는 노동자와 철거민 등을 포함한 저소득 시민에 대한 공권력과 사권력(용역)이 결합된 압도적인 폭력과 모욕을 상기해 보면, 실질적으로 난민적 상황에 빠져버린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애초에 정치라는 공적 세계로부터의 배제를 이 기묘한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실질적으로 구조화하고 정당화하는 장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이란 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권리와 욕망을 대의하고 대표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최장집은 말하지만, 현실의 폭력 속에서 이들이 나날이 체감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대의 불가능성'의 명백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의 대의 불가능성은 한국 제도 정당의 역사적 경로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차라리 '정상 상황'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궁극적 도달점으로 간주하는 정치적 관성 아래서는, 노동을 대변할 정당의 출현이란 차라리 예외적일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을 확장하기 어렵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상대화하고 넘어서는 가치와 실천이 오늘의 정치 시스템에서 체계적으로 제한되고 있다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대의를 거부하는 불복종과 직접 행동을 통해, 대의 불가능한 노동 현실을 대의하라고 압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는 살아있는 민주주의다.
이것을 최장집은 다시금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낡은 관성이라고 말하겠지만, 오히려 낡은 관성에 빠져버린 것은 오늘의 정당 체제이기 때문에, 정당을 경유하는 것이 봉쇄되어 있는 반(反)정치적 상황에서는 스스로의 시민권을 대의(re-presentation)가 아닌 집단적 제시(presentation)의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행동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운동'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정당 외부에서 전개되는 시민들의 정치적 개입을 '운동'으로 규정해 비정상 또는 예외적인 것으로 낙인찍어버린다면, 자본의 폭력과 대의 불가능한 정치 현실 앞에서 시민들은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은폐된 폭력과 무기력에 그저 순응하라는 말밖에 안 된다.
가령 오늘날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각 지역에서 전개되는 각종의 직접 행동들은 정당 정치로 상징되는 오랜 정치적 이데아가 현실의 압도적인 붕괴 상황 앞에서 제대로 된 정치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새로운 정치적 표현과 반발력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대의제-정당 정치 전체를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 비정당적 정치의 세력화는 우리가 직면하게 될 미지의 민주주의가 대의 체제로 일원화돼 수렴되기보다는 하향적인 정당 정치와 상향적인 비정당 정치 간의 경합을 통해서라야만,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각성과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최장집은 지난 민주화 정권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정권은 바뀌어도 결국 경제 정책은 오히려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악화를 보조하고 용인한 것은 누구였을까. 그가 만났던 여러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을 구조화하는데 연루되었던 자들은 누구인가. '노동'을 의식하지 않아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정치 계급' 자신이었다.
왜 이들은 정치 계급이 되었는가. 두말할 필요 없이 오늘의 제도 정치로의 수혈 통로란 학력 엘리트, 운동 엘리트, 상층 자산가, 이른바 '사회 지도층'들의 진입만을 용이하게 만드는 제도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적 상황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민주주의를 채용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미국의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이 명백하게 명시했듯 소유가 있는 자에게만 권리가 있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또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전제는 갈수록 현실이 되고 있다. 동시에 투표 행위를 포함하여 정치라는 공적인 세계에 참여하는 시민의 비율 역시 학력과 재산에 비례하고 있음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간명하게 말하면 포기할 수 없는 배타적 이해관계를 고수하려는 편에서는 다양한 자원과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힘을 축적하지만, 헐벗은 몸을 빼고는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사람들 편에서는 정치에 대한 체념과 환멸이 지배적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정치적 환멸과 무기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장집이 말한 대로 '사회적 시민권'의 범주에서 구체적인 정책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실현해 나가야겠지만, 그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근원적으로는 지난 60여 년 내내, 민주화 이후 25년 내내 망각되었던 국가와 시민의 존재 근거에 대한 가치의 성찰과 전환이 필요하다. 한 국가 안에서 우리가 시민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스로의 자유를 실현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타자들과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바닥으로의 경쟁'으로 전락한 소유욕의 배타적 추구의 끝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가. 유기체도 그렇지 않거늘 무한 성장하는 자본주의는 과연 가능한가. 인간다운 삶이란 대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절망스러운 고통에 대한 유효한 처방전인가. 그리고 민주주의는 국가는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은 정책이나 시스템의 보완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나면서 던지게 되는 이런 '인문 정치'의 물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인간적 상처들"과 대면해, 사회과학자들이 그들의 내면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최장집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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