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을 위한 모금에 내 용돈을 보탰는지 어땠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경찰이 추모비를 야밤을 틈타 철거하려 하고 학생회가 돌비석을 밤마다 옮겨 놓았다가 아침이면 제자리에 갖다 놓기를 반복하고, 그러다가 결국 경찰에 빼앗겼던 것은 기억한다. 새로 만든 추모비는 경찰이 파 갈 수 없도록 깊이 묻었던 것이며, 글로벌 플라자를 신축하면서 추모비가 있을 자리를 잃어버렸던 것도 기억한다. 그 추모비는 지금 사회대 건물 앞의 '여정남 공원'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비석을 다시 떠올린 것은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발언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도 철이 들어가고 있는 중이라 스물 몇 살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 보이기도 한다. 느닷없이 연행되고 구속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된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느꼈던 절망감 같은 것들, 억울함과 분노와 고독과 절망 그 자체였을 이후의 수십 년간의 삶 같은 것. 작은 비석 하나가 제자리를 찾기까지의 그 오랜 역사의 고단함과 지난함에 대한 엄숙한 비감 같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긴 역사를 단숨에 부정하는 반성 없는 정치의 몰염치와 비인간성이 새삼스럽게 끔찍하다.
비석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새겨진 기억들로 인하여 잊을 수 없는 역사가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새로운 인식과 감각으로 현존하는 역사들을 만들어낸다. 대학 시절에 아침마다 새로 붙었던 대자보와 학생회의 확성기로 익혔던 역사적 사실들은 오늘의 내 삶 속에서 다른 계기로 떠오르고 확장되면서 다시 의미화된다. 우리가 역사를 과거의 것으로 묻어 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도, 왜곡된 진실은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로잡아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의 기억과 체험은 현재의 삶을 투과할 때 더 큰 의미로 증폭된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기억과 체험은 현재의 삶에 대한 시각이 겹쳐질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로 무르익을 수 있다. 염무웅의 산문집 <자유의 역설>(삶창 펴냄)을 읽으면서 과거의 체험을 현재로 투사하고 다시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기억으로 더듬는 과정이 만들어내는 사려의 깊이, 근심의 균형 감각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 <자유의 역설>(염무웅 지음, 삶창 펴냄). ⓒ삶창 |
고통을 고통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희망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 우리는 만해의 '님의 침묵'으로부터 이 역설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산문집의 제목인 <자유의 역설>은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만해의 시정신에서 따온 것이다. 만해의 심오한 시 세계에 대해서 별다른 해석을 붙일 주제는 못되지만,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란 현실의 수많은 장애와 구속으로부터 비로소 절실하게 되새김되며, 그리하여 그 현실에 얽매여 싸우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또는 그 현실에 얽매여 그 현실을 개탄하고 근심하고 분노하며 마침내 거기에 반대하는 과정 속에서 자유와 해방이라는 추상어는 내 삶의 영역으로 실감된다는 것도 알겠다.
저자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이 자유의 역설이, 구속과 해방의 착잡한 얽매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주코티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이집트에서, 가장 치열하고 뜨거운 현장에 환영처럼 덧입혀지는 기억의 시간들 때문이다. 물론 이 기억이 독자인 나의 기억과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기억들이 그 현장의 뜨거움과 섞이면서 때론 서늘하고 때로 안타깝게 번져나가는 장면 자체로도 우리는 '고통의 뿌리'의 존재감을 묵직하게 느낄 수 있다. 사적인 기억들을 끊임없이 역사적 맥락으로 다시 읽어내고 그것을 다시 현재의 삶으로 환기하는 지난한 시간들 때문에 이 기억들은 공공성의 무게로, 체험들의 역사로 다시 의미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민주주의는 4·19와 군부 독재에 연결되지만 그것만이 아니며, 민족 화해의 열망은 월남한 가족사나 분단의 비극과 겹쳐지지만 또한 그것만이 아니다. 외세로부터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고 그것이 더욱 극심한 지경에 이른 지금의 상황에서 민족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위한 조건이며, 국가의 잔혹한 지배는 여전한 악몽이므로 민주주의 또한 여전한 희망이다. 민족 화해와 민주주의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2년 광화문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대~한민국'의 구호가 저자에게 그리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단 환상이라거나 배타적 민족주의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던 당시의 여러 논자들의 의견과는 또 다른 의미로 말이다. 저자에게 '대~한민국'이 마음껏 외쳐도 좋을 만큼 자랑스럽거나 감격스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한 국가의 국민이 되기 위해 겪었던 숱한 수난이 착잡했을 것이고, 좌절된 4·19와, 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야만적으로 탄압했던 지난 정권들의 기억이 광장의 외침 위에 또다시 덧입혀졌을 것이다.
기억은 해방의 감격과 유신의 강요된 국가주의로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으로 뻗어나간다. 다시 국가를 긍정한다면 그것은 "이승만·박정희가 대표하는 통치 행위적 영역"은 "시민적·민중적 영역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체포·고문·투옥·학살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원한도 때가 무르익으면 대한민국의 환생과 부활을 위한 값진 거름일 수 있는 것"(25쪽)이다.
그래서 2002년의 광화문 광장은 2011년의 광화문 광장으로, 그리고 2011년의 주코티로, 2003년의 바그다드로, 또는 1960년의 안국동으로, 마치 마법의 양탄자처럼 날아오르고 펼쳐졌다가 다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수렴된다. "자신을 국가의 주권자로 의식하느냐, 아니면 국가의 압제와 수탈을 견디며 살아온 피해자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태도가 형성될 수 있"지만, "핵무기가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전체의 평화롭고 민주적인 삶이 국가체제를 지키는 것"(49쪽)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 때, 경찰은 왜 그렇게 조그만 추모비 하나를 어쩌지 못해 안달했는지 모르겠다. 박정희가 죽은 지 10년이 훨씬 지난 때였고 불구적이긴 했지만 당시의 정부는 문민 정부라는 이름으로 군부 독재와 자신을 차별화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것조차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내상이면서 또한 아직 진행 중인 역사이기도 하다.
그 추모비는 이제 기념비가 되었지만 그조차도 역사의 완결형은 아니다. 또 다른 기억들이 그 비석에 보태지면서 다른 역사들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는" 일이 될지 어떨지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완결되지 않으므로 얽매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다른 기억들로 다시 두꺼워지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며 '자유의 역설'이라는 것은 조금 알겠다.
해방 이후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망라하고, 분단의 현실과 미국을 비롯한 제국의 오만과 자본의 횡포를 비판하며, 그래서 점점 피폐해져가는 인간의 윤리와 영혼을 근심하는 광폭 사유를 짧은 글에 압축할 수는 없지만, 애당초 그 기억과 체험은 서로 연쇄되어 있으므로 모든 '고통의 뿌리'는 하나이며, 그래서 '자유의 역설'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역사의 다른 이름이라고 덧붙일 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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