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신작 <잡지, 시대를 철하다>(돌베개 펴냄)는 전작들이 보여준 저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한다. 1920~50년대까지의 각종 잡지와 신문, 단행본들을 꼼꼼하게 독파하고 수집했던 그의 아카이빙이야말로 작가 본인의 비밀 창고일 텐데, 그것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이 책을 고맙게 받아들게 된다.
그동안 1930~40년대 기록물을 변주한 책들은 많이도 나왔다. 대부분 '모던 껄'이나 번화한 도시적 풍경에 대한 풍속사에 초점을 맞췄다. 그럼으로써 영화와 드라마에까지 '코스모폴리탄들의 도시'로서 1930년대 서울을 조명하는 풍광만 강조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에 비해 <잡지, 시대를 철하다>는 당시 간행물들 사이사이에 화려한 도시사 이외에도 얼마나 촘촘한 삶의 결이 존재했는지를 입증하는 소중한 자료다.
▲ <잡지, 시대를 철하다>(안재성 엮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
게다가 수많은 글들에는 일본의 검열 때문에 몇 십 줄씩 삭제되거나 '고국'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어 "○○"으로 표기한 흔적이 남아있다(일본은 조선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잡기이다. 쓸 수 없는 것은 모조리 빼고 정말 잡것만을 가지고 이럭저럭 썼다"(<개벽> 제71호)라고 토로하는 글 앞에서는 외부의 압력을 피해 최대한 그림자놀이를 해야 했던, 그 와중에도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전달하고자 애썼던 저자들의 애달픈 심정이 배어난다. 이 같은 글쓰기의 형식이라든가 감수성의 차이, 세계 인식 등의 문제에 있어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선의 현실과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지금까지 '모던 조선'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 너머로까지 시각이 확장될 것이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는 7장으로 나뉜다. '돈아! 네 이름이 돈이지?-식민지 시대의 야경', '여보시오, 우린 조선의용군이오!-수난과 저항의 현장', '공산주의자는 왜 공장에 들어가는가?-조선을 적신 붉은 사상', '민족 반역자를 잡아라!-해방 직후의 풍경',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혁명 운동가의 소문과 진상', '벽초 홍명희를 만나다-논쟁적 인물들을 찾아서',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시대의 선두에 선 여성들'. 각 장은 1930년대에서 50년대에 이르는 조선의 노동의 풍경, 특히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항일 운동 전개, 여운형이나 박헌영 같은 유명 인물부터 시작하며 김명시, 권오설, 하준수, 정칠성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활동가들의 고달픈 삶의 궤적들을 증거한다.
이중에서도 <잡지, 시대를 철하다> 한 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들이 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장군의 칭호를 들은 용맹한 투사로, 중국 땅에서는 백마를 타고 전선을 누빈다 하여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던 조선의용군 김명시, '조선공산당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 신문기자, 건설업자 등으로 삶의 진로를 바꿔버린 채 1963년 숨을 거둔 임원근,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이었고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여러 여성 단체를 결성하고 "1931년에는 전국적 항일 계몽 조직이던 신간회의 중앙 집행 위원"까지 지낸 정칠성, 그리고 "동양 고전화 속에서 고요히 빠져나온 듯한 우아하고 수려한 미인"이었으며 박헌영의 첫 부인이자 박헌영의 절친한 동료였던 김단야와 재혼하고 비극적인 생을 마친 주세죽('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삼천리>, 1931년) 등. (참고로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비롯한 일제 하 항일 공산주의 운동가의 뒷얘기는 역사학자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펴냄)에 자세히 나온다.)
혹은 반민특위에 회부된 유명 인물들의 초라한 말년은 지금까지도 굉장한 스냅샷으로 육박해 들어온다. 춘원 이광수가 사과 한 알을 먹고 싶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연인으로 알려진 배정자가 "진정 따끈한 장국밥을 한 그릇 먹고 죽고 싶소"라고 '평생 소원'을 토로하고, 대표적인 친일 인사 박중양이 조사를 받고 나오다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아 그 옛날이 나쯔까시이나(아아, 그 옛날이 그립구나)"라고 외치는 장면('민족 반역자를 잡아라!', <신천지>, 1949년).
끽연점 '멕시코'에서 돈 몇 푼으로 값싼 차 한 잔에 두세 시간씩 수다를 떨며 시간을 죽이던 고학력 백수들에게 '벽화'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는 너스레('종로야화', <개벽> 신간 제1호), 유한부인들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전성기를 구가하는 무당 경기의 비판('무당집의 흑자 경기', <비판>, 1937년), 1926년 6·10 만세 운동 전후로 임의 연행되었다가,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수감 노인이 틈만 나면 '나 좀 놓아주우. 술 사줄게 놔주'라고 소리 지르는 것에 시름을 잊고 웃고 마는 장면('유치장 풍경', <개벽> 제71호)도 신선하다.
'풍암리의 비극', '일등병의 일기', '여보시오, 우린 조선의용군이오!', '여순반란 사건의 진상' 등의 글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투쟁의 역사를 엿보게 한다. 안재성의 설명에 따르면 동학 혁명에 나섰다가 살아남은 이들이 항일 의병으로, 3·1 운동의 참여자로, 이후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가 무장 투쟁가로, 나중에 빨치산으로 그리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한국 내 투쟁의 궤도를 직선적으로 그리는 저자의 역사관이 다소 기계적이지 않을까 싶더라도, 부패한 권력과 외세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민중들의 투쟁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은 충분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일제 강점기 동안 왜 조선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는지를 저자가 지적하는 부분도 눈여겨 볼만하다.
"3·1 만세 운동 이전의 항일 운동이 특정한 이념을 가졌다기보다 외세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의식이 주류였다면 이후 투쟁은 명백히 사회주의 사상이 이끌게 됩니다. (…) 사회주의 이론은 일제와 같은 제국주의의 침략이 자본주의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던 소련은 실제 항일 투쟁에 막대한 자금과 조직적인 지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의 또 하나의 중요성이라면, 현 시대를 가장 생생하게 반영하는 매체인 신문과 잡지의 기록적 가치다. 워낙 동시적인 매체다보니 발간 날짜에서 하루만 지나도 신문과 잡지는 순식간에 '옛 것'이 되어 버려진다. 묵직한 역사, 혹은 미래 예측이라는 '지식'을 주는 대신 동시대의 정보를 기록하기 때문에 시시하고 천박하거나 폐품으로 취급받는 매체들의 아카이빙이 왜 중요한지, <잡지, 시대를 철하다>는 묵묵히 인정한다. 단독 현장 보고 등의 형식에서 비롯되는 기자의 짜릿한 흥분감이 그대로 노출되는 주관적 어조 등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는 객관성을 가장한 글쓴이의 '정제된' 언어로 재정리된 역사책이 아니라 동시대 대중매체의 육성으로 중계되는 신문 그 자체다.
이를테면 일본군에게 호송되는 거물 여운형을 기차 안에서 취재한 '열차 안의 여운형'(<삼천리> 제6호), 3·1 운동 이후 65세 강우규 의사가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 폭탄을 투척한 현장에 있던 기자가 쓴 '남대문역 폭파 사건'(<동광> 37~38호, 이것이 기사가 아니었다면 일본 기자들이 눈이 시뻘개져 "다이나마이트! 바꾸단(폭탄), 바꾸단"하면서 소리 지르고, 조선 귀족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이완용 씨는 벽을 향하여 손톱을 씹으며 고요히 있었다" 같은 묘사가 가능했을까?), 반민특위 곳곳의 풍경을 경쾌하게 묘사한 '민족 반역자를 잡아라!'(<신천지>, 1949년) 등은 어느 역사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감흥을 전달한다.
특히 영상 매체를 통해 '모던 껄의 시대', '벨 에포크'처럼 과장되게 낭만화된 조선의 1930~40년대 이면에서 빈곤과 투쟁, 이념에 진지하게 매몰되었던 또 다른 이들의 맨얼굴을 보고 싶은 이에게 강력 추천한다. 물론,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또 다른 소재거리를 찾는 드라마 작가, 시나리오 작가에게도 역시 <잡지, 시대를 철하다>는 보물창고로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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